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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빨갱이/최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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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근 씨 최상근 씨

아이들이 송사리 떼처럼 나에게 몰려들었다. 아버지가 오리나무를 산에서 면 지서까지 지게로 져 나르는 것을 보았다며 졸라대듯 와글거렸다. 지게 진 아버지의 모습을 흉내까지 내며 나보다 더 초조해했다. 나는 그때 아랫동네에서 또래와 종일 딱지치기를 하고 오는 길이었다. 그러니 아버지가 오리나무를 산에서 지고 내려오는 장면도, 지서로 지고 가는 것도 보지 못했다. 초등학교 3학년 겨울 어느 날이었다.

며칠 전, 면 지서 경찰이 자전거를 타고 우리 집에 온 장면이 떠올랐다. 경찰은 아버지와 무슨 말을 나누는가 싶더니, 어떤 서류에 아버지의 지장을 받아가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아이들의 말을 들으면서 그 일이 오리나무와 관련이 있겠다는 정도의 짐작에서 그쳤다. 아버지는 이미 경찰과 안면을 틔운 뒤고, 다 아는 일이 아닌가. 현장에 없었던 나를 나무라는 듯한 아이들의 눈초리를 시답잖게 여겼다. 그러나 그 일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우리 집 과수원 근처 야산에서 자라는 쭉 뻗은 오리나무를 큰형이 가을 벼 베듯 베어 눕혔다. 사과나무의 가지 받침대로 쓸 요량이었다. 큰형의 오리나무 베는 장면은 동네에서 빤히 보였다. 동네 누가 지서에 고발했다. 당시만 해도 벌거숭이 산이 많아서, 산림녹화에 애를 쓰던 때여서, 사소한 벌목도 무겁게 처벌되던 험상궂은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오리나무를 지게에 지고 산에서 내려와, 마을 골목을 지나 십 리도 더 되는 지서를 향했다. 큰형이 베어 놓은 오리나무를 지서로 가져오라는 지시를 이미 경찰로부터 받은 터였다. 겨울 농한기였다. 할 일 없는 동네 사람들이 소매 속에 손을 넣은 채 골목에 삼삼오오 모여, 오리나무 지고 가는 아버지를 지켜보았다. 혀 차는 소리와 수군거림 그리고 헛기침 소리가 지게 꽁무니에 따라붙었다. 고발한 사람도 구경꾼 속에 섞여 있었다.

아버지의 옷은 땀에 푹 젖어 얼룩졌다. 아버지가 땀 흘리는 것은 오리나무의 무게 때문만은 결코 아니었다. 지서에 불려가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지난날, 지서 근처에도 가기 싫을 정도로 소름 끼치는 일을 겪은 적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지금 가지 않을 수 있는가. 사건이 부디 조용하게 마무리되었으면 하는 것이 소원일 뿐이었다.

지서 마당 한구석에는 져다 놓은 오리나무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오리나무 사건의 전말에 대한 조서가 꾸며졌다. 고발당한 사람은 큰형이었으나, 아버지는 큰형 대신 당신 이름으로 해줄 것을 경찰에게 빌었다. 아들놈은 앞으로 살날이 창창하다. 전과자가 되어서야 하겠느냐는 아버지의 호소에 입이 합죽한 경찰은 잠시 망설이더니, 아버지의 부탁을 모른 척 받아주었다. 아버지는 큰형에서 아버지로 바뀐 조서에 마지막 지장을 찍었다. 경찰은 큰형 이름이 나타나 있는 조서 앞 장과 마지막 장을 다시 쓰는 수고만 보태면 그만이었다. 경찰은 아버지의 이름까지 대필해 주면서 허공에다 대고 긴 한숨을 쉬었다.

"하기사 자식 호적에 뻘건 줄 그어져서야 되겠나. 청춘이 구만린데 쯧쯧."

경찰은 자신의 처신에 스스로 맞장구치고 싶었든지 했던 말을 되풀이하며 큰형에서 아버지로 바뀐 조서를 내려다보았다. 글을 모르는 아버지는 조서 대신 경찰의 표정을 살피며 사태를 짐작했다.

나는 아버지가 글 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논문서를 들여다보다가 궤짝 서류함에 툭 던져 넣던 기억이 전부다. 아버지는 아마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했던 것 같다. 묻지도 않았지만, 말씀도 없었다. 평생 토지와 어울리면 사실 글은 몰라도 되었다. 글 모른다고 수확량이 줄어들거나, 벌레들이 만만하게 보고 곡식에 탈을 내는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사주에는 관官이 없었을 것이다. 변변찮은 관이라도 버티고 있었더라면 하다못해 면 출입 정도는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삶의 매듭을 조금은 수월하게 풀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버지는 관은 고사하고 피고석에 앉아 처분이나 기다리는 처지에서 잠시라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별난 사람들의 재판에서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나는 방정맞게도 그들 가운데서 있지도 않은 아버지를 발견하곤 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아버지의 아픈 과거를 알고 난 후부터였다.

6.25 사변이 일어나기 직전 해 겨울, 해방의 어수선함이 미처 진정되지 못한 시절이었다. '산사람'이라 불렀던 무장공비가 면 지서 근처에 출몰했다. 산사람들은 지리산 줄기의 대왕산에 은신처를 두고 있었다. 해발 오백 미터의 대왕산은 청도와 경산의 경계에 위치했다. 지서는 대왕산과는 이십리도 넘게 떨어져 있었다. 국도로만 보면 대왕산에서 우리 마을을 거쳐야 지서가 나온다. 우리 마을은 지서에서 1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산사람들은 주로 밤에 산에서 내려와 지서를 기습하는 바람에, 지서 근처에서 소규모 총격전이 자주 벌어졌다. 지서는 산사람들의 주요 공격 대상이었다. 기습이 있는 날이면 꽝꽝거리는 총소리가 동네 사람들의 혼을 빼놓곤 했다.

겨울 어느 날, 산사람들이 백여 명이나 되는 대규모 인원으로 지서에 들이닥쳤다. 교전 중에 경찰 다섯 사람이 사망했는데, 총지휘하던 경찰서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서는 산사람들에 의해 점령당했으나, 날이 밝아 군인들이 투입되자 산사람들이 달아났다. 이후 지서에는 경찰 외에도 군인들이 주둔했다. 군인들은 주로 전라도 출신이었다. 아마도 경상도 군인들은 전라도에 배치되었을 것이다. 그때 사망한 경찰들 이름이 지금도 지서 안에 세워진 위령비에 새겨진 채 그날을 증언하고 있다.

지서를 한차례 점령당한 이후부터는 총격전이 더욱 자주 일어났다. 땅거미가 지면 지서 근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뚝 끊어졌다. 밤이면 산사람이 우세한 듯했고, 날이 밝으면 군경이 다시 치안을 유지하는 식이었다. 이 와중에, 희한한 일이 일어났다.

우리 동네에 서른이 넘어도 장가가지 못한 바보가 살았다. 그가 어느 날 동네 사람들 따라 장에 갔다가 우리 동네에 산사람이 있다는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녔다. 마침 지나가던 경찰이 그를 불러 세웠다. 그 바보에게 국밥 한 그릇을 사주며, 동네 사람 중 산사람이 누구인지를 캐묻기 시작했다. 그는 귀에 익은 이름을 아무렇게나 주워섬겼다. 아버지와 동네 김 씨 그리고 박 씨의 이름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이튿날, 아버지는 지서에 호출당했다. 아버지가 지서에 들어서자 경찰은 대뜸 바닥에 아버지를 꿇어 앉혔다.

"너가 빨갱이 새끼냐!"

경찰은 무장공비를 빨갱이라 불렀다.

"아닙니더."

"앞에서 다 불고 갔어 임마. 대장이 누구야!"

"모릅니더."

"어디에 숨겨 주었어! 몇 놈이야!"

"예?"

아버지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경찰이 들고 있던 방망이가 아버지의 등에 날아들었다. 아버지는 그대로 앞으로 나뒹굴었다. 경찰은 분풀이라도 하는 것처럼 넘어진 아버지를 군홧발로 걷어찼다. 가뜩이나 살벌한 지서 분위기가 아버지의 비명 때문에 더욱 냉랭했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산사람과 무관했다. 우리 동네뿐만 아니라 인근의 다른 동네에서도 아무도 산사람을 알지 못했다. 산사람들은 먼 타지에서 잡혀 들어간 사람들이었다. 산사람들이 쓰는 말씨도 여기 말씨와 달랐지만 그런 사실은 묵살되었다.

얼토당토않은 경찰의 고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아버지를 바닥에 꿇어 앉힌 다음 정강이 사이에 굵은 막대를 끼웠다. 아버지의 윗몸을 뒤로 재끼더니 정강이 위로 고문하는 경찰이 올라갔다. 정강이 사이에 낀 막대가 압박하는 통증은 상상을 초월했다. 정강이의 인대가 늘어나고 말았다. 다시 장작으로 아버지의 등짝을 후려쳤다. 옷에 피가 묻기 시작했다. 경찰은 계속해서 빨갱이 대장의 이름과 숨어 있는 곳을 말하라며 고문했다.

밤에도 고문이 이어졌다. 팬티만 입은 알몸의 아버지를 초등학교 철봉에 거꾸로 매달았다. 고춧가루를 넣은 주전자로 코에 매운 고춧물을 부었다. 아버지는 수시로 정신을 잃었다. 더는 원하는 대답을 듣기 어렵다고 판단한 경찰이 초주검이 된 아버지에게 솔깃한 제안을 하기도 했다. 동네 아무개를 빨갱이에게 협조한 사람이라고 말해주면, 당장이라도 풀어주겠다는 것이었다. 뻔한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밥을 굶긴 고문은 꼬빡 3일 동안 이어졌다. 온몸은 피투성이였고 의식은 가물거렸다. 고문해도 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 경찰은 아버지를 총살하기로 마음먹었다.

지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낭떠러지가 있었다. 논밭이 큰물에 떠내려가는 바람에 생긴 것인데, 그 아래는 하천이었다. 여름에는 아이들이 그 낭떠러지에서 아래로 뛰어내리며 멱 감던 곳이기도 했다. 저녁 무렵이 되자 아버지는 그 낭떠러지로 가기 위해 지서 밖으로 끌려 나왔다. 그때 군 장교 한 사람이 경찰의 행동을 제지하고 나섰다.

"아무래도 사람을 잘못 본 것 같소!"

그렇지 않아도 성과를 얻지 못해 안달하던 경찰이 발끈했다.

"어떻게 그렇게 단정한단 말이오!"

"빨갱이는 여기 지역 사람이 아니잖소."

순간 경찰은 말문이 막혔지만 십여분간이나 언쟁을 이어갔다. 마침내 경찰이 바닥에 퇴 하고 침을 뱉더니, 지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아버지를 빨갱이로 몰아 어쨌든 실적을 올리려던 계획이 틀어졌다. 총살해야 무장공비 사살 실적으로 기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군인이 다가와 지서 마당에 쓰러져 있는 아버지를 부축해 일으키더니, 지금 집에 갈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군인은 아버지에게 어디 한 번 걸어보라고 말했다. 마당에는 눈이 하얗게 덮여 있었다. 발이 눈에 빠졌지만 한시바삐 지서 밖을 나갈 생각 밖에 없었다. 이를 악물고 지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아버지를 뒤에서 지켜보던 군인이 팔을 휘휘 저으며 빨리 집으로 가라는 시늉을 했다.

살았다는 안도감이 아버지의 온몸을 휘감았다. 지서를 조금 벗어났다 싶어 보이자 눈 속에 엎어졌다. 생각을 바꾼 경찰이 언제 잡으러 올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굶은 데다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더는 걸을 수가 없었다. 그때 멀리서 등불 하나가 아버지를 향해 오는 것이 보였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등불이 구세주 같았다. 할아버지였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데리고 온 머슴의 지게에 나뭇짐처럼 얹혔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지서에 간 후 돌아오지 않자 안절부절못했다. 저녁마다 아랫동네로 내려가 지서로 뻗어 있는 신작로에 시선을 고정했다. 행여나 아버지가 풀려 나오나 싶어서였지만, 지서 쪽에서는 무시무시한 어둠만 짙게 깔려 있었다. 멀지 않는 곳에 지서가 보였으나 갈 수 없었다. 신작로에만 나가도 밤에는 어느 총에 맞아 죽을지 알 수 없었다. 등불을 든 할아버지는 신작로 인접한 가게에서 매일 꼬박 밤을 새웠다.

3일째 되던 날 밤, 멀리서 희끗희한 사람 모습이 보였다. 온 천지가 눈에 덮여 있어서 분명하지는 않지만, 아버지가 틀림없다는 것을 할아버지는 직감으로 알았다. 이 밤에 신작로를 걸어서 올 사람은 아버지밖에 없었다. 할아버지는 위험을 무릅쓰고 신작로로 나섰다. 우리 집 머슴도 할아버지 뒤를 따랐다.

실없는 말을 지껄인 바보 총각의 아버지가 새벽같이 아버지를 보러왔다. 아버지보다 먼저 지서에 불려갔다가 풀려난 동네 김 씨 박 씨도 아버지를 찾아와 머리를 숙였다. 아버지가 고문당한 이유는 바보가 지껄인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거기다 김 씨와 박 씨의 엉터리 증언이 겹쳐졌기 때문이란 사실을 아버지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기가 막혔다.

아버지보다 먼저 김씨 박씨가 지서에 불려왔다. 경찰이 허리에 차고 있던 방망이를 빼들어 책상을 내리쳤다.

"네놈들이 빨갱이냐!"

"절대로 아닙니다."

"그럼 누구냐!"

경찰의 호통에 얼이 빠져버린 김 씨가 응겁결에 아버지 이름을 댔다. 박 씨의 이름을 말할 수는 없었다. 박 씨는 김 씨 바로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박 씨는 쉽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버지가 빨갱이라고 진술하는 김 씨의 말에 힘을 보탰다. 험악한 지서 분위기에 두 사람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목숨 부지하기에 급급한 시절이었다.

아버지를 고문했던 경찰은 처음부터 그 정보를 반신반의했다. 정보를 제공한 자가 동네에서도 바보로 소문난 데다가 진술 역시 횡설수설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혐의자를 호출이나 하고 보자 싶었다. 혹시 무장공비를 잡는 날이면 출세에 적잖은 보탬이 될 게 아니가.

굴신을 못 하고 누워 있는 아버지에게 그들은 죽을죄를 지었다며 빌었다. 그들 중 누군가가 가져온 닭이 툇마루에서 골골거렸다. 그 소리가 기어들어 가는 듯한 그들의 목소리와 묘하게 겹치다가 따로 이어졌다. 아버지는 몸이 더욱 욱신거리는 듯했다. 사죄받는 것이 오히려 괴로워 그들에게 제발 돌아가 달라고 했으나, 그대로 앉아 있었다. 고문의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아버지는 한편으로는 솟구치는 분노를 억지로 삼켰다.

한동네에서 태어나 뼛속까지 농부인 줄 서로 뻔히 아는 사이에 빨갱이가 웬 말인가. 다들 그만한 사상을 가질만한 지식도 없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빨갱이가 되다니. 이 사람들과 예전처럼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아버지는 지서에서 얼핏 본 김 씨와 박 씨의 확인서를 떠올렸다. 거기에는 아버지가 무장공비임이 분명하다는 글과 함께 글 끝부분에 뻘건 지장이 꽉 찍혀 있었다. 고문 경찰이 그것을 아버지 코앞에 바짝 들이대던 기억이 났다. 글자를 모르는 아버지는 경찰의 말을 듣고 알아듣기는 했지만, 그 사람들이 그럴 리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내 아들이 요 며칠 전에 조곡댁에 도둑이 들이닥친 일만 경찰한테 이야기해 줬다 하데. 빨갱이라는 말은 입에 담지도 안 했지러. 저런 쳐죽일 놈들이 있나. 멀쩡한 사람을 이래 모질게 짓이겨놨네. 하이고 우짜겠노!"

바보 아들을 둔 아버지는 입에 거품을 물고 변명했다. 죄인처럼 곁에 앉아 아버지 눈치만 살피던 김 씨 박 씨도 차츰 좌불안석에서 벗어났다. 자기들은 처음부터 빨갱이 용의자 명단에 이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경찰이 보름 전에 도둑을 맞아 황소까지 잃은 아버지에 대한 것만 물어보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도둑맞은 일이 있다는 것만 확인해주었지, 아버지가 빨갱이라는 말은 입 밖에도 꺼내지 않았다며 스스로 흥분했다.

산사람들이 한밤중에 우리 집에 들이닥친 일이 있었다. 산사람은 모두 일곱 명이었는데, 그중 셋은 총을 들고 있었다. 얼굴은 수염으로 더부룩했고, 몸은 야윌 대로 야윈 모습이었다. 그들은 우리 집 대문과 마당 한가운데와 뒤란에 각각 총 든 산사람을 보초 세웠다. 서두르지 않았다. 동네 사람 중 아무도 신고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신고했다가는 보복이 두려웠다. 신고하러 간다고 해도 신고받을 지서는 너무 멀리 있었다.

마당에는 등불이 켜졌다. 산사람들은 집안을 대낮같이 밝게 해놓고, 천천히 온 집안을 뒤졌다. 대청 구석에 있는 쌀 뒤주에서 쌀을 자루에 퍼 담았다. 쌀 뒤주 바닥 긁는 소리가 났다. 보리쌀을 담아둔 커다란 독을 깨끗이 털었다. 마루에 쌓아 놓은 콩과 고구마도 자루째 마당 한가운데 모았다. 장롱 속의 옷을 몽땅 보따리에 쌌다. 동네 사람들은 모두 깨어 있었지만, 밖을 내다보기조차 두려웠다.

산사람들은 마구간에서 끌어낸 황소 등에 길마를 얹고, 달구지의 긴 쳇대 사이에 황소를 밀어 넣었다. 마당에 쌓아놓은 곡식 자루들이 달구지에 이삿짐처럼 바리바리 실렸다. 황소는 워낭 소리 쩔렁이며 마당 한가운데서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장이 손을 들어 출발을 알리자 달구지는 대문을 나서서 골목으로 사라졌다.

날이 밝자 동네 사람들이 풍비박산 난 우리 집 마당에 몰려들었다. 우리 집뿐만 아니라 동네가 온통 벌집을 쑤신 것처럼 어수선했다. 사람들은 지난밤의 무사함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산사람들을 욕했다. 소도둑 이야기는 들었어도, 양식에 달구지까지 도둑질하는 비적은 처음 본다며 언성을 높였다. 마당에는 두려움과 도둑맞지 않은 데 대한 다행스러움 그리고 우리 집을 동정하는 마음들이 교차했다. 그때 대문 쪽에서 갑자기 왁자한 소리가 들렸다. 동네 청년들이 소대가리와 소 껍질을 지게에 지고 들어왔다.

산사람들은 달구지를 끌고 가던 우리 집 소를 잡았다. 더는 달구지 길이 없는 동네 앞 하천에서였다. 살코기는 다른 짐과 함께 짊어지고 가고, 대가리와 가죽만 남겼다. 모여든 사람들은 산사람들이 사라진 쪽을 향해 다시 한번 삿대질하며 고함질렀다. 마치 자신들이 당하기라도 한 듯 분해했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3년간 노동해서 번 돈으로 뒤뜰 논 두 마지기와 황소를 마련했다. 죽은 황소는, 그 황소가 밑천이 되어 여러 번 팔고 사기를 거듭한 끝에 남은 황소였다.

일본이 한창 군국주의로 치닫던 1940년 무렵이었다. 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해 일본에 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시국이 어수선했을 뿐만 아니라, 특별한 기술도 없이 단순히 노동자 신분으로 일본에 간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일본 순사에게 선물을 갖다주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버지는 일본 순사에게 줄 모시 적삼 두 벌을 마련해서, 동장을 통해 전했다. 몇 달 후 어렵다던 일본행 여권이 나왔다.

일본에 도착하니 먼저 터 잡은 먼 친척이 마중 나왔다. 친척이 하던 일에 아버지가 합류했다. 일본인들보다는 임금이 삼 분의 일 수준이었지만, 아버지에게는 큰돈이었다. 돈 버는 재미에 빠져 힘든 막노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주로 건설 현장에서 일했는데, 아버지처럼 돈 벌러 온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았다. 그 사람들과 함께 합숙 생활을 했다. 그들 중에는 노름판에 끼어들어 애써 모은 돈을 날리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아버지는 한눈팔지 않았다. 팔도의 사나이들이 모인 곳이라 싸움도 자주 일어났다. 싸움이 돈 모으는 데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저녁에 배가 출출하면 울타리도 없는 일본인 과수원에 들어가 사과를 한 자루씩 따와 한 방 가득한 동료들과 나누어 먹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일본인 여자들이 모여 아버지 합숙소를 가리키며 쑥덕대곤 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사과 서리는 배고픈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유일한 간식거리였다.

아버지의 일본 노동자 생활은 만족스러웠다. 조금만 고생하면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 년이 지나고 또 일 년이 지났다. 3년이 다 될 무렵에 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았다. 아버지는 서둘러 짐을 챙겼다.

집 대문에 들어서니, 위독하다던 할아버지가 마당을 쓸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아들이 보고 싶어 일부러 당신이 위독하다는 전보를 쳤다. 까짓 거 돈 벌어서 다 뭐해. 아들만 객지로 내몰아 고생시키지. 그래놓고 내가 어찌 발 뻗고 사나.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자식 얼굴도 못 보고 죽는다고 생각하니 조급증 나서 못 살겠다. 할아버지는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했다. 할아버지에게 한두 해는 그렇다 쳐도 3년은 길었다.

아버지는 3형제 중 둘째였다. 장남인 큰아버지는 우리 집 대문 바로 앞에 큰 기와집을 짓고 살았다. 할아버지는 큰아버지가 있는 큰집에서 살아야 했지만, 큰집에는 가지 않았다. 큰며느리는 먼 고을의 부잣집 딸이었는데, 시집올 때 몸종을 데리고 올 정도였다. 큰며느리가 시부모 모시기를 거부해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큰집에서 살 수가 없었다. 자연히 할아버지 할머니는 우리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사람들이 불효한 집안이라며 흉을 보았지만, 아버지는 사람들의 평판에 개의치 않았다. 할아버지 할머니 모시는 것을 은근히 다행으로 여겼다고 한다.

내가 아버지의 효성을 직접 목격한 것은 사과밭에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를 관리하는 모습을 지켜봤던 어릴 적이었다. 아버지는 산소의 풀을 수시로 깎곤 했다. 과수원에 일하기 전, 새파랗게 날을 세운 낫이 처음으로 사용되는 것은 언제나 산소 잡풀을 벨 때였다. 산소 풀 베는 일을 마친 후에야 과수원의 이런저런 일을 했다. 그런 아버지의 일 습관 때문에 산소 주변은 언제나 파란 잔디만 가득했다.

산소 주변에 피었던 오랑캐꽃은 지금도 핀다. 그 꽃을 보면 정성을 다하여 산소를 벌초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생각나는지 아버지의 얼굴에 번지던 즐거워하던 표정은 잊을 수 없다. 콧노래 흥얼거리던 그 모습까지.

아버지는 다시 일본 갈 채비를 서둘렀다. 할아버지는 논밭 농사나 지으라며 아버지의 일본행을 반대했다.

"왜놈 땅에 뭣 하러 가!"

할아버지는 심기가 불편했다. 아버지 없이는 집안이 텅 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대로하여, 지겟작대기로 아버지의 다리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아버지는 마당에 널브러져 꼼짝하지 못했다. 그 일 이후로 아버지는 두 번 다시 일본에 간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같이 일했던 사람들이 눈에 선했다. 우리나라 사람들끼리 한데 뭉쳐 일했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로부터 괄시도 비교적 덜 받았다. 아버지는 그렇게 몇 년만 더 고생하면 부자가 될 것 같았다. 아버지에게 일본은 기회의 땅이었지만, 할아버지의 반대에 막혀 어쩔 수 없었다.

동네 청년들이 가져온 황소의 유품 같은 대가리와 껍데기는 다시 대문 밖으로 내보내 졌다. 일본에서 힘들게 벌어 온 돈으로 사들인 황소가 껍데기로 돌아오다니.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인단 말인가.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점심때쯤 이었을까. 소고깃국 냄새가 대문 안으로 번져 들어왔다. 동네 사람들이 동사 마당에서 가마솥을 걸어 놓고 소대가리를 삶았기 때문이다. 동네에는 때아닌 잔치가 벌어진 모양이었다. 우리 식구들은 퍼렇게 멍든 아버지 몸을 내려다보면서 잔뜩 움츠려 있었다. 소고기국밥을 먹는 아이들의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동네 어느 집 멀쩡하던 소가 죽는 일이 드물게 일어났다. 소가 죽으면 지서에 신고하고, 경찰이 입회한 가운데 죽은 소를 매장하는 것이 당시의 법이었다. 혹시 모를 감염에 대비한 위생법은 꽤 엄하게 지켜졌지만, 눈 감고 아웅 하는 식이 되곤 했다. 사람들은 앞동산 기슭에 구덩이를 파고 그 안으로 죽은 소를 밀어 넣었다. 경찰이 오자 죽은 소 등에 인분을 찔끔 뿌렸다. 그것은 아무도 먹을 수 없게 했다는 표식이었다. 이 장면을 지켜본 경찰은 서류에 동 반장의 도장을 받아 돌아갔다. 경찰이 채 산 아래로 내려가기도 전에 구덩이에 들었던 소를 다시 꺼내 하천에서 죽은 소의 배를 갈랐다. 그날은 영락없이 동사에서 잔치가 벌어지곤 했다. 우리 집 황소 대가리를 삶아 먹던 그 날 분위기는 죽은 소를 잡아 벌이던 동네잔치와 다를 바 없었다.

어느 정도 기운을 회복한 아버지는 당신을 살려 준 군인을 잊지 못해 했다. 그 군인에게 무엇으로라도 보답하고 싶어 했다. 아버지는 얼마간의 돈을 마련해 동장에게 주었다.

며칠 후, 동장이 아버지가 건네준 봉투를 다시 들고 왔다. 군인이 깜짝 놀라며 한사코 뿌리치더라고 했다. 오히려 괜한 사람을 잘못 알고 취조한 것이 죄송스럽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돈으로 몸보신할 약값에나 보태라며 미안해했다.

동장은 동네일 때문에 사흘에 한 번 쯤은 면사무소에 출입했다. 면사무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지서가 있어서, 아버지의 부탁은 별것 아닌 듯싶지만 그렇지 않았다. 아무리 지서 앞을 지나치며 경찰과 안면을 틔운 사이라 해도 지서에 들어간다는 것이 왠지 섬뜩하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경찰이 동장을 보는 순간 잊어도 될 사소한 일들을 캐묻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동민들의 동태파악을 동장을 통해서 했는데, 까딱 잘못 말했다가는 동민이 다칠 수 있었다. 동장은 지서에서 겉으로는 웃으면서 말하지만 늘 긴장했다.

동장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버지는 다시 한번 더 지서에 들러서 군인의 이름과 고향 집 주소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지서를 다녀온 동장이 말했다. 고향이 어딘지를 묻자, 군인은 겸연쩍게 웃었다고 한다. 이름은 알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주소는 전남 순천이라고만 했을 뿐 더는 알려주지 않았다. 결국, 오랫동안 아버지의 기억에는 경찰과 거칠게 다투던 전라도 말씨의 군인만 남고 말았다. 우리 형제 6남매 중 나와 여동생은 아직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었다.

세월이 흐르자 기억이 가물거렸다. 아버지는 아무리 해도 군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해 답답해했다. 얼굴이 희고 잘생긴 것도 같고 좋은 집안의 자손 같다는 느낌을 추가했다.

"조부가 큰 선비였다지 아마."

기억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특별하거나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잊히거나 묻혀서 무던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전라도 말씨를 쓰는 군인이 아버지에게 베푼 은혜는 잊힐 수 없었다. 시계 침이 일정한 시각을 가리킨 채 멈춰 선 것처럼 아버지의 기억은 그 옛날 생사의 갈림길에 섰던 장면에서 멈춰 있었다. 그러나 사라진 줄 알았던 그때의 공포가 되살아나 스멀거리며 아버지의 몸을 핥았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 아버지는 지독한 신경통에 시달렸다. 고문 후유증이었다. 골병든 핏덩어리가 온몸을 돌아다녔다. 그때 생긴 어혈이 풀어지지 못하고 시도 때도 없이 통증을 유발하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병이 빨갱이 사건의 고문과 관련이 있는 줄은 모르고 있었다. 그런 배경을 알 나이도 아니었다.

어머니는 무슨 무슨 약이 좋다고 하면 기어코 그 약을 구해왔다. 동네 사람들은 입소문으로 들은 약재를 어머니에게 귀띔해 주었다. 그 정보는 어머니가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처방전인 셈이었다. 어머니가 필사적으로 아버지의 병구완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면서, 어린 내 느낌으로도 아버지의 완쾌를 점쳤다. 그때의 어머니는 산처럼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그 기억 때문에 이후부터 어머니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백약이 무효였을 때, 누군가가 인분을 처방해보라고 어머니에게 일러주었다. 인분이 약이 되는 이유는 간단했다. 개가 골병들 정도로 타박상을 입어 다리를 절어도 곧바로 걸어 다니는 것은 개가 인분을 먹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말은 일리가 있었다. 별별 약을 다 써보았지만, 차도가 없었는데, 인분은 달랐다. 결국 아버지의 통증은 인분을 끓여 먹은 덕분에 완쾌되었지만,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아버지가 인분 먹기를 거부하는 일이 벌어졌다. 하도 많은 약을 먹었으나 효과가 없었던 탓도 있지만, 워낙 냄새가 지독해 아무리 약이라 해도 먹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화를 내면서 고함을 질렀다. 때로는 애써 달여온 인분 약 사발을 발로 차는 바람에 사발이 벽으로 날아갔다. 사발은 박살이 나고, 벽에는 난데없는 인분 벽화가 그려졌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달래느라 땀을 흘렸다. 어머니는 독한 인분을 마신 입가심으로 아버지의 입에 소금을 넣으면서 절로 한숨을 내쉬었다.

인분을 약재로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변소에서 퍼온 인분을 조그마한 항아리에 넣었다. 그 항아리를 물이 반쯤 찬 솥에 담가 불을 지폈다. 소위 중탕이란 방법으로 조제했는데, 온 집안에 구린내가 진동해서 식사 때가 되면 밥을 먹을 수 없었다. 벽이나 기둥에 냄새가 배어, 거기서 다시 악취가 뿜어져 나왔다. 집안은 마치 거대한 화장실 같았다.

아버지의 고문 후유증은 인분으로 치유되었지만, 전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악몽에 시달리는지 한밤중에도 악악 하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온 가족은 잠에서 깨어 어둠 속에서도 아버지 쪽을 바라보았다. 어서 빨리 새벽이 되어 아버지가 악몽에서 깨어나기를 빌 뿐이었다. 아버지의 악몽은 우리 가족 모두의 말 못 할 슬픔이 되어, 집안에 무거운 분위기를 드리웠다.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우리 집을 짓누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불면증에 시달리면서도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생각해두었던 계획에 착수했다. 그것은 사과 농사를 지어보는 것이었다. 벼 보리농사보다 수익이 월등했다. 가세를 떨치고 싶어 했던 아버지는 천수답에서 나는 곡식에 만족하지 않았다.

몇 안 되는 우리 집 전답이 모두 팔렸다. 그것을 밑천으로 산기슭 땅 이천여 평을 사들였다. 개간이 시작되었다. 온 가족이 달라붙어 나무를 베고 돌을 들어냈다. 딱딱한 청석이 생각보다 많았다. 아버지는 계획한 대로 사과나무를 심었다. 동네 사람들이 청석에 나무가 살겠냐며 쓴소리를 했지만, 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가뭄에 대비해야 했다. 과수원 안에 물웅덩이를 만들었으나, 바닥이 청석이라 고여 있어야 할 물이 죄다 새버렸다. 한 방울의 물도 가두어 둘 수가 없게 되었다. 황토를 져다 날라 웅덩이 바닥을 다졌으나 소용이 없었다. 아버지는 궁리 끝에 과수원에서 조금 떨어진 골짜기에 조그만 연못을 만들기로 했다. 산 주인에게 보리 쌀말을 주고 얕은 골짜기를 빌렸다.

아버지는 온 힘을 다해 못 둑을 쌓았다. 내가 중참을 가져갈 때마다 못 둑은 조금씩 솟아올랐다. 둑이라고 해봤자 높이 3미터 길이 20미터 남짓했다. 아버지 혼자로는 버거운 공사였으나, 과수 농사를 지으려면 도리가 없었다. 봄 한 철 지나자 겨우 연못이 완공되었다. 이제 가뭄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비가 오면 골짜기에 물이 흐를 것이고, 그 물은 고스란히 아버지가 만든 연못에 모여들 것이었다.

못을 완공한 그해, 우리 집 사과밭에는 처음으로 구슬만 한 사과가 열렸다. 열린 사과는 아버지를 연신 웃게 했다. 그러나 호사다마였던가. 몇 년 만에 처음이라는 가뭄이 시샘하듯 끼어들었다. 물기라고는 머금을 수 없는 청석이 한여름 태양 볕에 벌겋게 달았다. 가뭄을 견디지 못하면, 사과가 주르르 흘러버릴 판이었다. 이를 대비해 못을 만들었지 않았나. 걱정할 일이 하나도 없었다.

기대에 찬 아버지는 연못의 물을 빼서 과수원으로 난 도랑으로 흘려보냈다. 그러나 도랑도 청석인지라 물이 과수원까지 오는 사이에 땅속으로 다 스며들었다. 염소 오줌만 한 물이 겨우 과수원 근처까지 오는가 싶더니 그나마 멈추고 말았다. 과수나무까지 가려면 연못 물이 한참을 더 흘러야 했다.

"허어…!"

아버지는 청석 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렇게 급히 물이 청석 속으로 스며들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문제는 더는 물을 구할 데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물이 없으면 과수 농사는 헛일이 되고 만다. 어찌하든 청석 밭에 물을 대야 했다. 충혈된 아버지의 눈은 과수원 아래로 흐르는 못 도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가물어도 못 도랑에는 못물이 넘실대며 잘도 흘렀다. 물 흘러가는 소리가 아버지의 타들어 가는 가슴을 단숨에 적셨다.

담배 한 개비를 다 태운 아버지는 천천히 일어서더니, 빈 물지게를 지고 못 도랑으로 내려갔다. 도랑물을 물동이에 퍼 담아 물지게로 져 나르기 시작했다. 나는 바가지에 물을 담아 꼬리처럼 아버지 뒤를 따랐다. 비탈길을 올라가느라 발이 미끄러지면, 내 바가지의 물은 반쯤 흘러버렸다. 아버지의 물지게도 비틀거렸다. 그때마다 물동이의 물이 조금씩 밖으로 넘쳐흘렀다. 아버지는 물이 흐르지 않도록 양쪽 물동이 고리를 손으로 움켜쥐며 무진 애를 썼다. 아버지의 목에는 시퍼렇고 굵은 정맥이 일제히 팽창했다.

힘겹게 지고 온 물을 사과나무 밑둥치에 붓자, 청석 사이로 슉슉 소리를 내며 스며들었다. 청석은 세수한 것처럼 촉촉하게 젖었다가 이내 까맣게 반짝거리며 빛났다. 아직 목이 타니 더 물을 부어달라는 듯 아버지와 나를 빤히 올려보았다. 분발을 촉구하는 목마름은 아버지의 의욕을 불태웠다. 넘치도록 부어주마. 걱정하지 마라.

도랑물은 큰 못에서 흘러나오는 물이었다. 그 도랑물은 온 들에 있는 수백 마지기의 논에 공급되는 금싸라기 같은 물이었는데, 오직 논에만 사용할 수 있었다. 과수원은 논이 아니니, 당연히 못물을 사용할 수 없었다. 아버지와 나는 퍼서는 안 되는 물을 퍼 나르고 있는 셈이었다.

나는 이제 그만하고 집에 가자고 졸랐다. 아버지는 조금만 더 하자고 했다. 이렇게라도 해서 사과나무가 이 가뭄을 넘기면, 가을에 거두는 사과는 굵고 실할 것이라며 나를 다독였다. 나는 아버지에게 다가오는 불안한 기운을 감지했다. 그것이 두려워 간이 콩알만 했는데, 아버지는 가을 수확 때를 그려보느라 기분이 들떴다.

넓은 들에는 다행히도 논 주인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도랑물을 퍼가는 아버지와 나를 봤다면 가만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마치 아버지와 내가 못 도랑물을 퍼가도록 자리를 비켜준 것만 같은 한낮이었다. 그러나 요행은 잠시뿐이었다. 곧바로 못 물을 감시하는 못 도감의 눈에 띄고 말았다. 들의 논 전체를 손금 들여다보듯 하던 못 도감은 넘어질 것처럼 달려와 물지게 지고 가는 아버지 앞을 가로막았다. 벌건 대낮에 이 무슨 짓이냐며 아버지를 향해 호통쳤다.

못 도감은 못물을 관리하는 대가로 얼마의 곡수를 논 주인들로부터 받았다. 그 수입으로 가족을 먹여 살렸다. 그가 물 관리를 소홀히 하면, 도감 자리는 즉시 다른 사람에게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리를 유지하려면 죽을힘을 다해 못물을 감시해야 했다.

논 주인들도 눈에 불을 켜고 못물이 제대로 흘러가는지를 지켜보았다. 비록 들에서 일하지 않아도, 누가 어디서 논 물꼬를 헐고 막는지 훤히 알았다. 들에는 논 주인들의 촉수가 그물망처럼 처져 있는 곳이었다. 가끔 친한 이웃 간에도 물꼬 싸움이 벌어졌다. 그럴 때마다 도감이 나서서 무마했다. 가뭄 끝의 못물은 종자 씨만큼 소중했으니, 아버지는 이마가 코에 닿을 정도로 도감에게 빌어야 마땅했다.

아버지가 당연히 그렇게 할 줄 알았지만, 전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도감을 노려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버지의 태도에 더욱 화가 난 도감은 살포를 쭉 뻗어 살포 날을 아버지의 가슴팍으로 들이밀었다.

"대체 무슨 짓이야, 이 사람아!"

아버지는 물동이를 길바닥에 던지듯 내려놓고 물동이에서 물지게 고리를 뺐다. 빈 물지게가 아버지의 손에 잡혔다. 살포가 아버지의 얼굴을 향해 삿대질하듯 다시 날아들었다. 아버지는 잡은 물지게로 단번에 살포를 내려쳤다.

"빌어먹을... 그만하지 못해!"

아버지의 고함과 동시에 살포가 물지게에 부딪혀 툭 부러졌다. 도감의 기다란 살포는 단순히 물꼬를 트고 막는 연장이 아니다. 들판에서 일어나는 허다한 물꼬 시비를 단 한 번에 잠재우던 권위의 상징이다. 그 살포가 부러졌다는 것은 도감의 체면을 여지없이 짓밟아버리는 것이었다. 도감은 화가 머리 끝까지 올랐다.

"이 빨갱이 새끼가...!"

"뭐시라? 이놈아!"

빨갱이 말이 도감의 입에서 나오자, 아버지는 순간적으로 얼굴색이 하얘졌다. 곧바로 도감의 멱살을 잡았다. 도감도 지지 않았다. 못 도랑물을 지키는 것이 도감에게는 생사가 달린 문제였다.

도감과 맞서는 것은 애초부터 얼토당토않은 일이었다. 밀물처럼 밀어닥칠 사람들의 비난을 어찌 감당할 것인가. 아버지가 이 뻔한 상황을 모를 리가 없었지만, 도감과 엉겨 붙었다. 아버지와 논두렁 아래로 같이 구르면서도 주먹다짐은 계속되었다. 온 들이 쩡쩡 울리며 벌어진 대판 싸움은 점입가경이었다. 아버지의 얼굴에 퍼런 멍이 들었다. 도감의 웃옷도 찢어지고, 코에서 피가 났다. 해 질 녘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석양이 싸움판에 붉은 노을을 토하고 있었다. 구멍이 숭숭 나 있는 아버지의 셔츠가 불그스레했다. 도감이 입고 있는 옷도 붉게 물들었다. 석양을 등에 업고 숭고한 의식을 치르기라도 하는 듯한 도감과 아버지였다.

나는 오랫동안 아버지와 함께 못 도랑물 퍼 날랐던 일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특별한 계기도 없이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도감을 향한 아버지의 저항은 잘잘못을 따질 일이 아니었다. 그 저항은 굶주림이라는 공포에 직면한 아버지의 무의식적인 행동일 뿐이었다. 거기다 빨갱이라는 말이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고 말았다.

빨갱이라는 말은 아버지를 극한의 두려움 속으로 몰아넣는 말이었다. 그 말속에는 몸서리쳐지는 아버지만의 아픔이 간직되어 있었다. 그것은 처절한 공포이기도 했고, 원망과 배신이 얽히고 얽힌 응어리였다. 그 응어리가 가슴 속에서 조용히 녹아내리기를 아버지는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아버지의 아픔은 당신 스스로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전우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반사적으로 적을 향해 앞으로 튀어 나가는 병사에게는 오직 적개심밖에 없다. 생명이 위협을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미처 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이다. 거기에 이성을 대입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때의 아버지도 이와 같았다.

빨갱이라는 말에 대한 거부감은 아버지만의 것은 아니었다. 큰형은 머리를 박박 깎더니 몇 달을 과수원 농막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경찰 시험에 응시했다. 아버지가 지서에 드나들며 받았을 참담한 고통을 잊지 못해, 경찰에 몸담기로 마음먹었다. 평소 말이 적은 큰형은 작은형까지도 경찰이 되도록 했다. 큰형은 모든 것을 미루어 짐작하면서 아버지가 겪었던 온갖 것을 몸으로 알아내고 싶어 했다. 밤중에 고함치는 아버지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마음 깊이 이해한 사람은 큰형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집안에 공무원이 둘이나 있다며 부러워했지만, 정작 우리 가족의 깊숙한 아픔은 아무도 몰랐다.

세월이 흘렀다. 아버지를 고발한 바보 노총각은 미워할 수 없었다. 김 씨 박 씨와도 허물없이 지냈다. 용서를 구하고 용서한 절차가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물이 흘러가듯 저절로 이루어진 관계회복이었다. 농촌 삶 자체가 그랬다. 농기구를 빌리고 빌려주는 일은 부지기수였다. 황소를 빌려 부린 값으로 한나절 품을 들기도 했다. 숨 막히도록 바쁜 농사일은 품앗이로 해결했다. 삶이 이러니 설령 억하심정이 생겼다 하더라도 그것이 며칠이나 갈까.

아버지가 밭에서 일하면 김 씨 박 씨는 오가는 길에 아버지에게 말을 건넸다. 탱자나무를 사이에 두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말을 섞었다. 농사일이 주된 화제였으나, 장 보러 갔다가 겪은 황당한 이야기나, 잡다하게 일어나는 사건들에 관한 것도 있었다. 면의원까지 지낸 박 씨는 면사무소 출입하면서 술집 기생들과 놀았던 이야기로 아버지를 웃게 만들곤 했다.

이른 봄, 병원 정문에서였다. 야산을 깎아 지었던 것인지, 병원은 높다란 계단 위에 있었다. 병색이 완연한 아버지가 걸어서 오르기가 쉽지 않을 듯했다. 큰형이 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더니, 아버지를 업었다. 그리고 바닥에 손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지겟작대기를 땅에 짚고 일어서는 것처럼 가둥거렸지만, 진중한 몸짓이었다. 종잇장처럼 가벼워진 아버지인데도 용을 쓰느라 큰형의 얼굴이 석류알처럼 붉었다. 아버지가 큰형의 지게에 얹혀 있는 것만 같았다.

큰형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쭉정이같이 푹 패인 큰형의 얼굴에서 나는 순식간에 내 어린 시절 오리나무를 지고 가는 아버지 모습을 상상했다. 무슨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수십 년도 더 지난 상황이 한순간에 떠올랐다. 나는 그때 오리나무를 지게에 지고 가던 아버지의 어깻죽지에 몰려있음 직한 더운 땀 냄새까지 맡았다.

나는 두 달 넘게 입원하고 있는 아버지를 곁에서 간호했다. 아버지는 수혈한 만큼 입으로 벌건 피를 쏟았다. 수혈한 피가 몸에 거부반응을 일으키며 입으로 분수처럼 퍼져 나왔다. 피 묻은 아버지의 환자복은 지서에서 고문받을 때 아버지 옷을 연상하게 할 정도로 얼룩졌다. 아버지는 나 몰래 몸서리치는 고문 틀에 묶이는 상상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이 되면 아버지는 두려운지 몸을 떨었다. 눈을 천장으로 향한 채 뭔가를 손으로 가리키며 잡으려고 애썼다. 평생 하소연하고 싶어도 차마 하지 못했던 그 무엇을 말하려 하는 것이었을까.

아버지의 오르막 내리막 숨소리는 나의 호흡을 접었다 폈다 했다. 갓 태어난 아기처럼 가늘게 숨 쉬는 아버지의 몸에서 나갔던 온기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힘들게 돌아온 온기는 조금씩 식었다. 모든 것은 예정된 듯했다. 병실의 밤을 지배하는 끝 모를 고요는 생사를 암시하듯 엄숙했다. 아버지의 시선은 허공에 박혀 있었고, 나는 아버지의 굴곡진 생애를 어루만졌다.

아버지는 결국 그 병원 문을 나서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나는 아버지의 사인을 고문 후유증이라고 생각했지만, 담당 의사는 백혈병의 일종이라고 말해주었다.

아버지의 과거는 마디마디 가시였다. 아버지 스스로 그것을 치유하려 했다면 그것은 아물어 붙은 상처를 또다시 헤집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 없었던 듯 지내면서 과거를 흙 속에 파묻은 채 살고 싶었다. 아버지의 소박한 희망이었지만, 뜻대로 되는 일은 아니었다. 몸에 똬리를 틀고 있는 속 깊은 상처가 부지불식간에 아버지에게 그날을 떠올리게 했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 이따금 짓는 긴 한숨에는 지난날의 한이 배어 있었다. 어떨 때는 그 한이 희석되어 없는 듯했다.

70년대 초반 무렵이었다. 우리 집 흑백 TV에서는 연일 데모하는 대학생들 모습이 방영되었다. 3선 개헌에 이은 유신반대 데모였다. 아버지는 내게 대학생들이 데모하는 이유를 물었다. 이렇게 살기 좋은 세상에 뭣 때문에 저렇게 거리로 몰려나오냐는 것이었다.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자유가 억압되고 있음을 말했다. 듣고 있던 아버지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던지 한마디로 요약했다.

"옛날에는 쌀 한 말 팔아 비료 한 포대 샀다. 지금은 쌀 한 말 팔면 비료 열 포대 산다."

나는 아버지를 이해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시의 시국관을 놓고 아버지와 끊임없이 충돌했다. 데모하는 대학생들의 안타까운 마음을 이해시키고 싶었다. 권력으로부터의 이유 없는 억압에 대한 저항. 그것은 아버지가 언젠가 한번 외쳐보고 싶은 행동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데모하는 대학생들의 울분은 바로 아버지의 가슴에 여전히 끓고 있는 울분과 같은 것이 아닌가. 데모 행렬에 당신 자신도 모르게 동화되어야 하는데, 아버지는 오히려 데모대를 못마땅해했다.

그때였다. 포항 경찰서에서 근무하던 작은형이 서울 데모 막으러 동원되어 갔는데, 데모대를 저지하다가 가슴을 다쳐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사건은 아버지가 데모대를 더욱 싫어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에게도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면박을 주는 근거가 되었다.

아버지는 사상이 뭔지, 민주주의가 뭔지를 몰랐다. 그것은 알 필요조차 없는 것이었다. 농사 잘 짓는 일 외에 다른 바람이 없었다. 바람대로 술술 남들처럼만 풀렸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버지는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걸어갔다는 생각이 든다. 청석에서 자라는 사과나무처럼 고생만 뼈 빠지게 했다. 그것이 그대로 아버지의 일생이 되고 말았다. 단 한 번의 행복한 순간이라도 있었을까. 사소한 돌부리에라도 걸리면, 기어이 피를 흘렸다.

마을 사람 중 몇몇은 지금까지도 아버지가 산사람 협조자쯤으로 여기고 있다. 산사람에게 쌀말과 황소를 잃었고, 지서에서 터무니없는 고문까지 당했건만, 아버지의 몸에는 빨갱이라는 주홍글씨가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었다. 아버지가 좌익이었다면 경찰이 된 큰형과 작은형은 우익이었을까. 어쩌면 왼팔은 좌익이고 오른팔은 우익이었을지도.

지금 형제 두 분은 고인이 되어, 내가 알고 싶었던 많은 것들이 묻혀버렸다. 이처럼 내가 없다면 아버지와 형제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들도 마침내 묻힐 것이다. 그 빈 곳에 맑은 태양이 빛나고 온갖 새 노래하리라. 세월은 중립을 지키며 흘러가고, 자연은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구분이 없는 세상을 펼쳐 보일 것이다. 자연의 이치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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