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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광복절에 걸어보는 '반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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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문화골목과 겹치는 반지길... 당시 대구읍성 규모 생각하면 수긍
임봉선, 이선애, 이희경... 신명여학교 출신 독립운동가들
현계옥, 권기옥... 남성들도 쉽게 하지 못한 거사에 앞장
진골목의 재발견,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의 국채보상운동
23~24일 대구문화재야행도 3.1운동 100주년 의미 더해

100년 전 대구의 역사와 이야기를 간직한 대구제일교회(왼쪽)와 계산성당이 석양을 맞으며 나란히 서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100년 전 대구의 역사와 이야기를 간직한 대구제일교회(왼쪽)와 계산성당이 석양을 맞으며 나란히 서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반지는 약속이다. 말초신경과 모세혈관의 끝, 새끼손가락에 건다. 약해 보여도 다짐이자 약속의 정점이다. 약속의 상징, 가락지를 빼 국채보상운동에 나섰던 이도 약해보였던 여성이었다.

대구 근대 여성 탐방로를 걷는다. 반지 모양의 길로 과거와 현재가 연결된다. '반지길'이라는 별칭이다. 반지가 이어주는 연(緣), 그때와 오늘을 이어주는 시공간의 '게이트웨이'다. 과거인 1907년 국채보상운동과 1919년 3.1만세운동, 그리고 현재인 2019년 광복절을 오간다. 대구의 자존심을 이어놓은 길 위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대구 여성들을 떠올린다.

100년 전 대구의 역사와 이야기를 간직한 대구제일교회(왼쪽)와 계산성당이 석양을 맞으며 나란히 서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100년 전 대구의 역사와 이야기를 간직한 대구제일교회(왼쪽)와 계산성당이 석양을 맞으며 나란히 서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반지길과 근대문화골목

'반지길'은 대구여성가족재단이 발굴한 대구근대여성탐방로다. 반지 모양의 둥근 길이다. 탐방로의 시작과 끝이 만난다 해서 '반지길'이다. 재단이 만든 카탈로그를 받아든다. 펼치자 둥근 반지 모양이다. 반지 속에는 1907년 즈음 대구여성들이 집중 조명돼 반짝인다.

시작은 청라언덕이다. 카탈로그를 훑는다. 가만 있어보자, 청라언덕을 내려와 다음 코스가, 계산성당이다. 청라언덕에 계산성당이라니. 설마 다음은 옛 제일교회고 진골목으로 연결되는 것인가. 예상대로다. 대구근대골목투어 2코스 동선과 비슷하다. 집에 있는 물건을 또 산 기분이다.

곰곰이 생각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 거론된 곳이 거듭 소개된다. 1910년 전후의 대구읍성은 동성로와 서성로 사이의 공간이 전부였다. 시공간은 좁았기에 겹쳤다. 심지어 이상화, 현진건은 영화의 카메오처럼 등장하기까지 했다. 같은 공간에서 인물이 바뀌고 재해석되는 것이었다.

청라언덕에서 알게 된 이들도 그랬다. 대구근대여성교육에 단초가 된 건 선교사들이었다. 근대골목투어에서 제대로 듣지 못했던 여성 선교사들의 헌신이 반복적으로 들린다. 특히나 고향에서의 부유한 삶을 버리고 머나먼 이국, 우리나라에서 낯선 모습의 여성들을 위해 헌신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삶을 마감했다. 여성 선교사 마르다 스위처, 마그다 콜러, 넬리 딕, 마르다 스콧 브루엔의 묘비를 청라언덕에서 특별하게 꼽는 이유다.

청라언덕과 대구근대문화골목을 이어주는 3.1만세운동 계단으로 대구시민들이 오가고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청라언덕과 대구근대문화골목을 이어주는 3.1만세운동 계단으로 대구시민들이 오가고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반지길의 대구여성들

청라언덕에서 3.1만세운동길 계단으로 내려오면서 우리는 임봉선이라는 인물을 알게 된다. 이선애, 이희경도 함께 계단에서 만난다. 1910년대 사람들치고 세련된 이름이다. 신명여학교 출신 여성독립운동가들이다. 이들이 신명여학교를 다니던 시절, 학교 교사들의 주축은 선교사들이었지만 1919년쯤에는 졸업생들이 교사로 교단에 선다.

신명여학교는 학생들에게 'A, B, C, D'와 방정식만 가르친 게 아니라 세계지리, 성경 등도 가르쳤다. '비전'이라는 걸 이식해준 것이다. 대구에서 있은 1919년 3월 8일 만세 행렬 주동 인물들이 6회 신명여학교 졸업생 임봉선과 이선애 등이었다는 게 우연은 아니다. 콩 심은데 콩이 난 셈이다.

청라언덕 선교사들이 거주하던 집 앞에는 그들의 묘비가 정렬돼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청라언덕 선교사들이 거주하던 집 앞에는 그들의 묘비가 정렬돼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반지길은 영화 '밀정'에서 연계순(한지민 분)의 모티브가 된 실존인물, 현계옥도 소개한다. 현계옥은 의열단원이었다. 현대의 영국 첩보원 007 뺨친다. 영어, 일어, 중국어에 능통하고 무기를 자유롭게 다뤘다 한다. 국가정보원이 롤모델로 내세울 법하다.

그런 현계옥은 애초 기생이었다. 달성 출신으로 조실부모한 뒤 17세에 대구기생조합에 들어가 기생이 된 그녀는 소설가 현진건의 사촌 형 현정건을 근대골목의 한 요정에서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현정건을 만나고, 4년 뒤 그를 따라 중국으로 가고, 의열단에 가입하고, 이후 활약상은 007이 뺨맞고 정신을 차릴 만큼 잘 알려져 있다.

현계옥의 당시 모습은 흑백사진으로 남아있다. 영화 '밀정'의 연계순처럼 여리여리하지 않다. '남장한 현녀사'라는 제목의 기사를 동아일보(1925년 11월 6일자)에서 볼 수 있는데 승마복을 입은 모습이 당당해 보인다.

이상정 고택에서 경일여고 2학년 학생들이 권기옥과 이상화, 이상정 형제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이상정 고택에서 경일여고 2학년 학생들이 권기옥과 이상화, 이상정 형제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권기옥도 나온다. 시인 이상화의 형수다. 시동생인 이상화 시인과 남편 이상정까지 셋이서 찍은 사진이 남아 있는데 최근에 찍은 사진처럼 보인다. 그 시대 여성이 사진 찍는 포즈치고는 대범하다. 그녀를 널리 알린 수식어는 '최초의 여성 전투기 비행사'다.

경일여고 학생들이 진골목에서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와 국채보상운동에 대해 관심있게 듣고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경일여고 학생들이 진골목에서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와 국채보상운동에 대해 관심있게 듣고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의 진골목

국채보상운동 관련 기록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돼 있다. 국사 교과서에도 명확히 실려있을 만큼 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가, 어떻게 참여했는지는 잘 알지 못했다. 그러던 2015년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란 이름이 들렸다. 정경주, 서채봉, 김달준, 정말경, 최실경, 이덕수라는 이름이 줄줄이 나온다. 전국 여성 최초로 나랏빚을 갚자며 나선 조직이다. 그간 참여한 여성들의 이름과 활약상을 알지 못하던 것을 대구여성가족재단이 2015년 알아냈다. 화교소학교와 정소아과의원, 백록요정의 진골목 이미지는 패물폐지부인회라는 이름이 발굴되면서 국채보상운동의 성지로 탈바꿈한다.

대구여성가족재단이 국채보상운동을 다룬 스토리북 '7부인을 찾아 떠나는 시간여행'에서는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낸다.

9일 낮 '반지길 투어'에 나선 경일여고 2학년 학생들이 진골목에 들어서며 국채보상운동과 관련된 공간들을 찾고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9일 낮 '반지길 투어'에 나선 경일여고 2학년 학생들이 진골목에 들어서며 국채보상운동과 관련된 공간들을 찾고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1907년 1월 서상돈이 국채보상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할 것을 결의한 뒤인 2월 23일, 대구 남일동에 거주하던 부인 7명은 국채보상운동에 여성도 참여하겠다는 취지문을 발표했다.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이 취지문에는 "나라 위하는 마음과 백성 된 도리에야 어찌 남녀가 다르리오"라는 내용과 함께, 나랏빚을 갚기 위해 은반지, 은비녀 등 총 131돈의 은 패물을 의연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취지문 발표 이후 여성 국채보상운동 조직은 28개로 늘어났다...'

여성인권과 여성운동에 관심 있는 학생들의 참여가 잇따른다. 취재가 있은 9일에도 경일여고 2학년 학생들은 '반지길'을 걸었다. 대구에 살면서 폭염에 놀라진 않았지만, 이렇게 많은 여성들이 독립운동에 동참한 줄 몰랐다며 놀란다. 여성독립운동가는 유관순밖에 몰랐는데 이토록 많은 여성들이 남성 못지않은 활약을 펼쳤다는 걸 알게 됐다면서.

섭씨 37도에 육박했던 9일 오후, 청라언덕과 연결된 100년 전 선교사들의 주택을 배경으로 학생들이 기록물을 만드는 등 활동에 여념이 없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섭씨 37도에 육박했던 9일 오후, 청라언덕과 연결된 100년 전 선교사들의 주택을 배경으로 학생들이 기록물을 만드는 등 활동에 여념이 없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대구문화재야행

'대구문화재야행'이 같은 공간에서 열린다. 23~24일 이틀간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다. 특히 올해는 3.1만세운동 100주년이 된 해다. '1919 다시 만나는 그날 밤'을 주제로 삼았다. 1910년대 격동의 시기, 근대골목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들을 종합했다고 한다.

만세운동의 기운처럼 여러 단체가 힘을 모은다. '독립의 밤', '시간여행 1919' 등 극단 한울림의 공연, 계산성당에서 펼쳐지는 파이프 오르간 연주, 영남 지역 최초의 여성 성악가 추애경을 기념하는 제일교회 합창단 클래식 음악회, 청라언덕에서 선보이는 신명고등학교 합창단 공연이 준비돼 있다.

섭씨 37도에 육박했던 9일 오후, 청라언덕과 연결된 100년 전 선교사들의 주택을 배경으로 학생들이 기록물을 만드는 등 활동에 여념이 없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섭씨 37도에 육박했던 9일 오후, 청라언덕과 연결된 100년 전 선교사들의 주택을 배경으로 학생들이 기록물을 만드는 등 활동에 여념이 없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인기 프로그램인 '청사초롱 야경투어'는 사전 신청할 수 있다. 골목문화해설사의 설명이 더해 지식이 쌓이는 느낌의 프로그램이다. 청사초롱을 들고 근대골목을 야밤에 걷는다. 쾌적하게 걸을 수 있는 때다. 처서를 지난 대구의 밤엔 가을 냄새가 나니까. 기왕이면 해거름이 좋겠다. 오후 7시를 전후로 저녁노을이 골목 가득 번진다.

대구문화재야행 홈페이지로 19일까지 하면 된다.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당일 현장 접수도 가능하다. 그러나 선착순이라는 점, 지난해에는 사전모집 인원보다 2배 넘는 이들이 신청했다는 점을 참고해야 한다.

근대골목 문화(재) 시설 12곳도 개방된다. 선교사 스윗즈 주택, 챔니스 주택, 블레어 주택, 이상화 고택, 서상돈 고택, 계산역사관, 옛 대구제일교회, 에코한방웰빙체험관, 약령시한의약박물관, 옛 교남YMCA회관, 계산예가, 김원일의 마당깊은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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