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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가슴에 남겨둔 한 해, 1978년/조이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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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섭 씨 조이섭 씨

 들어가는 말

이 이야기는 우리나라 근‧현대 번영의 빛에 가려진 가난한 그림자들의 서러운 일렁거림이다. 경제 개발 회오리의 그늘진 곳에서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더 오래 울었던 풀뿌리※1들의 한 단면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체험적 고백이다.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1978년은 산업화 길목에 놓여 있었다. 중국의 개방과 제2차 석유 파동이 예고되는 등 경제적인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있었으나 정부의 가림막 역할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기업을 받쳐주어야 할 금융기관마저 경기가 좋을 때는 기업에 돈을 마구잡이로 퍼주다가 불황의 기미가 보이면 돈줄을 죄어버리는 횡포를 서슴지 않았다. 경영자는 노동자를 기계 부속품처럼 취급하며 실적과 외형 부풀리기에 바빴다. 그런 틈바구니에서 웅크리고 앉아 떨고 있는 우리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자욱한 먼지를 낱낱이 드러내는 형광 등불 아래서 휴일도 없이 주야로 일했던 우리의 이야기, 지울 수가 없어 가슴에 남겨 두었던 기억의 책갈피를 들춰보기로 했다. 한 편으로는 활자화되어 남을 수 있다는 생각에 어깨가 움츠러들기도 했다. 문학적 상상을 핑계 삼아 미화하고 싶은 유혹을 억눌렀다.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이야기도 가능한 한 사실에 입각해서 쓰려고 노력했다.

1. 새옹지마(塞翁之馬)

조바심을 내며 지새우던 하루하루였다. 누님 댁에 얹혀살면서 취직 준비를 하였으나 마땅한 채용공고가 눈에 띄지 않았다. 누님은 당시 대구 근교 W 공단에서 담배포가 딸린 구멍가게를 하고 있었다. 가게 앞에 있는 공장의 본사에서 사무직과 관리직 직원을 뽑는다고 응시해보라고 권했다. 마침 염색 분야의 연구원도 뽑았다. 내심 중화학 관련 대기업 입사를 꿈꾸고 있었던 터라 썩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막내아들 취업 소식을 눈 빠지게 기다리고 계실 시골의 부모님 생각을 하면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필기시험 없이 바로 면접을 보았다. 부사장과 이사 몇 분이 직접 면접을 했다. 내 차례가 되었다. 특기가 있느냐는 묻는 말에 기타를 연주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자 면접관끼리 귓속말을 주고받더니 나가 보라고 했다. 정작 전공인 화학이나 응시 분야인 염색에 대한 질문은 꺼내지도 않았다.

며칠 후, 합격 통보가 왔다. 회계 분야와 공장의 주임급 이상 인원이 많았고 염색 분야 합격자는 나 혼자였다. 일주일간의 오리엔테이션이 끝난 다음 날, 근무지를 발표했다.

"조 선생은 오늘부터 이현 공장에 발령을 내겠습니다."

아니, '조이섭'이 아니고 갑자기 웬 '조 선생?' 난데없이 바뀐 호칭이 귀에 낯설었다. 이현 공장은 생산설비가 전혀 없는, 마감도 채 끝내지 않은 건물만 덜렁한 껍데기뿐인 곳이었다. 그곳에 생산설비가 들어올 때까지 직수양성소를 운영할 계획인데 나더러 책임을 맡아 달라고 했다.

"우선 집에 가서 며칠 지낼 옷이랑 세면도구를 챙겨서 네 시까지 오세요."

총무이사는 멍하니 눈만 끔벅이고 앉아 있는 나에게 한 마디 덧붙였다.

"참, 기타는 꼭 가지고 오세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면접관들이 내 특기가 기타연주라는 말을 듣고 귓속말을 할 때부터 양성소에 보낼 속셈으로 뽑은 것이 틀림없었다.

"저는 염색부에 지원했는데요?"

"염색부 발령은 양성 교육을 끝내 놓고 다시 생각해 봅시다. 자, 자. 여기서 자세히 말할 시간이 없으니 일단 짐을 챙겨 오도록 합시다. 서두르세요."

황당하기는 했지만, 기왕 이렇게 된 김에 한번 부딪혀보자는 생각으로 가방 하나와 기타 한 대 달랑 들고 회사에 돌아오니 승용차가 정문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현 공장 강의실에는 열대여섯 살 되어 보이는 앳된 소녀부터 마흔이 넘어 보이는 아주머니까지 서른 명 남짓한 교육생이 빼곡히 앉아 있었다. 강의실이라는 것도 공장이 완공되면 사무실로 쓸 공간에 임시로 탁자 몇 개 갖다 놓은 것뿐이었다.

총무과 직원이 나를 여러분들의 선생님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교육생 명단이 적힌 종이 한 장을 건네주더니 휑하니 나가 버렸다. 끝이 어딘지도 모를 깜깜한 동굴에 혼자 내쳐진 것 같았다. 당장 7시로 예정된 개소식까지 무엇을 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나는 교탁도 없이 이동식 흑판 하나만 덩그렇게 놓여 있는 강의실 앞에 섰다. 수십여 개의 눈동자가 신기한 듯 내 몸을 이리 훑고 저리 훑었다. 목소리가 파르르 떨려 나왔다.

"저는 오늘 처음으로 발령을 받은 신입직원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릅니다. 여러분과 나는 똑같은 처지입니다. 아니, 여러분 중에는 베 짜는 것을 본 적은 있을 터이니 저보다 낫네요."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옆 사람과 수군거리기도 했다. 나는 눈에 힘을 주어 외쳤다. 그것은 교육생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나를 향한 외침이었고 다짐이었다.

"저는 여러분을 훌륭한 직수로 만들어야 하는 선생입니다. 어떤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여러분을 반드시 훌륭한 직수로 만들어 수료시키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저를 믿고 따라오겠습니까?"

교육생들은 내 목소리에 절실함이 묻어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예!" 하고 우렁차게 대답했다. 술렁이던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자 자기소개를 시켰다. 직물공장이 처음인 교육생보다 직물을 짜기 전 준비단계 일이나 허드렛일을 하다가 온 사람들이 더 많았다. 현장에서 제직기술을 배우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고 했다. 그러던 차에 이곳에서 먹여주고 베 짜는 기술도 가르쳐 준다는 말을 듣고 호기심 반, 절실함 반으로 찾아왔다고 했다.

기타를 꺼냈다. 7시로 예정된 개소식 전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것밖에 없으니 어쩌랴. 그 당시 유행하던 장은아 씨의 '이 거리를 생각하세요'를 불렀다. 왜 이 노래를 불렀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아마도 「지울 수가 없었던 우리들의 모습을 가슴에 남겨둔 까닭이겠죠.」라는 가사처럼 나중에 우리들의 지금 이 모습이 무의미하지 않기를 바라서였을 것이다.

7시가 되자 본사에서 관계자들이 도착했다. 곧바로 개강식이 시작되었다. 교육 기간 3주 동안의 교육일정표와 양성소에서의 생활 수칙이 적혀 있는 인쇄물을 교육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여러분은 3주 동안 여기 있는 선생님 말을 잘 들으면 직수가 될 수 있습니다. 직수가 되면 우리 회사 직원으로 바로 채용이 되고……."

총무이사의 양성소 소개에 이어 회사 자랑이 지루하게 계속되었지만, 나는 교육일정표에 시선이 꽂혀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달랑 메모 한 장으로 어떻게 직수를 양성하라는 것인지 어이가 없었다. 게다가 하루 기숙사에서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16시간의 일정표는 거의 신병 훈련소 수준이었다. 요즘 같으면, 씨알도 먹히지 않을 '하면 된다'라는 사고가 어떠한 합리적인 반대보다 우선적인 가치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른 시일 내에 성과를 내기 위한 의욕이 앞서 무리하게 짠 일정표는 그렇다 치더라도 오전, 오후의 교육 시간을 무엇으로 채우느냐가 문제였다. 요즘 시쳇말로 콘텐츠가 없었다. 내일 아침부터 교부(현장의 직수들을 도와주거나 관리하는 업무를 보는 사람)를 한 사람 보내주겠다는 말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대학에서 배운 전공을 살려 보려고 염색연구직에 지원했더니, 교육생 뒷바라지나 하는 사감 역할이라니.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서 있을 줄 꿈엔들 생각했으랴. 세상일 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는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인생은 열차가 레일 위를 달리듯 딱히 정해진 것이 아니지 않은가. 어차피 행복이 보장된 길은 어디에도 없다고 마음을 다잡고 보니 오늘의 이 뜻밖의 사태가 오히려 설레기도 했다.

2. 연목구어(緣木求魚)

새벽에 눈을 뜨니 낯선 방이었다. 동살이 희붐하게 밝아 왔다. 어제 하루가 꼭 꿈만 같았다. 어쨌든 교육 첫날인 오늘을 잘 넘기는 것이 당면과제였다. 국민체조로 양성소의 첫날을 시작했다. 교육 시간에 맞춰 교부가 왔다. 호칭을 이 선생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엉겁결에 불려온 이 선생도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기는 나랑 마찬가지였다. 그곳에서는 조 선생 말만 들으면 된다고 하더란다.

이 선생에게 처음 베 짰을 때의 경험을 이야기해달라고 부탁했다. 이 선생은 조금 망설이다가, 가난 때문에 중학교를 중퇴하고 곧바로 양성공으로 들어가 교부가 될 때까지 겪었던 고생담을 털어놓았다. 잠시 후 강의실 구석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교부와 교육생 가릴 것 없이 엉엉 소리 내어 우는 바람에 삽시간에 울음바다가 되어버렸다.

조금 있으니, 본사에서 기사 한 분이 강사로 왔다. 첫 시간에는 직기의 기계적 특성과 각 부품의 명칭과 역할을 가르쳤다. 다음 시간에는 제직의 단계를 설명했다. 교재라고는 A4 용지 두어 장에 요약한 것이 전부였다. 나도 교육생 곁에 앉아서 부지런히 메모하고 공부했다.

오후에는 교육생의 눈높이에 맞춰 오전에 배운 내용을 하나하나 복습했다. 내가 제대로 설명을 못하는 부분은 이 선생이 현장의 상황에 맞게 보완해 주었다. 이론 강의가 지겨울 때쯤, 이 선생이 나비매듭 묶는 요령을 가르쳤다.

나비매듭이란 실의 양쪽에 고를 내어 나비 모양으로 맺은 매듭을 말하는데, 제직할 때 실이 끊어지면 나비매듭으로 이어야 잘 풀리지 않는다. 매듭을 짓고 남은 실밥을 손 가위로 짧게 잘라주면 이은 흔적이 거의 나지 않기 때문에 직수가 반드시 익혀야 하는 가장 기본적이면서 중요한 기능이었다.

이 선생이 나비매듭 시범을 보였다. 양손의 엄지와 검지를 이용하여 매듭을 짓고, 쥐고 있던 손 가위로 실밥을 자르는 과정을 일 분 동안에 서른 번이나 했다. 나비매듭을 이은 자취도 깔끔했다. 교육생들은 이 선생의 재바른 솜씨를 보는 내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시계를 앞에 가져다 놓고 나비매듭을 묶고, 실밥을 짧게 자르기를 반복했다. 처음에는 일 분 동안 대여섯 개를 겨우 잇더니 차츰 스무 개를 넘기는 교육생이 나오기 시작했다.

저녁 교육 시간에도 오전에 배운 이론을 복습하고 나비매듭 묶는 연습을 반복했다. 이 선생이 종이쪽지를 내밀었다. 교육생 방 모기장 설치, 식당 보조원 충원, 종이와 연필 등 필기구 지급, 침구 안 가지고 온 교육생 3명에 대해 조치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기숙사 사감이 할 일이 가득 적힌 종이를 받아들고 피식 웃고 말았다.

이 선생이 돌아간 후, 어린 교육생 서너 명이 강의실에 들어와 노래를 부르자고 했다. 창문으로 새어 나오는 노랫소리를 듣고 기숙사에 있던 교육생들이 하나둘 강의실에 나와 함께 노래를 불렀다.

이튿날부터 첫날과 같은 일과가 반복되었다. 일주일이 금방 지나갔다. 토요일 저녁에 외박 나갔던 교육생 두 명이 돌아오지 않았다. 연락처로 전화했으나 받지도 않았다. 어수선한 강의실 분위기를 추스를 필요가 있었다.

"다른 공장에서 머리 쥐어 박혀가며 일 년을 눈치코치를 보며 따라다녀도 직수가 될까 말까 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밥 먹여주고, 교육비까지 줄 때 야무지게 배워 제대로 직수 대접받는 것이 훨씬 낫지 않나요? 갈 사람은 가고 있을 사람은 열심히 합시다."

교육생 모두 내 말에 수긍하는 눈치였다.

현장에서 필요한 기능 위주로 교육하기 위해 빈 공장에 직기 여덟 대를 조립해 설치했다. 직물 공장과 같은 형태로 배치해 놓고 보니 그만해도 공장 분위기가 풍겼다. 강의실에만 있던 교육생들의 얼굴에 의욕이 넘쳤다.

"여기서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직기로 실습하지만, 공장 안에서는 절대로 뛰지 마세요. 의욕만 앞서서 천지 모르고 서두르다가는 다치기에 십상입니다. 돈 벌러 나왔다가 예쁜 얼굴에 흉터가 남거나 불구라도 되면 어쩔 겁니까."

안전에 대한 주의를 전달한 다음, 스위치 켜는 법과 직기의 어느 곳에서 실이 끊어지면 재빨리 단단하게 잇는 실습을 시작했다. 가장 어리고 키가 작은 A는 직기 앞에서 팔을 양껏 늘려도 씨줄을 꿴 종광까지 팔이 닿지 않았다. 당황한 A가 어찌하는지 가만히 지켜보았다. A는 한쪽 발을 들고 몸통을 한껏 비틀어 끊어진 실 가닥을 겨우 잡아 나비매듭을 이었다. 또래 아이들이 교복 입고 학교에서 공부할 시간에 채 자라지도 않은 키를 깨금발로 늘리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져 고개를 돌려 버렸다.

8자 형 보행 연습도 했다. 현장에서는 직기 사이사이를 걸어 다니며 크고 작은 사고를 미리 방지하거나 상태를 점검해야 한다. 이때 직기 사이를 8자 모양(∞)처럼 걷는 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저녁부터 강의실에서 카드 교육을 시작했다. 회사의 주력상품인 깅감은 면 65%, 폴리에스터 35%의 성분인 실로 만든 옷감을 통칭한다. 깅감(gingham)은 주로 난방 감으로 쓰였는데, 체크무늬가 많고 가끔 줄무늬도 있다.

체크무늬를 만들려면 씨줄은 미리 감아놓은 빔(Beam)을 이용하고, 날줄은 북을 이용한다. 색깔별로 4개의 실꾸리가 들어있는 북 집에서 북이 무늬에 맞게 순서대로 나오도록 카드를 맞추어야 한다. 카드는 손가락 하나 크기의 얇은 철판인데 OMR카드처럼 구멍이 뚫려 있다. 카드를 잘못 맞추면 엉뚱한 무늬가 된다. 그래서 카드 맞추기는 나비매듭과 더불어 직수가 반드시 알아야 할 기능 중의 하나이다.

본사에서 가져온 견본 원단의 색깔과 무늬에 맞게 카드를 설계하는 일은 교육생에게는 생소하고도 어려운 과제였다. 나이가 많은 아주머니는 이해가 잘되지 않자, 실습 도중에 몇 번이나 밖으로 나가서 깊은 한숨을 토해내곤 했다. 이 선생과 나는 처음이 어렵지, 이해만 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끊임없이 격려하면서 함께 연습했다.

다음날, 텅 빈 공장 가운데 직기를 두고 열심히 실습하고 있었다. 그때, 구레나룻 자국이 검슬검슬하고 덩치가 건장한 남자가 공장 안으로 뛰어 들어와 다짜고짜 고함을 질렀다.

"여기서 뭐하고 있노? 모두 모여, 모여."

모두 어이가 없어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 선생이 깜짝 놀라 그 사람 앞으로 가서 깍듯이 인사했다.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신입사원 O/T 때 사장님이 외국에 출장 갔다더니 돌아온 모양이었다. 사장은 교육생을 향해 8자 걸음을 아느냐고 물었다. 알고 있다고 대답하니, 지휘봉으로 손바닥을 탁탁 내리치며 소리가 작다고 소리쳤다. 교육생들은 주눅이 잔뜩 든 채로 큰 소리로 "예"하고 대답했다.

"자, 모두 한 줄로 서서 내 뒤를 따라와."

사장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직기 사이로 8자를 그리며 돌기 시작했다. 교육생들이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마치 한 무리의 병아리가 어미 닭을 따라가는 꼴이었다. 그런데 걷는 속도가 거의 구보 수준이었다. 병아리들은 숨이 가빠 헐떡거렸지만, 사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뛰었다. 한참을 그렇게 뛰다가 사장이 구보를 멈추고 교육장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며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교육생들이 교육장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사장이 곧바로 구령을 붙였다.

"자, 나비매듭 준비!"

"시작!"

교육생들은 일제히 나비매듭을 매고, 가위로 자르고, 다시 매고 자르고를 반복했다. 교육장 안은 사각사각 가위소리만 날 뿐, 마치 절간 같은 고요가 감돌았다. 시계를 보고 있던 사장이 "그만" 하고 외쳤다. 교육생들이 맨 매듭을 하나하나 확인해보더니 "다시 준비", "시작", "그만"을 몇 번이나 외쳤다. 교육생 대부분이 나비매듭을 일 분에 서른 개 이상 깔끔하게 매는 것을 본 사장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는 사장이 원단 하나를 꺼내더니 이 무늬를 짤 수 있게 카드를 설계하라고 했다. 사장은 테이블 주위를 돌면서 "빨리, 빨리"를 주문 외우듯 했다. 교육생들은 예의 그 지휘봉으로 손바닥을 딱딱 치는 공포 분위기 속에서도 다 했다고 손을 번쩍번쩍 들었다. 사장은 알 듯 모를 듯 미소를 짓는가 싶더니, 이렇다 저렇다 말 한마디 없이 쌩하고 타이탄 트럭에 올라타고 공장을 빠져나갔다.

그날 저녁에 예고도 없이 총무이사가 방문했다. 얼굴색이 좋지 않았다. 사장이 낮에 불러서 갔더니 현장에 투입해도 될 교육생들을 거기에 오래 붙잡아 두지 말고, 당장 내일부터 공장으로 배치하도록 지시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직 그럴 단계가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총무이사는 막무가내였다. 사장의 명령이 떨어졌으니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어쨌든 내일부터 야생의 정글인 현장으로 가서 실습해야 한다. 이런저런 걱정에 빠진 나에게 이 선생은 제자들을 믿으라고 했다. 교육생들이 잘 해낼 거라고 안심시켰다.

3. 천방지축(天方地軸)

실습을 나가기로 한 1공장에서 통근버스를 보내왔다. 공장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렸다. 공장장이 기다리고 있다가 교육생들을 불러 모았다. 오늘은 직기든 무엇이든 절대 손대지 말고 눈으로 구경만 하라고 했다.

이 선생과 함께 공장 안에 들어가 교육생을 한 사람씩 손을 이끌고 직수와 앞앞이 짝을 지어 주었다. 이 선생이 실무를 지도하는 동안, 나는 직수에게 잘 부탁한다며 고개 숙여 인사한 다음 사무실로 가서 남은 교육 일정을 점검했다. 교육생들을 공장 안으로 들여보낸 지 한 시간 남짓 지났을까. 이곳에 근무하는 직수 한 명이 울면서 사무실로 뛰어 들어왔다.

"공장장님, 양성공이 북을 끼워서 실을 이백 개나 넘게 끊어 먹었어요."

쏜살같이 말을 내뱉자마자 쪼그리고 앉아 펑펑 우는 것이 아닌가. 바로 뒤따라 이 선생이 들어왔다.

"OO야 실 끊어진 것 내가 다 이어 줄게. 어서 들어가자. 네가 양성할 때 생각해야지." 하면서 어르고 달래서 데리고 나갔다. 이 선생이 이 공장에서 일했던 교부였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큰 소동이 일어날 판이었다. 이 선생의 텃밭인 1공장에서 일주일 정도 실습을 하려고 계획했으나 교육생들이 일으키는 크고 작은 사고 때문에 사흘 만에 쫓겨나고 말았다.

양성공들이 현장에서 크고 작은 사고를 많이 친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다른 공장에도 퍼져 버렸다. 마땅히 실습하러 갈 만한 공장이 없었다. 본사에서 교육생을 받으라고 지시를 내려도 납기 문제를 들이대며 거절하는 데야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하는 수 없이 공장마다 서너 명씩 조를 짜서 나누어 보내기로 하여 겨우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교육생들을 시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공장에 데려다주고, 데려 오는 것이 문제였다. 말썽만 부리는 양성공을 데려가기 위해 일부러 통근버스를 내어 주는 공장이 없었다. 본사도 차량 사정이 어려운지, 원사나 제품을 싣고 다니는 타이탄 한 대를 보내주었다.

짐칸에 녹색 비닐을 덮어씌운 트럭에 교육생들을 태웠다. 사람이 짐칸에 타는 것은 도로교통법 위반 인지라, 들키지 않으려고 밖에서 볼 수 없도록 조그만 틈도 없이 천막을 쳐 놓았다. 이미 6월 초순이라 짐칸 안은 찜통같이 더웠다. 짐칸에 제대로 잡을 손잡이가 있을 리 없었다. 교육생들은 오가는 내내 가장자리에 기대앉아 두 팔로 서로를 껴안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 모습이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저녁이 되면, 교육생들은 다시 강의실에 모여 낮에 꾸중을 들었거나 실수한 일을 말하고 또 들었다. 이 선생은 현장에서 교육생들이 자주 하는 실수를 살펴 두었다가 나무라기도 하고 잘한 것은 잘했다고 칭찬해주었다. 교육생 대부분은 감수성이 넘치는 어린 소녀들이었다. 누가 꾸중을 들으면 자기가 잘못한 양 시무룩해졌고 칭찬을 받으면 제 일처럼 좋아했다.

이야기가 끝나면, 내가 반주하는 기타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그때 강의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타를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검정색 점프를 입은 두 사람이 경비실에 켜진 희미한 외등 아래에서 나를 막아섰다. 캄캄한 공단에서 왜 노래를 부르느냐고 했다. 직수 양성소 교육 프로그램의 일부로 노래를 부른다고 대답했다. 형사처럼 보이는 두 사람은 운동권 인사가 산업체에 침투하여 학습하는 것 같다는 신고가 들어 왔다고 했다. 그들은 노랫소리가 담 밖을 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을 남기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교육생들에게 형사가 다녀갔다고 했더니 모두 배꼽을 잡고 웃었다.

"선생님, 우리 노래 더 크게 불러요."

어느 날이었다. 교육생들이 기숙사로 돌아간 후에 사무실에 남은 일을 하고 있는데 어디서 "쿵"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계를 보니 자정을 넘어 한 시 가까이 되었다. 사장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조 선생, 양성 교육은 잘 되고 있습니까?"

이때다 싶어서, 양성소 현황을 간단히 설명한 후에 불편한 점을 말했다.

"날씨는 점점 더워 오는데 차가 없어서 이동하기 어렵습니다. 버스를 배차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사장인 나도 지금 트럭 짐칸의 실뭉치 위에서 자면서 서울에서 내려왔소."

그 말 한마디 남기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담을 넘고 가버렸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녹색 비닐을 덮은 타이탄으로 교육생을 운송하는 기막힌 묘안도 사장이 낸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 교육생을 데려다주고 마지막 공장의 사무실에 들어가 막 앉으려는데 경리직원이 전화를 받으라고 했다. 교육생을 처음 내려준 공장의 공장장이었다. 아이가 다쳤으니 빨리 오라고 했다. 아이는 어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병원에 보냈다고 했다.

급히 되돌아 가보니 교육생 네 명이 공장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올망졸망 벽에 기대어 서 있다가 한꺼번에 울음을 터뜨렸다.

"울기는 왜 우노? 다쳤다더니 누가 다쳤노?"

B가 힘없이 손을 들며 말했다.

"제가 스위치를 잘못 넣어 북이 날아가 직수 언니 이마에 맞았어요."

직기마다 성능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북이 오가는 속도와 리듬에 잘 맞추어 스위치를 넣어야 한다. 그런데 교육생이 실수하는 바람에 북이 씨줄을 끊으면서 하늘로 날아가 엉뚱한 곳에 있던 직수의 머리를 맞춰 버렸다.

다행히 병원을 다녀온 직수는 이마 옆 부분에 반창고를 붙이기는 했으나 큰 부상이 아니라고 했다. 사과를 거듭하며 몸 둘 바를 모르는 나에게 웃으며 귓속말로 속삭였다.

"조 선생님, 사실은 그 직기가 원래 밸런스가 잘 맞지 않아서 숙련공이 운전해도 가끔 말썽을 부려요. 북을 날린 B는 일도 잘하고 착합니다. 너무 꾸짖지 마세요."

갑자기 물방울 스카프를 쓴 그녀가 천사로 보였다. 그녀의 의연한 모습과 말에 용기를 얻어 공장장에게 가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오후에는 이 선생을 여기로 데려와 교육생을 지도하겠다고 했으나 막무가내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러면 총무이사에게 보고하겠다고 했더니 마지못해 허락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자정이 넘어 막 숙소에 들었는데, 누군가 방문을 급하게 두드렸다. 식당 아줌마였다. 아줌마 곁에는 교육생 C가 배를 부여잡고 복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아줌마 말로는 아무래도 맹장염 같다고 했다. C를 사무실에 앉혀 놓고 본사 당직자에게 전화를 걸어 차를 보내 달라고 했다. 그 당시에는 통금도 통금이려니와 컴퓨터는커녕, 집집이 전화도 없어서 C의 집조차 연락이 되지 않았다.

병원에 도착해서 몇 번이나 초인종을 누른 끝에 의사가 눈을 비비며 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턱 짓으로 따라 오라는 시늉을 하고 먼저 진료실로 들어갔다. C는 겁먹은 표정으로 의사 뒤를 절뚝거리며 따라 들어갔다. 벽에 걸린 시계는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잠시 후, C가 나왔다. 그런데 들어갈 때와 달리, 아픈 표정이 아니었고 다리도 절뚝거리지 않았다. 뒤따라 나온 의사는 쓸데없이 잠만 설쳤다고 투덜댔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배에 맹장 수술 자국이 있었다고 했다. 맹장은 한 번 잘라내면 다시는 걸릴 일이 없기 때문에 정말 아프냐고 다그쳤더니 그제야 거짓말이라고 털어놓더라고 했다.

C는 고등학교에 다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퇴하고 양성소에 왔는데 그나마 교육생 중에서는 나이가 많은 축이었다. 그런데도 엄마 품을 떠나 하루에 16시간씩 실습하고, 개인 시간이라고는 잠시도 없는 합숙 생활이 얼마나 고달팠으면 그런 철없는 꾀까지 생각해 내었을까. 돌아오는 길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C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밖에 내가 할 일이 없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이현 공단의 새파란 하늘에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크고 작은 사고 없이 조용히 지나가는 날이 없었지만, 교육생들이 꾸중 들었다는 소리보다 칭찬받았다는 이야기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에 언니 없이 혼자서 직기를 4대나 보았다고 신이 나서 재잘거렸다. 이제 천덕꾸러기 신세를 벗어나 직수에게 도움을 주는 수준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직수들이 서로 교육생을 배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실습을 처음 나갔을 때, 그렇게 손사래를 치던 공장장들도 아무개, 아무개는 양성 교육을 마치면 꼭 자기네 공장으로 보내 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하지만, 처음 30명으로 시작한 교육생들이 시나브로 한두 명씩 자취를 감추었다. 토요일 집에 가면 일요일 저녁까지 양성소로 돌아오지 않았다. 꼭 돌아올 것 같은 차림으로 나가서는 그 길로 끝이었다. 여기서 취직이 된다고 해 봐야 양성공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제대로 대접을 못 받는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직수라고 속이고 다른 공장에 취직하는 것이 낫다는 속셈이었다. 교육 막바지까지 이리저리 다 베이고 남은 인원은 열여덟 명뿐이었다.

1기 교육생들의 마지막 밤이 되었다. 과일과 음료수, 과자를 준비했다. 식당 아주머니에게 부탁해서 떡도 준비했다. 돌아가면서 한 사람씩 독창을 했다. 그동안의 소감을 말할 때는 이야기 반 울음 반, 울다 웃기를 거듭했다. 내일 아침이면, 비록 양성공 신분이지만 회사의 직원이 되어 떠날 것이다.

아무 준비 없이 엉성하게 시작한 교육을 천방지축(天方地軸)으로나마 무사히 마친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나는 직수가 되는 것을 최종 목표로 심지 말고, 더 큰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한다면서 수료를 축하해 주었다.

다음 날 아침에 교육생들을 떠나보내고, 오후에는 2기 양성 교육생들이 새로 입소했다. 그렇게 교육생들이 두 차례 더 입소하고 수료했다.

4. 좌충우돌(左衝右突)

양성소로 쓰던 이현 공장은 새 직기를 들여놓고 조립이 한창이었다. 양성소를 곧 비워야 했다. 이현 공장의 생산설비 완공이 가까워지기도 했지만, 양성 교육을 원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현실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본사에서는 어쩔 수 없이 양성 교육을 접기로 했다.

함께 일하던 이 선생은 원래 있던 공장으로 돌아갔지만, 내 거취가 문제였다. 입사할 때 염색 분야의 연구직을 희망했으나 그것은 허망한 바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염색부는 밀려드는 물량을 처리하기도 바쁜 실정이었고 연구투자비도 없었다. 하릴없이 처분만 기다리고 있는데 본사로 들어오라는 전갈이 왔다.

"3공단의 2공장이 무너졌으니, 가서 바로 세우도록 하세요."

총무이사가 멍하니 서 있는 나에게 두 줄짜리 발령장을 내밀며 부연 설명을 했다. 2공장 공장장이 다른 공장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것 같다고 했다. 마음이 떠버렸는지 공장 운영에 손을 놓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 선생을 보내 공장장 역할을 맡기라는 사장님 지시이니 잘 해 보라고 했다.

의외의 발령이었다. 기껏해야 총무과의 문서 처리나 관리과의 시설 관리 업무나 맡기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공장장 역할이라니. 거기다 2공장은 회사에서 직영하는 공장 중에서 규모 면이나 직원 수로 보아 두 번째로 큰 공장이었다. 2공장 사무실에 들어가니, 공장장과 서무계장 그리고 여경리직원 등 세 사람이 덤덤하게 맞아주었다. 공장장은 창밖을 내다보며 담배만 잇달아 피워 댔다. 우선 2공장에서 당장 내가 있을 곳을 정해야 했다. 경비실 옆에 붙어 있는 작은 방이 있었다. 공장장에게 숙직실에서 지내겠다고 요청하여 허락을 받고 공장을 둘러보았다.

직기가 100여 대 가까이 되고 전체 직원은 80명이 넘었다. 입사한 지 석 달도 채 되지 않은 새파란 신입직원에게 이런 큰 공장을 맡긴 회사의 처사가 언뜻 수긍하기 어려웠다. 여기에서도 '하면 된다.'라는 논리가 어김없이 작용하고 있었다. 경영진에서는 신입직원인 내가 양성 교육을 그런대로 감당했으니 여기서도 한몫을 해낼 것이라는 심사였을 것이다. 어쨌든 다시 한번 부딪혀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궁리해 봐도 내가 직접 생산에 기여할 방법이 없었다. 전문적인 기술도 없는 주제에 섣불리 공장장 역할을 하겠다고 나서서 설칠 계제가 아니었다. 우선 신입직원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다. 공장 안팎의 환경정리부터 시작했다. 그렇다고 생산에 투입된 직원을 동원할 수는 없었다. 사무실의 박 계장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사람 좋은 그는 흔쾌히 따라 주었다.

공장 건물 바로 맞은편에 있는 벽돌과 슬레이트 지붕으로 지은 단층 건물을 여자기숙사로 쓰고 있었다. 방이 열 개 정도 이어져 있었다. 방문에 발을 치거나 원단 자투리로 가리고 잠을 자는 형편이었다. 반대편에 난 창문은 방충망이 떨어져 너덜너덜했다. 방충망을 사서 교체하고, 공장에서 생산되는 천으로 방마다 커튼을 만들어 달았다. 비록 값싼 것이지만, 방문의 발도 새것으로 바꾸었다. 선풍기를 방마다 넣어 주고 싶었으나 우선은 그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보기 흉한 화단과 가림판도 깨끗하게 정비했다. 공장 건물과 기숙사 건물 사이에 있는 화단은 말이 화단이지 잡초만 무성했다. 화단의 잡초를 몽땅 뽑아 버리고 호미로 화단의 흙을 반듯하게 다듬었다. 화단 가운데에 나무로 만든 가림판이 있었다. 가림판은 흰 페인트칠이 벗겨지고 일부는 부서져 보기 흉했다. 부서진 부분은 크기에 맞춰 나무로 덧대고 못을 박았다. 그다음에는 흰색 수성페인트를 사다가 칠을 했다. 박 계장이 앞서 나가면서 초벌칠을 하면, 나는 마르기를 기다려 뒤따라가며 한 번 더 칠했다. 화단과 가림판이 깨끗하게 정비된 것을 보고 직원들도 싱글벙글했다.

나는 이곳에서도 잠자리뿐만 아니라 삼시 세끼도 공장에서 해결해야 했다. 직원들이 교대를 마친 후에 식당에 가서 혼자 밥을 먹었다. 이현 공장에 있을 때 보다 음식이 기름졌다.

어느 날 직원들이 식사하는 중에 식당에 들어갔더니 직원들 앞에 놓인 밥이 새까맣고 반찬도 형편없었다. 어제 장을 못 봐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잠시 후, 내가 식사하러 식당에 갔더니 내 밥상에는 흰 쌀밥에 두툼한 갈치 토막이 구워져 있었다. 식탁에는 식당 아줌마와 기숙사 생활을 하는 경리 아가씨가 함께 앉아 있었다. 그네들 앞의 식판에도 쌀밥과 고기 토막이 놓여 있는 게 아닌가.

"조금 전, 직원들이 먹었던 음식과 우리 밥상 차림이 왜 이렇게 차이가 납니까?"

"원래부터 이렇게 했습니다."

아주머니는 아무렇지도 않게 한마디 툭 던지고는 수저를 드는 것이었다.

"아니, 원래 그렇다니요? 조금 전 어린아이들이 멀건 국물에 숟가락을 담그고 빈 입맛만 쩍쩍 다시던데. 그래, 이 하얀 쌀밥이 넘어갑니까."

"오늘부터 당장 상 따로 차리는 짓 그만두세요! 나도 식사 시간에 직원들과 같이 먹겠습니다. 경리 아가씨는 밥 먹고 나 좀 봅시다."

식탁에 소리가 나도록 수저를 내동댕이치고 사무실에 들어와서 씩씩거리고 앉아 있으려니 경리 아가씨가 뒤따라 들어왔다.

"식자재값은 어디서 받습니까?"

"본사에서 일주일 치씩 내려옵니다."

"그것으로 정말 아이들 먹는 반찬을 그 정도밖에 못 차립니까? 내가 교육생들과 다른 공장 식당에서도 이렇게 박한 반찬은 본 적이 없는데요."

식당 아주머니를 따로 불렀다. 어린 직원들을 우리가 엄마처럼, 삼촌처럼 돌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따끔하게 나무랐다.

그렇지 않아도 변변찮은 식비를 몇몇 사람의 몫으로 따로 떼어 놓았으니 직원들의 반찬이 나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바꾸어 버렸다. 다음날부터 식당의 반찬이 확 달라졌다. 식당 밥이 입에 맞지 않아 공장 앞 구멍가게에 드나드는 직원 숫자도 줄어들었다.

야간 근무조가 공장에 투입되고 나면, 나는 또 다른 임무를 수행했다. 교부나 나이 많은 직수들의 말에 따르면,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어린 준비공들은 공장 앞 구멍가게에 드나들면서 고생해서 번 돈의 대부분을 써버린다고 했다. 그래서 밤 열 시가 넘으면 정문 경비실에서 나이 어린 직원들의 외출을 금하는 일도 내가 할 일이었다.

어느 날, 방금 외출에서 돌아온 온 D가 또 나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오늘은 안 된다고 달래서 들여보냈다. 한참 후에 경비실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담벼락 아래에서 "쿵"하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 달려갔더니 D가 발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사무실에 데려가 다친 발에 얼음찜질을 시키고 기숙사로 돌려보냈다.

이튿날 시골에 있는 집으로 연락했더니, 어머니가 부리나케 올라오셨다. 나 때문에 귀한 딸을 다치게 한 것 같아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렸다. 내 말을 듣고 난 어머니는 오히려 D를 나무라면서 말 안 들으면 때려서라도 인간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까지 하는 것이었다. 마치 초등학생 담임 선생님처럼 믿고 대하시니 몸 둘 바를 몰랐다. 가실 때, 차비가 든 봉투를 손에 쥐여 주었더니 손사래를 쳤다. 외려 정신이 없어 빈손으로 와서 미안하다면서 봉투를 바닥에 내던지고 나가셨다. 나는 소파에 앉아 어깨를 들썩이고 있는 D에게 말했다.

"빨리 나가서 엄마 배웅 안 하고 뭐 하노?"

D는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밖으로 나갔다.

보름이 지나자 공장장이 떠났다. 그는 사무실에서 마련하겠다는 송별식도 마다하고 떠났다. 이제 공장 운영 책임을 오롯이 나 혼자 떠맡게 되었다.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공장의 환경개선을 마치고 생산성 향상으로 눈을 돌렸다. 사실, 눈에 보이는 것은 고치기 쉬웠다. 혼자서 생각하고 내 몸을 움직여 할 일만 하면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장 안의 미묘한 인간관계는 달랐다.

현장에는 주•야간 주임 기사가 따로 있었는데 서로 자기 기술이 한 수 위라고 자부하며 상대방을 헐뜯었다. 요즘처럼 무슨 국가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순전히 경험으로 쌓은 기술이고 기능이다 보니, 같은 증상을 보이는 고장이라도 기사마다 고치는 방법이 서로 달랐다. 낮에 어느 직기가 말썽을 부려 수리해 놓으면, 야간 담당 기사는 기계를 엉터리로 만져 놓았다고 다투었다.

문제가 많기로는 직수도 마찬가지였다. 낮에 맡은 직기를 밤에 교대하는 직수에게 인계인수를 해 줘야 한다. 두 사람의 사이가 좋으면 아무 문제가 없지만, 두 사람의 기능이 차이가 나거나 업무 연결이 순조롭지 않으면 상대 직수를 바꾸어 달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바꾸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자기 손에 익은 직기를 바꾸는 것은 개별 노동의 강도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일부 직수는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으면 아무 말 없이 결근하거나 심하면 짐을 싸서 나가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같은 직기를 주야 다른 직수가 운전하다 보니 누가 많이 생산하고 적게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똑같이 대우하는 형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작정 열심히 하자고 얘기해 보았자 헛구호에 불과했다. 작업자에게 동기 부여가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을 개선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다.

몇 날 며칠을 고심하고 연구한 끝에 개별 생산량을 정확하게 점검할 방법을 고안해 내었다. 일주일 동안 내가 고안한 방법으로 점검해 보니 직기별로 주야의 생산량을 정확하게 산출할 수 있었다. 현장의 주임들에게 그 방법을 알렸더니 온갖 이유를 들어가며 불가하다고 우겼다. 나는 그들이 안 된다고 설명하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직원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직기별, 직수별로 월간 생산량 통계를 내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포상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개별 생산량을 계량하기 시작하자 공장 분위기가 달라졌다. 획기적일 만큼은 아니지만, 생산량이 조금씩 증가하였다. 사실은 생산량 증가와 같은 외형적인 성과를 바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생산량 점검을 계기로 열심히 일한 사람에게 보상을 더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먼저였다.

2공장에 온 후에 좌충우돌(左衝右突)한 덕분인지, 공장 분위기가 눈에 띄게 좋아지면서 생산이 원활해졌다. 생산 실적 순위가 8개 공장 중에서 상위에서 오르내렸다. 그 포상금으로 가을에 전 직원이 경주로 야유회를 갈 수 있었다. 2공장이 생긴 이래 처음이라고 모두 즐거워했다.

5. 사상누각(砂上樓閣)

찬바람이 불면서 회사가 갑자기 부도 위기설에 휩싸였다. 직수 난이 심각했던 경쟁 공장에서는 그 소문을 빌미로 우리 공장이 곧 망한다면서 직수들을 꼬드겨 내기 바빴다. 엎친 데 겹친다더니, 어수선한 분위기를 다독여야 할 주임 기사 한 사람이 직수 2명에다 양성공 2명까지 데리고 다른 공장으로 가버렸다.

이들이 떠나자 당장 낭패가 났다. 직수와 양성공에게 직기를 추가로 배정하였으나 생산량이 급감하기 시작했다. 8개 단위공장 중에서 1, 2위를 자랑하던 실적은 고사하고 납기를 맞추기조차 벅찼다. 직원들에게 인간적인 측면을 강조하며 도와 달라고 호소하기는 한계가 있었다.

부도 위기에 처한 회사에서 다른 공장의 직수를 구해 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렇지 않아도 높은 이직률 때문에 월급을 한 달씩 눕혀서 지급하고 있는 마당인지라, 오히려 체불을 염려해서인지 한 명 두 명 회사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본사가 은행 감리에 들어갔다. 이른 시일 내에 채무를 변제받는 것이 목적인 은행 입장에서는 수출 일선에서 상품을 개발하고 기술을 축적한 중소기업의 고군분투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당시의 규모로는 적지 않은 오천만 불 수출탑까지 수상한 전도양양하던 회사도 세계 경제가 곤두박질치는 물결을 이겨내지 못하고 침몰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전국적으로 노동조합 설립 열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1공장에서도 노조 설립 신고를 하였다. 은행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1공장의 준비공정 분야와 염색 공정 파트를 폐쇄하고, 직수들만 다른 공장에 분산 배치하는 강경책으로 맞섰다. 그러나 대부분의 직수들은 다른 회사로 떠나 버렸다. 귀중한 기능 인력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셈이었다. 가동을 멈춘 준비 공정과 염색 분야에서 일하던 직원 오륙십 명만 남아 온종일 집회를 계속했다. 회사에서는 노조 때문에 일방적으로 해고를 하지는 못하고 농성 중인 직원을 본사로 출근시켜 한 곳에 집결시켰다.

그러던 어느 날, 본사로 급히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총무이사가 내일부터 여기 와서 모아 놓은 노조원들을 재교육시키라고 했다. 2공장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지만, 속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아무래도 2공장마저 포기하는 눈치였다.

2공장으로 돌아와 저녁 교대 시간에 전체 직원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석 달 전에 공장장이 송별식 없이 떠난 것처럼 나도 서둘러 빠져나왔다. 공장을 정상적으로 가동하지 못한 채 떠나야 하는 아쉬움 때문에 몇 번이고 뒤돌아보았다. 시커먼 공단 길을 지나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본사로 오는 발걸음은 마치 귀양길에 오른 죄인처럼 무겁고 처량했다. 때 이른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이튿날, 총무이사가 나를 노조원들에게 인사를 시켰다. 그들을 모아놓은 방에는 의자도 제대로 없고,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삼삼오오 맨바닥에 앉아있는 모습이 마치 영화에서 본 거제도 포로수용소 같았다. 출고 제품을 임시로 보관하는 창고에다 휴식 시간과 점심시간을 제외한 8시간을 감금하다시피 몰아 넣어놓은 것이었다.

은행에서는 이렇게 푸대접을 해야 김이 빠지고 지쳐 하루라도 빨리 나가떨어지지 않겠느냐는 속셈이었다. 말이 재교육이지, 노조원 감시하는 일을 나에게 맡긴 것이었다.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으나, 부도 처리된 회사에서 내가 어찌 해 볼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농성자 면면을 살피다 보니, 사촌 동생과 조카 얼굴도 보였다. 1공장에서 준비 일을 하다가 여기로 온 것이었다. 다른 데 갈 곳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갈 데는 있지만, 퇴직금이나 해고에 따른 보상은 일언반구도 없이 무조건 나가라고만 하는 은행의 행태가 괘씸해서 이렇게 투쟁하고 있다고 했다. 다른 농성자들도 이렇게 출근 아닌 출근을 하면, 쥐꼬리만큼이나마 기본급은 나오니까 버틸 때까지 버티겠다고 했다.

총무이사에게 이런 사실을 전했다. 총무이사는 그러니까 그들을 잘 설득해서 내보내라고 조 선생을 여기 데려오지 않았느냐고 되레 반문했다. 짜증이 잔뜩 묻은 목소리였다. 어제는 미안한 마음이라도 묻어 있더니, 오늘은 안면을 싹 바꾸었다. 하기야 자기도 곧 잘릴 판이니, 내 입장이나 농성장 사람 처지를 돌아볼 여유가 있을까 싶었다. 총무이사도 은행에서 파견 나온 사람들 앞에서 고양이 앞의 생쥐 꼴로 쩔쩔매는 상황이었다.

다음날, 총무과 직원에게 은행 책임자를 소개해 달라고 했다. 농성장 교육 담당으로 온 아무개라고 인사했다.

"부장님, 수고가 많으십니다."

"그래요? 아무튼 잘 설득해서 빨리 마무리되도록 부탁드립니다."

"부장님 같으면 쉽게 나가겠습니까? 회사가 어려워 감원하는 것이야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은행에서 점령군처럼 나와서 아무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공장 문을 닫고 출근을 저지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반대 농성을 하니까,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가두어놓고 감옥살이를 시키고 있으니 화가 날 대로 나서 꼼짝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우선 그들에게 인간적으로 다가가야 됩니다. 이건 저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은행을 위해서입니다."

내 말을 얼음장처럼 차갑게 툭툭 튕겨내던 부장이 은행을 위해서라는 말에 갑자기 고개를 쑥 빼 밀었다.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 사람들도 공장 밖에서는 대부분 이 은행 고객이지요. 이분들이 밖에 다니면서 좋은 소리 할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럼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우선, 교육장을 사람이 있을 만한 곳으로 만들어 주세요."
"책상이나 의자 같은 집기 말씀입니까? 예산을 들일 여유가……."

"공장 뒤편에 많이 쌓여있는 원사나 제품을 포장했던 나무로 평상을 만들고 그 위에 깔 장판 값만 조금 들이면, 그래도 있을 만하지는 않겠습니까? 그 이후에 그 사람들의 마음을 다소나마 누그러뜨리는 역할은 제가 감당해 보겠습니다."

"음, 한 번 의논해 보지요."

잠시 후, 총무이사가 농성장에 부리나케 내려오더니 당장 작업을 시작하라고 했다. 오후부터 농성자 중에 일머리 있는 분이 지시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부지런히 도왔다. 모두 현장에서 오래 계셨던 분이라 시멘트 바닥에 무료하게 앉아 있는 것보다 신이 난 모습이었다. 사흘에 걸쳐 작업을 끝냈다. 흡사 군대 내무반 같은 평상이나마 내 집 안방에 앉아 있는 기분이라고 좋아했다.

자리가 조금 편안해지기는 했으나 온종일 얼굴만 마주 본다고 어떤 해결책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한 사람씩 요구사항을 말해 보라고 했다. 모두 열변을 토했다. 나는 노트에 열심히 메모했다. 그러나 기록한 내용을 어디 전달할 데가 없었다. 그들도 내가 하는 시늉이 허망한 짓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회사 측 사람이라고 믿는 내가 경청하는 것이 심리적으로 위안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가슴에 맺혀 있던 말을 마음껏 토로해서 후련하기는 했겠지만, 밀려드는 공허함마저 달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사이, 일자리 구하기가 손쉬운 여자 준비공이 하나둘 눈에 띄지 않았다. 여기서 더 기댈 게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자진해서 퇴사했다. 남자 준비공도 시나브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염색부의 나이 드신 분들은 새 일자리 찾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줄어드는 인원을 매일 이 층 사무실에 보고했다.

하루하루가 참담하게 지나가는 중에도 위안거리가 있었다. 본사 부속 공장에는 양성소에서 교육받았던 교육생들이 벌써 직수가 되어 있었다. 가끔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만나면 다 큰 처녀가 반갑다고 폴짝폴짝 뛰면서 매달렸다. 멀리서 "선생님." 하며 손만 흔들어도 그날은 종일 기분이 좋았다.

회사는 청산 단계로 접어드는 듯했다. 사무실 직원들이 곧 정리 해고될 것이란 소문이 흉흉하게 나돌았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세모에 송년회를 한다는 공고가 났다. 사무실 책상을 적당히 밀고 붙였다. 그 위에 차린 것이라고는 간단한 다과와 주류 그리고 안주 몇 가지가 고작이었다. 전(前) 사장을 비롯한 간부와 단위 공장 책임자들도 모두 모였다.

사장의 인사는 사실상 퇴임 인사나 마찬가지였다. 사장의 목소리는 공장 담을 타고 넘던 패기 그대로 쩌렁쩌렁 울렸으나 우리가 듣기에는 공허하기만 했다. 수출 대금을 담보로 땅을 사고, 그 땅을 담보로 공장을 짓고, 또 공장을 잡혀서 운영자금을 대출받아 일으켜 세운 사상누각(砂上樓閣)이 무너지는 소리로 들렸다.

송년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부도설이 나기 시작하자 능력 있고 눈치 빠른 사람들은 이미 사표를 내고 떠났기 때문에 더욱 착잡했는지도 모른다. 사회자의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까무룩 가라앉고 말았다. 일부 여직원들의 흐느낌 속에 송년회는 흐지부지 끝이 나고 말았다.

이튿날 아침, 예상대로 인사 발령 공문이 게시판에 붙었다. 사무실 직원과 공장 관리직원의 반이 넘는 인원이 퇴직자 명단에 이름이 올랐다. 총무이사 이름도 있었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인원이었으나 내 이름은 없었다.

한 달 후, 회사 청산에 필요한 사람만 남기고 그나마 남아있던 직원 대부분이 또 잘려나갔다. 이번에도 내 이름은 없었다. 내가 회사에 꼭 필요해서가 아니라, 남아있는 농성자들을 은행에서 직접 관리하기가 껄끄러워 목숨 줄을 이어놓은 것이리라. 그러나 그때까지 목을 늘이고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층 청산사무실의 부장 책상 위에 하얀 봉투를 내려놓았다. 아직 남아있는 농성자의 까칠한 손을 마주 잡고 얼른 좋은 자리 잡으시라고 인사한 후 정문을 나섰다. 경비실의 낡은 트랜지스터라디오에서 영화배우 최은희 씨가 홍콩에서 북한으로 납치되었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얼마 후, 회사가 완전히 문을 닫았다는 소문을 들었다.

 나가는 말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대구는 섬유 도시로 성장했다. 그 기반은 우리들과 같은 지역의 기능 인력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가난했지만 삶의 열기로 가득 차 몸부림쳤던 그분들의 가치가 폄하되거나 묻혀서는 결코 안 된다.

직수 양성소, 직물공장, 농성장에서 일했던 경험은 내 삶의 귀중한 밑바탕이 되었다. 비록 자랑하고 내세울 만한 모습은 아닐지라도, 1978년을 지금까지 지우지 않고 가슴속에 남겨두었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더 오래 울었던 그분들이 벌떡 일어나 함박웃음을 짓는 행복한 노후를 보내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상황의 일부나마 글로 남길 수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그곳에서 만났던 모든 분의 고생이 헛되지 않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1: 김수영 시인의 시, <풀>에서 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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