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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파도소리, 풍금소리/이영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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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이영백 씨 이영백 씨

내 인생에 첫 직장으로 "국민(요즘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예전에 흔히 '할일 없으면 국민학교 선생이나 하지'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요즘도 취업이 어렵다고 하지만 취업은 어느 세대, 어느 시대에서도 어려웠다. 고교를 졸업하던 1971년 그때에도 막연히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취업은 마뜩찮았다.

아버지 전 근대(1899년생, 근세조선 고종 광무3년)에 사셨던 분이라 겨우 시대가 바뀌어서 초등학교 입학과 졸업만으로 공부를 못하게 하셨다. 초교 졸업하고 동네 서당으로 직행하니 신학문 하던 초교동기들이 매일 찾아와서 '가출이라도 해서 중학교 다녀라'고 꼬드겼다. 2년 동안 서당 다니다 겨우 사회 돌아가는 것을 알아차리고 강의록으로 중학교를 몰래 마쳤다. 이어서 고교 졸업하려니까 서당 다녔던 잃어버린 2년이 남자에게 닥치는 것으로 군대영장이었다. 그 시대 시골에서 공무원이라도 하려니까 연봉이 너무 적었다. 초등학교 교사가 되기를 작심하고 교육대학을 선택하였다.

교육대학을 지원하면 2년짜리 초급대학이지만 졸업하고 나면 직장 구하기도 쉬울 것이라 하였다. 이미 영장을 받은 나로서는 대학에서 2년간 훈련마치고 시험에 통과하면 RNTC제도로 군대제대까지 약속 받을 수 있었다. 또 부족한 학자금을 보충하여 주는 한 학기당 8,000원 사도장학금이 있어 가난한 대학생으로서는 꿀 발린 금상첨화의 유혹이었다.

그러나 막상 교육대학을 졸업한 1973년부터는 정말 선생 되기도 어려웠다. 사회적으로 취업이 어려웠고, 교육대학 졸업생이 비사범계 교사들보다 50%를 넘기던 해였다. 사회 환경도 어려워져서 직장이동도 줄어들었으며 이래저래 각종 변수가 많아 초등학교 교사 발령받기도 어려워졌다.

교사발령을 기다리는 동안 노부모님을 큰 형님이 모시는 것만 해도 송구했는데 시골에서 대학졸업하고 발령도 못 받고 빈둥거리기가 싫어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마침 "하처가(何處可)"희망원을 제출하였음에 따라 경상북도 영일군 바닷가에 1973년 5월 1일자로 발령이 났다. 2개월 쉬었다.

나는 발령이 난 줄도 모른 채 울산에서 입주 가정교사를 하고 있었는데 우편배달 사고가 난 것이다. 우편집배원은 불러도 사람이 없으니까 엽서 쪼가리 한 장을 대수롭지 않게 대문에 던지고 가 버렸다. 그리고 사흘이 지난 아침에 우연히 질녀가 거름더미에 날아다니는 엽서를 보고 혼비백산하여 내려와서 나의 발령을 알려 주었다.

당시 영일군교육청에 발령 후 3일 만에 갔더니 장학사라는 분이 불호령을 쳤다.

"당신 말이지. 국가 명령이 그렇게 우스운가?"

"예? 제 얘기도 들어 봐야 하지 않습니까? 국가명령이 그렇게 중요했으면 일반엽서로 보낸 통지가 말이 되십니까? 마침 시골집 거름더미에서 찾았기에 망정이지 몰랐으면 오늘도 못 왔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통지서를 등기로 보내는 것이 관례 아니십니까?"

"그랬군요. 송구해요. 우리는 험지라 발령을 포기한 줄 알았어요. 그래도 다행인 것은 7일이 넘었으면 발령포기로 다음 사람으로 넘어가는 것이었는데 참 다행입니다. 어서 발령이 난 학교로 가세요. 그 학교 교장선생님이 학수고대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로서도 할 말이 많았지만 근무해야 하는 교육청 장학사에게 더 대들지도 못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나는 평생 최초 나의 첫 직장으로 찾아가게 되었다.

제1부 파도소리

1. 첫날밤

대학졸업하고 2개월간 취직 못하고 발령을 기다리다가 드디어 1973년 5월 1일자로 영일군교육청 교번 55번 모포(牟浦)초등학교에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포항시내버스 정류장에서 버스타고 허위허위 산모롱이를 감돌아 산골을 헤치고, 물어물어 찾아온 모포항구, 보리항구였다.

내륙지방(경주 불국사)에서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발령통지서 한 장으로 이 낯선 바닷가 근무지로 왔다. 모포! 첫 인상은 참 좋았다. 답답한 산골짜기보다 앞이 훤히 트인 바닷가라서 속이 후련하였다. 학교 교문에서 채 10여 미터 앞에 바로 바다다. 내륙에서만 살다가 제일 견디기 어려운 것은 바로 바다냄새였다. 짭짤하면서 비릿한 냄새가 나의 코를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나. 어찌 여기서 계속 살 것인가?

우선 하숙을 구해야 했다. 나의 하숙집을 구하는데 교무 주임선생님께서 적극적이셨다. 그리하면서도 하숙집은 이미 정해 두셨다고 했다. 가히 멀지도 않은 학교 담장너머 첫째집이라고 했다. 당장 당일부터 하숙을 구해야 했기 때문에 정말 다행이었다. 하숙비는 1개월에 3,000원이라고 했다. 첫 월급이 27,000원인데 9%가 하숙비였다. 당시 막걸리 한 되 30원, 택시 기본요금 90원, 맥주 한 병에 70원 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학교를 파하고 하숙할 집에 들렀다. 주인장과 그 부인이 계시고, 아들 하나, 딸 둘이었다. 그리고 앞방에는 선배 선생님이 이미 하숙하고 계셨다. 내가 쓸 방은 선배님 방과 붙은 안쪽 방이었다. 그러니까 왼쪽 앞방이 선배님 방, 뒷방이 내가 쓰는 방, 가운데 마루가 있고, 마루 안쪽에 주인 방, 자녀들 방, 그리고 동쪽으로 부엌이 있었다. 화장실은 밖으로 나와 동쪽인데 학교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에 위치한 곳이다.

하숙집은 바로 학교담장 곁이고, 사이에 버스가 다니는 큰 도로가 있었다. 오르막으로 올라가야 들어올 수 있다. 오르는 길 양옆으로 채전이 있었다. 오른쪽으로는 파밭이고, 왼쪽으로는 부추 밭이다. 그러니까 아래 도로에서 보면 쳐다보이고 집터가 높이 들어 얹혀 있었다.

그래도 하루 만에 하숙집을 구했고, 직장도 아주 가까워 편리하며 선배님과 함께 다닐 수 있어 좋았다. 첫날 학교가 파하고 하숙집으로 돌아와서 저녁을 먹었다.

주인장이 바둑을 둘 줄 아느냐고 물었다.

"아닙니다. 못 둡니다. 잡기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아이고! 잡기? 바둑손님 하나 줄었네."

"예?"

"아니, 괜찮아요, 선생님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연구를 해야지. 잡기를 하면 쓰나? 하하하…."

의미 있는 웃음으로 들리었다. 아니나 다를까 선배님과 곧장 바둑을 두시었다.

달은 휘영청 밝아 뇌성산(磊城山) 멀리서 부엉이 소리 들리고, 화장실로 나와 바람을 쏘이는데, 교감선생님께서 휘영청 달밤에 학교 운동장을 돌고 계신다. 달밤에 운동이라니? 멋쩍어서 슬며시 방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태어나고 처음으로 하루 종일 여러 사람을 만났다. 교장, 교감선생님, 교무 주임선생님, 동료 선생님과 낯설면서도 오늘을 맞이하였다. 게다가 눈이 초롱초롱한 쉰한 명의 나의 제자들이 있었다.

"우리 선생님"이라는 제목으로 낮 시간에 글짓기 한 것을 읽어 보고 있었다. 내용이 거개가 '우리 선생님은 무섭게 생겼다. 우리 이제 다 죽었다. 숨도 못 쉬겠다. 그래도 총각 선생님이다. 우리를 잘 가르쳐 줄 선생님이다.'라는 등 어린아이들이라 진솔하게 저마다 느낀 대로 잘 적고 있었다. 이 작품(?)들을 큰 봉투에 모두 넣어 두고 1년간 한번 가르친 후에 종업식 전날에 다시 글짓기를 할 생각이었다. 이제 잠을 자려고 베개를 베고 누었는데 눈은 따가운데 잠이 오지 않았다.

아이들 작문한 것을 읽느라고 잠시 잊고 있었는데 뭔가 나의 귀를 때리는 소리가 이제야 들리기 시작하였다. 다시 누워 잠을 청하는데, 그래도 잠이 오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쏴∼아! 처∼얼 석! 쏴∼아! 처∼얼 석!'

누워서 가만히 귀대고 들으니 기어이 파도소리가 나에게 들리고 만 것이다. 아! 이곳이 바닷가인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내륙사람으로 이제껏 이런 파도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것이다.

'쏴∼아! 처∼얼 석! 쏴∼아! 처∼얼 석!'이 소리는 끝없이 들려온다. 마치 때리듯 아프게 들리었다. 누가 이 파도소리를 자꾸 만들어 나의 귀에다가 전달하는가? '쏴∼아! 처∼얼 석! 쏴∼아! 처∼얼 석!'이 소리는 낮 시간에 자연 소음과 바삐 지내느라고 못 들었는데 이제 잠을 자려니까, 사방천지가 조용하니까 이 소리가 계속 들린다.

'누가 그랬던가? 바닷가에 가면 사흘이 지나야 파도 소리를 잊어버리고 잠을 잘 수 있다는데'큰일이다. 사흘간이나 곤욕을 치러야 한다 하지 않았든가. 하기는 이 기운을 이용하여 조력발전소도 있지 아니한가.

모포항에 정박한 후 파도소리 때문에 첫날밤을 한숨도 못 잤다. 나는 무명교사로 모포항에 잘 정박하였다. 그러나 파도소리를 들어가며 첫날밤을 그냥 지새웠다. 단지 헨리 반다이크(Henry Van Dyke)의 무명교사 예찬론을 낭하였다.

2. 달빛 섞인 풍금소리

♪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그면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그면

파∼란 하늘 빛 물∼이 들지요 어여쁜 초록빛

손∼이 되지요 초록빛 여울물에 두∼발을

담그면 물결이 살∼랑 어루만져∼요

물결이 살∼랑 어루만져요.

초등학교 음악책에 실린 동요다. 박경종 작사, 이계석 작곡으로 바로 내가 근무하는 교실에서 초록빛 바다가 보이는 교정(校庭)이다. 교실에서 초록빛 바다가 보인다. 나의 보물들이 작은 손, 손바닥으로 손뼉을 치면서 "초록빛 바닷물에"노래를 풍금소리에 맞춰 연신 따라 부른다. 합창이 되었다. 이윽고 학생들이 모두 저네 집으로 돌아가고 사방이 조요하다. 어둠이 내려 악보는 희미하지만 컴컴한 교실에서 나는 달빛 섞인 풍금소리를 손가락으로 자꾸 만들어 내고 있었다.

나는 대한민국 초등학교 교사다. 초임에 발령받은 학교는 바닷가다. 1973년 5월 3일, 아니 5월 1일자 발령인데 발령이 난 줄 모르고 있다가 부랴부랴 포항시교육청에 들려 모포초등학교를 찾아가야 했던 것이다. 물론 발령이 나고 큰 지도에서 지명을 찾아도 나오지 않는 작은 마을의 학교 이름이었다.

당시 하루 세 번 들어왔다 나가는 '포항-구평'간 시내버스에 몸을 실었다. 시내버스는 곧 출발하지 않았다. 출발시간까지 무한대로 기다려야 했다. 무료하였다. 맞은편에'포항시내버스회사'간판이 보였다. 사장님께서 작은 네모난 유리창 너머로 보였다. 그 사장님은 포항지역 유지셨다. 마침내 시내 버스정류장을 출발하여 형산강 검문소를 지난다. 위용을 자랑하는 포항종합제철소 곁을 지나고, 시금치의 고장인 청림을 지나 동해면 해수욕장이 있는 도구에 정차하였다. 이내 비포장도로로 고불고불한 길을 따라 약전을 거치고, 백토공장이 있는 상정의 희날재 오르막을 지나면 버스도 한꺼번에 오르지 못한다. 기사의 재빠른 변속에도 힘든 하루가 역력하다.

산속 외로운 기행을 하면서 상정검문소 앞 오른 쪽으로 틀어 공당을 지나면 내북초등학교가 나타났다가 뒤로 비껴지나간다. 그리곤 냅다 영천 황보씨 집성촌인 구룡포읍 성동을 지나 또 오르막길을 올라간다. 드디어 새바우, 땅고개 옆 공동묘지 앞에서 나는 뒤 차문으로 내렸다.

우선 띄엄띄엄 바다가 보인다. 아니 첫인상은 바다가 마치 시골의 큰 못 같았다. 버스는 종착지인 구평리를 향해 또 가야하는 모양이다. 부릉~부르릉 하면서 자동차 뒤꽁무니에 불완전연소가 된 시커먼 연기를 냅다 뿜어 내 주곤 가버렸다.

공동묘지에는 무덤 외에 아무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모포초등학교가 어디에 있습니까하고 물어 보려고 해도 주변에는 무인지경으로 아무도 없는 곳에서 누가 답해주랴. 오른 쪽으로 난 길을 따라 땅고개를 돌아 내려선다. 산속 우거진 소나무 사이로 해풍이 나의 머리카락을 흩날리고 있었다. 길바닥엔 흙이라고는 모두 파이고, 뾰족 뾰족한 돌이 솟아올랐고, 소나무 뿌리만 앙상하게 추상화마냥 남은 내리막길이었다. 조금 더 내려가니 이제 확 트인 항구가 보이면서 길 아래 초록빛 바닷가에 다소곳이 전형적인 시골 초등학교 교사(校舍)가 얌전하게 슬레이트 지붕으로 살포시 자리 잡고 있었다.

바로 저곳이구나! '내가 근무 할 곳이구나.'하면서 학교 뒷길을 돌아서 교문 앞으로 찾아 들어갔다. 아! 모포초등학교! 내가 드디어 찾아 왔다. '보리 모(牟)자에 물가 포(浦)자'다. 그 후 그리고 지속적으로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담그고 살았다. 정말 마음에 드는 고장이었다. 쉰한 명 제자가 있는 모포리 95번지 말이다. 초록빛 바다 물가에 살면서 출근길에도 바로 교문앞 바다가 있어서 더욱 좋았다.

어떤 이가 나에게 물었다면 '아! 나는 바로 초록빛 바다가 보이는 교정에 근무하고 있으니 한번 놀러 오시라고.'할 참이었다. 정말 첫 초임지인 나의 근무처는'보리가 일찍 핀다.'는'버리꾸지'인 보리항구 모포에 잘 근무하고 있다고 말할 참이다.

3. 대한민국 초등교육을 하다

공식적으로 모포초등학교 제4학년 1반 마흔아홉 명의 담임이 되었다. 즉 3월 1일자 발령이 아니고, 2개월이 지난 5월 1일 자이었다.

사실 그 시절 교육대학을 졸업하고도 발령 받기가 매우 어려웠다. 하처가라는 지원서로 다행히 2개월 지나서 바로 발령이 났다. 물론 내가 맡기 전에는 49명에서 이후에 세 명이 전학 와서 또 쉰 두 명이 되었다. 사실상 1반이라는 것은 유명무실했다. 학교 전체가 학년마다 한 반씩 뿐이었다. 여섯 학급 중에서도 내가 맡은 반의 인원이 제일 많았다.

학급을 맡으면 그 반의 전력을 알아보아야 한다. 마치 의사가 환자를 만나면 먼저 진단부터 하듯이 내가 맡은 학생들의 학습 진단을 하였다. 집단의 실력을 알아보려면 '위계학습이 어떻게 되어 있나'를 알아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바로'산수실력'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진단문제지로 진단한 결과 객관식 50문제를 가지고 치른 것인데 100점 만점에 학급평균 25점이었다. 다시 말해서 4지선다에서 확률로 보아 1/4인 25%, 이는 아무 답이든 지정해도 25점은 나온다는 말이다. 난감했다.

이제는 국어읽기를 해 보았다. 읽기를 원활하게 읽는 아이가 30%도 안 되었다. 이것도 문제이었다. 도구교과인 국어, 산수과목의 실력이 이러 할진데 4학년의 교육과정을 어떻게 수업할 수 있으랴. 그러나 명색이 4학년까지 올라 온 학생을 어쩔 수 없이 이해가 되던 안 되던 교육과정은 진행하여야 했다.

내가 해야 할 교육방법이 참 난감했다. 담임 선생님의 전력도 화려했다. 1학년 담임(여선생님) - 여선생님의 사생활(?)이 말이 아니었다. 반장의 말로는 1학년 수업을 거의 받지 않았다고 한다.

2학년 담임 선생님은 교감 선생님이었다. - 당시 편제상 6학급만 있는 단일 학교에서는 교감선생님이 한반의 수업을 담당하여야 했다. 문제는 1학년과 마찬가지로 교감선생님이 수업을 거의 하지 않았고 자습만 하였다고 한다.

3학년 담임 선생님은 할아버지 선생이셨다. - 당시 교육과정 운영에서 학습정착 확인이 안 되어 학습효과가 거의 없었으며, 음악은 아예 풍금소리 한 번 못 들어 보았다고 한다.

4학년 담임 선생님 - 총각선생님으로 1개월 20일 담임하다가 군대 입대하였다고 한다. 마침내 4학년 2개월이 지난 학생들을 만나 담임을 맡았다.

이러한 학급의 전력으로 보아 어떻게 담임으로서 학습지도의 효과를 나타낼 수가 있을 것인가? 정말 암담하였다. 이를 어째, 전연 기초가 자리 잡지를 못했으니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오후에 교장실에 들렀다.

"교장선생님, 우리 학급을 진단 해보니 앞이 캄캄합니다. 제가 제안을 하겠습니다. 낮에는 정규 교육과정을 진행하고, 방과 후에 개인적으로 1학년부터 다시 가르치면 안 되겠습니까?"

라고 하자 교장선생님께서 방법을 알려 주셨다.

"예, 선생님의 열의에 감사드립니다. 방과 후에 수업을 하되, 그냥 하지 말고, 반드시 학부형의 동의를 받아서 지도하십시오."

그 말씀을 들은 후 바로 등사판을 찾아서'방과후 학습동의서'라는 양식을 찍어 학생 편으로 동의서를 보내 보았다. 이튿날 전원 동의서를 제출하였다. 학습능력에 따라 소그룹을 만들어서 1개월 동안 지속적으로 지도하였다.

국어와 산수를 1, 2, 3학년 책으로 소화하였다. 5월말고사에서 꼴찌를 하다가 6월말에 전교 3등을 차지하였다. 상위집단이 하위집단을 지도하고, 중위집단은 내가 직접 지도하였다. 상위그룹이 하위그룹을 끌어 올리고, 중위집단 실력을 올려 주니 7월말 고사에서 2등을 하였다. 물론 이렇게 한다고 하루아침에 모두가 실력이 향상되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 실력이 맨 꼴찌에서 성적을 그것도 학년비교를 하게 되니 난감했다. 그래도 처음과는 많이 달라졌다.

모포초등학교 4학년 1반의 실력은 지속적으로 향상시킬 것을 굳게 다짐하였다. 이렇게 성적이 올라가자 경주시내에 다니던 교장 선생님 딸을 전학시켜 왔다.

"이 선생님! 우리 딸 좀 잘 가르쳐 주이소."

허허허. 이 또한 마음의 짐이 되었다.

이리하여 4학년을 마치고 5학년에도 담임을 맡았고, 6학년에도 담임을 하여 연속 3년간 맡아 지도하였다. 중학교 입학시험은 없었지만 반 배치고사라고 시행하였다. 모포초교, 봉산초교, 양포초교, 산서초교, 계원초교, 장기초교 등 면내 6개 학교에서 장기중학교에 입학하였다. 반 배치고사에서 1, 2, 3, 5등을 모포초등학교 제9회 졸업생이 차지하였다.

장기초교 K교감선생님께서 졸업식에 들리셨다.

"모포초등학교 금년에 누가 6학년 담임을 했습니까? 우리학교가 면소재지에서 그 동안 실력이 인정 되었는데 금년에는 체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라고 따지듯 말씀하셨다. 후문에 장기초교 6학년 담임 선생님 두 분이 모두 교육대학 선배님이셨는데 내 탓(?)때문에 아주 미안스럽게 되고 말았다. 하기는 오늘날 중국에서는 초등학교 담임을 아예 책임제로 하기 위하여 1학년부터 졸업 때까지 담임을 맡아서 철저한 책임제로 한다고 누가 들려주었다.

교육은 정말 어렵다. 교육에서 교(敎)자를 파자하여 보면 '자식을 등에 업고서 글을 가르치는 형상'이다. 교육은 말처럼 쉽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교육은 A를 A′가 되도록 변화시키는 것이다. 교육은 가르치는 자의 정성에서 스스로 우러나와야 한다. 고로 교육은 곧 성(誠)이다.

내 생애 최초교육을 한 사람으로서 담임을 오래(4·5·6학년 연속 2년 10개월) 맡았으니 제자들에게는 장·단점이 있었겠다.

4. 총각선생

총각선생 하면 남자인 내가 왠지 마음부터 설레 이는가. 물론 내가 총각선생이 아니었던가? 아침에 출근하여 보면 교탁 위에 네 번씩 접은 쪽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하나씩 펴보니 난감하였다. 그저 누구의 언니인데 만나 달라는 쪽지이었다.

왜 이럴까? 내륙지방에서 자라다가 학교공부만 하고 선생하려 왔는데 사회 환경으로 급격하게 변하다보니 겁부터 덜컥 났다. 상수도가 설치되지 않아서 칠전(모포 2리) 우물로 물 길으려 다니는 모포 1리 처녀들이 학교 앞으로 70 ~ 80여 명이 양동이를 곁에 끼고서 지나 다녔다. 갈 때는 '우로 봐', 돌아 올 때는 양동이를 머리에 이고서도'좌로 봐'하며 다니곤 하였다.

스물여섯에 부모님은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멀리 바닷가에 선생하려 간다니까 걱정이었다. 혹시 문란한 생활(?)을 할까봐서 걱정이셨다. 제발 조심, 또 조심하여야 한다고 여러 번 타이르셨다.

쪽지가 먹히지 않으니까 이제는 내가 하숙하는 방으로 찾아오기 시작하였다. 그것도 계획적으로 시간대별로 두세 명의 처녀들이 팀을 만들어 들이닥쳤다. 이유는 모두가 있었다. 사실은 어떤 총각이 선생하려 왔는지 관망하러 온 것이었다.

저녁 8시, 다음으로 9시, 10시 하물며 11시까지 들이 닥쳤다. 이런 일이 연 일주일째나 파상적으로 공격(?)해댔다. 그래도 처녀들이 오는 것에 개의치 않았다. 여름이니까 수박, 포도, 참외 등등 과일이 쌓여갔다. 그것도 모포 1리, 모포 2리(칠전), 대진리, 학계리에서 번갈라 가면서 나를 괴롭게(?) 하였다.

문제는 한 여고학생이 있었는데, 방문이유는 책 빌리러 온다는 핑계였다. 그런데 난감한 적이 있었다. 앞방에는 선배님이 하숙을 하고, 뒷방에는 내가 하숙하였으며, 주인댁은 큰방이고, 큰방과 나의 하숙방 사이에는 마루가 놓여 있었다. 이 여고생이 방에 들어오면 꼭 방문을 닫아버렸다. 나는 급히 방문을 열어젖히고는 문이 닫히지 않도록 문지방 사이에 삼각형 나무를 고아 두었다. 어느 샌가 방문을 또 닫았다. 방문 닫고 열기를 반복하여서 자꾸 시간이 흘러갔다. 책을 빌려서 곧장 가는 게 아니라 아예 들어 누워서 책을 보는 척 하기도 하였다. 저만치 떨어져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리고 사흘 동안 오지 않았다.

나흘째 되던 날 빌려간 공무원시험 대비용 수학문제집을 들고 밤 10시가 훌쩍 넘어서 찾아 왔다. 여름철 소낙비가 한창 오던 날이었다. 우레와 번개가 번갈라 쳤으며 비가 내리퍼붓고 있었다. 책을 들고 들어오는데,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교복을 입었는데 비를 흠뻑 맞아 윗몸이 젖어 있었다.

"아니 이를 어째! 학생, 책은 그 곳에 두고 가지요."

그러자 책을 던져두고 휭 나가 버렸다. 아니 우리 집에 형님 넷, 누나 다섯이 있었지만, 모두가 연배가 차이나서 시집, 장가 모두 가버리고 나는 학창시절을 외딴 집에서 홀로 보냈다. 그래서 다른 여학생을 볼 겨를도, 그런 생각(?)도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며칠간 조용해졌다. 문전성시를 이루던 처녀들의 방문이 조용했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오후에 선배님의 제안이 있었다.

"건너 마을에서 이 선생 고향에 놀러 가자는데."

고 하셨다. 내 고향이 경주 불국사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자랑도 할 겸 경주여행을 하자고 먼저 말하고 싶었다. 게다가 처녀 3명과 선배, 나, 남자 사진사 등 여섯 명이 버스를 타고 경주를 향했다. 우선 경주시내에 방 2개를 얻어 놓고 시내관광을 하고 삼겹살에 소주와 맥주까지 걸쳤다. 술을 조금 과하게 마셨다. 어둠을 맞이하여 반월성에서 야경 본다는 핑계로 헤매다가 어떻게 돌아와 잠이 들었는지 모두가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A아가씨와 남자 사진사가 홀연히 사라지고 없었다. 참 괘이(?)하다고 생각하였다. 남아있던 네 사람은 이튿날 불국사를 향했다. 구경 한 번 잘하고 모두 돌아왔다. 그런데 돌아 와서도 찜찜하였다.

문제가 발생하여 못내 걱정이었다. 그 두 분은 어디로 가셨을까? 아니나 다를까 월요일 교실에서 한창 수업을 하고 있었는데, 교무주임이 교실을 찾아 왔다. 장기지서에서 조사한다고 수업 마치고 숙직실에서 만나자고 하였다. 수업을 마치고 보니 순경 두 분이 벌써 대기하고 있었다.

"고향 구경을 잘 하고 왔소?"

"그렇습니다만…."

"이 사건에 대하여 경위를 말씀하시오."

우리들이 함께한 두 분들이 사라진 것을 그대로 설명을 하였다. 그런데"내가 무슨 잘못을 조장하였나?"

고 하니까,

"알았습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하고 가 버렸다. 아주 싱겁게 끝나버렸다. 사라진 사람을 내가 뭐 어찌 하라고 싶었다.

'아! 부모님께서 이러한 것을 걱정하셨구나. 큰일 날 뻔 했다.'고 속으로 자성하면서도 더욱 총각선생이기에 고뇌에 빠졌다. 이런 사건으로 차후에 교장·교감선생님도 알고 계셨고, 또한 동료 선생들도 모두 알게 되어 버렸다. 그러나 나에게 별다른 혐의가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이 선생! 토·일요일 당직이 되거든 나에게 부탁 하이소."

경남 진영에서 오신 B선생님이 나에게 그것도 간곡히 말씀하셨다. 아!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그리고 이후부터는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되었다.

그리고 B선생님 왈,

"여기 처가를 두지 않으려거든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예?"

바닷가 총각 선생으로는 고뇌가 참 많았다. 나는 낙찰계를 들어 그 계가 채 끝나기도 전에 대구 아가씨와 결혼하였다. 그날이 1974년 4월 20일이었다. 발령 받은 지 꼭 1년 만이었다.

집에 내자가 있으니까 이후로 처녀들이 오지 않았다. 참 행복한 고민(?) 한 가지가 해결 되어 버렸다.

5. 과메기

1974학년도 적령취학아동 조사가 실시되었다. 적령조사는 면사무소에서 통지가 온 자료를 들고 현장 확인을 하러 가는 것이다. 바닷바람이 부는 아직 덜 풀린 겨울 2월 말이었다. 마침 선배님과 한 조가 되어 대진리로 향했다.

할아버지 혼자 댁에서 이엉을 엮고 계셨다.

"할아버지 안녕하십니까? 댁의 손자가 이번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찾아뵈었습니다."

"아! 그래요. 그렇지 않아도 선생님들이 오실 줄 알았습니다. 우선 누추하지만 앉으시지요. 내 안주 장만해 올 테니 막걸리라도 한 잔 하고 가이소."

선배님은 이엉 엮는 옆의 지푸라기 모인 쪽으로 자연스레 자리를 만들어 앉고 만다. 내가 주춤거리고 있으려니까 같이 앉으라고 해서 나도 앉고 말았다. 할아버지께서 왼손에 주전자 위로 잔 두 개와 오른 손에 생선을 엮은 꾸러미를 들고 나오셨다.

"바닷가라서 특별한 것은 없고, 이것하고 안주하면 좋습니다."

나는 내륙지방에만 살아서 생선이름도 잘 몰랐다. 그러자 선배님은 숙달된 모습을 보이었다.

"할아버지 한 잔 하이소. 이 안주 참 좋고말고요."

그리고 할아버지 한 잔, 선배님 한 잔씩을 하셨다. 그리고서는 이내"이선생도 한 잔 하이소."

"저는 아직 술을 못 배워서 못합니다."

"허허, 술 배워서 먹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마아 마시면 되지요. 자! 한 잔 받으시오."

나도 얼떨결에 술잔을 받아 놓고 끝내 마시지는 못했다. 선배님은 자연스레 고기를 직접 찢어서 껍데기를 떼어 내고 잘도 잡숫기 시작하였다. '아니, 이런! 이것은 생고기잖아. 저걸 어떻게 먹어. 심지어 머리 쪽엔 붉어 죽죽한 피가 흐르잖아.'

어느 샌가 선배님이 모두 찢어서 안주 삼아, 심심풀이 삼아 모두 잡수어 버렸다. 그러는 사이 할아버지께서는 또 한 꾸러미를 더 갖다 주셨다. 나는 생각했다. 도대체 저 생선 이름이 무엇인데 아무 말씀도 안하시고 선배님 혼자 그렇게 잘 잡숫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다.

학교로 돌아 나오면서,

"아니 선배님, 그 생선이 그렇게 맛이 있습니까? 도대체 생선이름이 무엇인데 그렇게 맛이 있습니까?"

"아니 그렇게 맛있는 생선을 왜 안 먹어요?"

오히려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선배님은 되물었다.

"정말 생선이름이 뭔데요?"

하니까 그때서야,

"과메기라고 해요."

그래도 나는 몰랐다. 과메기가 무엇인지, 왜 그렇게 맛있게 드시는지 무척 궁금했다.

선배님이 자연산 과메기를 만드는 법을 설명하여 주셨다. 과메기는 본래 청어를 잡아서 하는데 요즘은 청어가 귀해 꽁치를 잡아서 만든다. 눈 온 밭에다가 흩어 두었다가 어느 정도 피득 해지면 한 꾸러미에 스무 마리씩 짚으로 엮어서 말리는 곳은 반드시 해풍이 부는 그늘에다 말려야 한다고 했다.

방금 먹은 과메기가 그런 절차를 밟아서 만든 오리지널 과메기이기에 혼자서 두 꾸러미, 당당히 40마리를 먹어도 괜찮은 것이라고 했다. 먹을 때 손으로 찢어서 껍데기를 벗기고 쫀득한 고기를 먹는데 아까처럼 머리에 피가 보여도 안주로는 과메기가 최고라고 일러 주셨다. 과메기는 아무리 많이 먹어도 소화에 걱정 없다고 했다. 과연 그럴까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선배님은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계십니까?"

"저런! 이 선생보다 일찍 바닷가에 발령을 받아 생활하다 보니까 잘 알게 되었지. 그리고 내 전임지가 석병초등학교 이었거든."

정말 듣고 보니 그렇게 한꺼번에 마흔 마리를 혼자 모두 잡수셔도 괜찮은가 보다. 지금 생각하니 정말 좋은 안주를 혼자 다 잡수신 것이 아닌가. 나는 아깝게도 그 때 단 한 마리도 못 먹었다. 아니 안 먹었다. 물론 지금이야 그 과메기를 잘 먹지만, 그 때는 천연 그대로 우리 조상들이 만든 현명한 안주를 못 먹은 것이 못내 아쉽다.

학부형 중에 대진리에 사시는 K씨가 있다. 학교를 파하고 나면 자주 나오셔서 우리를 만나고 하셨다.

"어이, 이 선생 막걸리 한 잔 어때?"

"그럽시다. 술을 잘 못해도 한 잔은 합니다."

모포 칠전에 오직 한 집 있는 술집에 들러 막걸리를 마시곤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면 막걸리 말고 맥주 마시자고 해서 또 섞어 마시기 시작한다. 그러자 교감선생님, 총각 선배님, 교무주임님, 할아버지 선생님, 경리선생님 등 차례로 모여들기 시작해서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이 사람을 마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왕 사발에 놓인 술을 마시지 못했다. 그러자 교감선생님 왈,

"이 선생 술 마셔."

"저 술 못 먹습니다."

"아니, 이 선생 물은 마실 줄 알제?"

"예, 물은 마십니다."

"됐어, 그러면 물마시듯이 그냥 마시면 되는 거라. 자아~ 자! 한 잔들 합시다."

그리고 못 먹는 술에 많은 양을 들이부었으니 내 몸이 견딜 수 없었다. 키 163Cm에 몸무게 49Kg, 호리호리하다 못해 바짝 말랐었다. 게다가 4년간 자취하고, 못 먹어서 비실이었는데 술을 과음하였으니 선배님 두 분께서 하숙방에 나를 데려다 뉘어 주었다.

도저히 이래서는 근무를 할 수가 없었다. 이튿날 출근해서 출석부를 부르는데 자꾸만 출석부 학생명단이 오르락내리락 해서 반장에게 물었다.

"반장, 출석부가 왜 이리 자꾸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하느냐?"

"쌤요! 출석부가 그런기 아이고요, 쌤이 자꾸 몸을 아래위로 흔드네요."

하하, 뭔가 잘못 되었구나. 자습을 시키고서는 책상에 엎디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곤 며칠간 술자리에 앉기도 싫었다. 그러나 어찌 전체 일곱 명 중에 교장 선생님 빠지고, 여섯 명자리에 빠질 수가 있으랴.

이건 나의 운명이다. 선생을 하려면 아니 조직에 속하려면 술을 배워야 하겠다. 술을 배워야지. 그래야 모포 과메기도 먹지. 멀지 않아 장대한 꿈(?)인 술 배우기가 곧 시작 될 것이다.

6. 술 처음 배우다

모포초등학교에 선생으로 생전 처음 근무하면서 몇 번인가 술자리에서 다운되어 끌려오다시피 하숙방에 쳐 박히고서는 오로지 술을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남자의 세계에 들어서면서 제일 먼저 배우는 게 술과 담배가 아니던가? 담배로 말할 것 같으면 일찍 배웠다. 그것도 중 2학년 때 선배로부터 "새마을"이라는 이름의 담배를 하루에 2갑씩 한 달간을 피우다가 아무런 재미(?)도 못 느껴 그 때부터 담배는 일찍 끊어 버렸다.

그런데 술은 배워서 배운 게 아니라 배가 고파서, 술 사오는 심부름을 하면서 주전자꼭지를 통하여 빨아 먹었던 게 시작이기는 하다. 배가 고파 술을, 막걸리 5∼6도 술을 한참 빨아 먹다가 덜컥 겁이 났다. 주전자 뚜껑을 열어 보니까 제법 쑥 내려갔다. 엉겁결에 도랑물을 손으로 퍼 담아 아버지께 갖다 드렸더니 아버지 왈 그날따라'오늘 술맛이 와 이러노?'해서 하늘이 노랜 후로는 다시는 주전자꼭지로 술을 빨아먹지 않았다. 내가 초등학교 때 하도 배가 고파서 술 찌게미를 아침부터 먹고 학교에 갔다가 술에 취해 담임 선생님께 꾸중들은 적도 있다.

사실은 젊어서 그랬지. 한꺼번에 술을 먹고 폭주로 다운된 것이 아닐까? 나도 술에 대하여서는 아버지의 유전자가 조금은 있지 싶다. 아버지는 반농반목수하시면서 새참으로 집에서 담근 동동주를 시작하여 나중에는 밀주금지로 인하여 막걸리를 사다 드셨다. 연세가 드셔서는 소주를 잡숫게 되었는데, 하루는 아랫동네서 한 자리에서 소주 한 되를 혼자 다 잡숫고 나서 목에 피를 올리고는 술을 끊으셨다. 그 때 연세가 꼭 일흔이셨다. 이러한 유전자가 있는 내가 술을 옳게 배우지 못해서 못 먹었지. 잘 배우면 넉넉히 먹을 수 있을 것으로 나도 모르게 추측하게 되었다.

도대체 누구에게 술을 배운다 말인가? 참 난감하였다. 학교에 발령받고 나서 일찍 하숙집으로 왔다.

"아주머니, 혹시 술을 어떻게 먹어야 잘 먹을 수 있는지 아십니까?"

"아이 고오. 이 선생 술 잘 못 드시는 구나. 그래. 술 잘 취하면 안 되는 데 우야꼬. 그래도 남자 선생이면 한 잔은 할 수 있어야 안 되겠습니까? 내가 술 먹는 법은 쪼금 알기는 하는데. 그래 한 번 배워 보겠닝교? 사실은 술을 먹는 게 아니고, 이기는 것이라야 한다 아닝교?"

"그러면 우야면 되는 데요?"

"그래요. 그라면 돈부터 내이소. 술 사와야 술 자시는 방법을 배우 제."

"그렇습니까. 여기… 돈이."

바로 하숙집 아주머니께서 곧장 술도가에 가셔서 술을 사 오셨다. 당시 칠전에 유명한 술도가가 있었다. 칠전에 유명한 우물이 있어 막걸리도 그렇게 술맛이 좋은 줄은 나중에야 알았다. 게다가 술도가 주인집이 바로 하숙집 옆집이라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드디어 아주머니께서 술을 사 오셨다. 그것도 두 되짜리 주전자 가득히 막걸리가 차 있었다. 소반에 김치 한 쪽하고 숟가락 한 개, 왕사발이 놓였다. 있어야 할 술잔이 안 보였다.

"아주머니 술잔은 왜 없습니까?"

"그래 예. 오늘은 술잔이 필요 없심더. 아따 술을 처음 배우시는 분이 의문도 많다. 내가 하라는 대로 하면 되지요."

"예~? 예."

그리고서는 왕 사발에 막걸리를 부어 놓고 숟가락으로 술을 한 숟갈 떴다.

"애걔, 이게 무에요. 제가 아무리 술이 약하더라도 이건 아닌데."

"아이~고오. 마아~! 내가 하라는 대로 하면 되는 구만은."

왕사발의 술을 숟가락으로 퍼서 맛보라는 것이다. 즉 술 사부님께서 아시는 비법이란다. 그래서 숟가락으로 한 숟갈을 퍼 올렸다. 그 한 숟갈이 왜 그리도 독한지. 이제 두 숟갈 째 퍼 올렸다. 이제 술의 도수가 더해지는 듯 혀끝에 술맛이 느껴진다. 이리하여 열 숟가락을 퍼 올리니깐 이제 나에게도 취기(?)가 올랐다.

술 사부 왈,

"고만, 오늘은 됐심니더. 여기까집니더. 이제 마아~ 그만 잡수시소."

'예? 그만 먹으라고요?'

"예에, 이제 됐심더."

차린 술상을 그만 들고 나가버리신다. 아니 차려온 술상을 열 숟가락 퍼 먹었다고 뺏어 가버리시다니. 한편 황당하였다. 그래도 그 열 숟갈의 술기운이 오래 몸에 남아서 그저 몽롱하여 왔다. 아무 소리 못하고 오늘 익힌 술 마시는 법을 오래도록 기억하려고 베개를 내어 놓고 담요를 덮고 잠깐 사이에 잠이 들고 말았다.

아버지를 만났다. '얘야! 막내야! 술을 배우려거든 제대로 배워야지. 그리고 사내라면 술을 먹고 이겨야지. 그리 약하냐?'홀연히 아버지 꾸중을 들으며, 저녁 먹으라는 주인아주머니의 소리에 잠을 깼다.

또 날이 밝았고, 하숙집에 돌아오니까 다시 술 배우는 세리머니가 시작 되었다. 이제는 술상에 작은 종지기가 놓였다. 종지기 술잔으로 다섯 잔을 먹으니 또 들고 나가신다.

다음 날에는 종지기에 열 잔, 또 그 다음날엔 종지기로 열다섯 잔, 그리고 그 다음날에 드디어 작은 사발이 놓이고 본격적인 술을 먹기 시작하였다. 자! 이러고 나니 일취월장 술 실력이 막강하게 늘어나게 되었다. 즉 드디어 술을 먹고 이기는 노하우를 터득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팁으로 절대로 빨리 마시지 말고, 이야기를 크게 떠들면서 신나게 하면서, 손도 조금 흔들고, 천천히 그리고 취기가 오면 모른 척하고 생수를 갖다 놓고 그것도 몰래 자주 생수를 마시면 술을 이기는 비법이 된다고 일러 주셨다. 정말 술 사부님께서는 철두철미 하셨다.

한 가지 더 있었다. 성질이 조금 급한 편이라서 술잔을 보면 바로 마셔 버리는데 빨리 취하지 않는 법은 상대방이 소주잔을 세 번 비울 때, 나는 한 잔을 먹게 되면 덜 취한다는 것이다. 특히 상대방이 석 잔 마신 후부터는 같이 먹어도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상대편이 먼저 술을 채운 후에 한 박자 느리게 내가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때는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이후 술 마실 일이 있으면 이것을 원칙으로 삼고 멋지게 술 먹고 이기는 것을 자랑(?)하게 되었던 것이다. 본시 술은 못 먹었고, 못 이겼는데 이후는 정말로 감쪽같이 술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술 마시는 법을 모포에서 배운 후인 것이다.

7. 백합과 황놀래기

선생을 하면서 이런 묘함이 또 어디 있었겠는가? 1973년 모포초등학교의 여름날이었다. 체육수업은 오전수업만 하는 수요일 3∼4교시로 연속수업이다. 교육과정을 잘 지킨다고 먼지 나는 운동장에서 체육수업을 하고 있었다. 체육시간을 잘 지키지 않아서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다른 선생님들은 자주 지적을 당하고 있었다. 그러자니 교장선생님이 자연히 전교 체육시간표를 체크하실 수밖에 없었다. 내 딴에는 교장선생님께서 혹 보는 중이라서 교육과정대로 철저히 지킨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곳에 발령 받아 와서는 그런 것이 아닌가 보다. 먼지가 날리는 여름날 운동장에서 땀 흘리는 우리 반 아이들을 바라보시면서 측은해 하셨던지 한 말씀 하셨다.

"이 선생! 더운 여름날에 아이들을 먼지 속에서 고생시키는구먼."

"예? 저는 교육과정을 지키느라고 합니다마는…."

"그래. 그게 아니고. 내 이 선생 철두철미 하는 것 잘 알지. 그래도 많이 덥잖아, 마아 아이들 바다에 집어넣어라 카이."

"예? 교장선생님! 바다에는 위험하고, 그리고 교육과정하곤 안 맞고, 저는 수영도 못하는데 괜찮겠습니까?"

"허어, 이 선생 여기 아이들은 태어나자말자 걸음마만 하면 바다에 들어가 살고 있구먼, 걱정 붙들어 매고, 바다에 집어넣어 봐!"

"예? 예."

나는 정말 반신반의하고 바닷가로 데려갔다. 바다라야 교문에서 10m도 채 안 되는 곳이다. 위험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꽉 차 있는 데 반신반의하고 큰맘 먹고 일단 교문을 벗어나 칠전 앞 바다가로 갔다.

오늘은 바다에서 수구한다고 발표를 하자 일제히 학생들이 즐거운 환호성을 냅다 지른다. 내륙지방에만 살다 왔기 때문에 나는 겁이 더럭 났다. 시퍼런 바닷물에 아이들을 집어넣다니 내가 무슨 큰일을 내려는 것이 아닌가? 정말 가슴이 두 근반 세 근반 하였다.

수구에 대한 기초를 일러두고 상대편을 정하였다. 나는 바다 물만 보고도 겁이 나서 들어가지도 못했다. 웬걸 준비체조도 끝나기 전에 우~루~루 남학생들부터 바다물속으로 마구 들어가는 것이다. 반장이 주축이 되어 남녀 학생들이 반반으로 수구를 시작하였다. 나는 정말 신기하였다. 그 시퍼런 바닷물에 마구 뛰어 들어가다니.

약 30분이 지나자 이제는 지친 모양이다. 아이들이 한 둘씩 바다 물속에서 나오지도 안하고 곧추서기 시작하더니만 몸을 뱅글뱅글 돌리기 시작하였다. 한마디로 장관이었다. 52명 모두가 곧추서서 뱅글뱅글 춤을 추다니 말이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 본다면 남녀학생들이 마스게임 하는 꽃송이가 아니던가. 바닷가 모래사장에 앉아 대기하고 있는 나를 향해 팔매질을 시작하였다.(아니 이런! 이놈들이 감히 나에게 돌팔매질을 하다니? 아니 내가 선생이면서 바다에 같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이러나?) 그런데 나를 향해 자꾸 날려 보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백합조개이었던 것이다. 쉰 두 명이 한 개씩 던져도 52개요, 2개씩 던지면 104개 이었다. 이제 반장이 양동이 2개를 들고 와서 가득 담았다. 곧장 학교 수돗가로 가져왔다.

고용원 아저씨가 눈치 빠르게 말을 걸었다.

"아이고 선생님 오늘 큰 수입 잡았구마는요. 어떻게 제가 도와 드릴까요?"

"예. 저는 어떻게 장만하는지도 모릅니다. 좀 도와주십시오."

"예. 제가 모두 장만하겠습니다. 염려 놓으소."

고맙게도 양푼 이를 가져오고, 망치로 백합을 깨니 싯누런 백합이 쏟아져 나왔다. 흐르는 수돗물에 모래를 씻고 모으니 큰 그릇으로 몇 그릇이 나왔다. 물론 교장선생님 댁에도 보내 드렸다. 숙직실에서 도시락을 열어 두고 고추장에 싯누렇고 싱싱한 백합조개를 마음껏 먹었다. 정말 체육시간이 살아 있는 시간이 되었다. 모포의 백합은 지금도 잊어버릴 수가 없다. 그때서야 그저 교장선생님의 충고가 고마울 뿐이었다.

또 하루는 자유학습의 날에 자연보호 겸 마을청소를 나섰다. 모포1리 바닷가로 집들이 죽 연이은 마을 앞길을 선택하였다. 늦은 오후가 되자 썰물이 되어 물이 빠진 갯가로 갔다. 바닷가 아이들이라 그런지 바로 갯가로 들어가서 여러 가지 조개와 물고기를 잡아 올렸다. 저만치 학부형들이 해초와 조개를 캐고 있었다. 특히 발이 빠른 L군이 어디에 가서 벌써 고기 낚을 바늘을 구하고 지렁이를 미끼로 놀래기를 낚는다. 저 멀리 동남수산 통통배가 만선이었는지 동그란 연기를 퐁퐁 뿜어 유선을 그리고 항구로 들어온다. 바닷가 체험은 시간이 잘도 흘러간다. 조개를 줍고 몇몇 아이들이 낚시도 하고, 바람에 밀려 나온 미역도 주어며 해조류를 모아들고 나온다.

바닷가 낚시에 재미를 붙인 학동은 벌써 꽤나 잡아서인지 여남은 마리가 되었다.

"이 고기 이름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

"쌤에. 황놀래기라고 하는데요?"

"황놀래기? 그 참 이름도 좋네. 그런데 이것 먹어도 되나?"

"쌤에. 그냥 회로 먹는 것은 괜찮다고 하데 예."

"그래. 그러면 다른 선생님이 계실 텐데 숙직실로 가져가야겠다."

"마아 그라이소."

우리아이들은 마음도 좋네. 지가 잡아서 집에 가져가지 않고 고기 이름도 모르는 선생님에게 주다니 말이다. 잡은 고기 중에 정말 큰 고기도 있었다. 이를 바로 숙직실로 가져와서 고용원 아저씨에게 드리니 곧장 회를 치기 시작하였다.

"자아! 선생님 이리 오십시오. 오늘 황놀래기 회 시식 좀 하시지요?"

그러자 여러 선생님께서 오셔서 황놀래기 회를 맛보기 시작하였다. 이 또한 즉시 잡아서 그런지 정말 쫄깃하고 맛있는 일미의 회가 되었다. 바닷가 발령을 정말로 잘 받아왔다고 생각하였다. 이 또한 바닷가에서 선생을 하면서 느끼는 묘미가 아닌가?

자유학습을 마치고 재미를 더하여 모포 1리로 죽이어 걸어가니까 나무화석이 있었다. 모포는 지형이 특이해서 나무가 화석이 된 흔적이 많이 나타났다.

8. 나무화석

모포초등학교에서 1973년 첫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한 학기 학사업무를 정리하느라 바쁜데, 우리 반 아이 둘이 느닷없이 학교에 찾아왔다.

"쌤에! 오늘 바쁜 교?

"왜? 정리할 것도 많고, 바쁘지. 뭐하려고? 집에서 공부하거나 부모님 일 좀 도와 드리지 않고. 무엇하러 나왔을까?"

"쌤에! 여기 모포는 나무화석이 많이 발견 됩니더. 지가 알고 있는 곳으로 한번 가 보입시더. 찾으면 쌤께 선물 하겠심더."

"그래? 진짜 있을라고. 이제 조금만 정리하면 다 되었다. 그러면 우리 어디 속는 셈치고 한 번 가 볼까."

"아이고, 마아 쌤요. 절대 안 속심니더.

오고가는 제자와 하는 대화에 이상하리만치 의심도 의구심도 없이 그저 농조로 선생과 학생간의 웃음 끼 있는 농이었다.

그러면 나무화석은 무엇인가? 나무화석은 광물들이 나무들의 빈틈을 채워 나무의 조직과 모양이 그대로 보존된 것이다. 지하수 속 이산화규소(Sio2)가 나무의 조직으로 치환되기 때문에 규소의 규(硅)자를 써서 규화목(Silicified Wood)이라고 한다. 외국에서는 미국에 아리조나주에 위치한 홀브록 근처의 화석림으로 직경 2m, 길이 20m에 달하는 규화목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한다. 우리나라는 평양부근에 발달한 중생대 주라기 초기지층에서 발견되었으며, 포항지역의 제3기 장기층군의 응회암촌에서 발견되기도 한다고 한다.

이제 나무화석에 대하여 알아보았으니 리어카와 곡괭이를 빌려서 모포 1리 땅고개 쪽으로 비포장도로를 올라갔다. 그저 덜컹덜컹 거리는 리어카만 몰고 올라가려니 심심했다. 그리고 도로만 난 곳으로부터 산모롱이를 돌려니 뭔가 섬뜩했다.

"얘들아 나무화석이 어디에 있을까? 마아 없다. 그만 집에 가자."

"아이니더. 조금만 더 올라 가 보입시더. 제가 봐 둔 게 있심더."

그래도 굽히지 않고 나에게 나무화석을 보여 주겠다고 세우니 할 수 없이 자꾸 먼지 나는 비포장 길로 비틀거리면서도 덜컹거리는 리어카만 끌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더 가니 흡사 나무 같은데 딱딱한 것이 나무화석이다. 분명 나무화석이었다.

"얘들아! 진짜 나무화석 맞네?"

"예에. 보이 소 있다 안 합디까?"

마치 심마니가 산삼을 발견한 것처럼 기쁜 것이었다.

"심봤다!"

"쌤요! 그래 좋은 교?"

"그래. 아무것도 못 찾다가 발견하니까 안 그러나."

땀을 뻘뻘 흘리면서 상당히 깊게 괭이로 캐내어 보니 직경 70Cm에 높이 50Cm는 족히 되는 것이라. 정말 말로만 듣던 나무화석을 발견하고서는 꾀나 기뻤다. 그리고 둘레에 나뭇잎화석 몇 개도 덩달아 주웠다.

얼른 리어카에 실어서 내 교실 복도에 갖다 두고 학습 자료로 쓸 생각을 하였다. 나뭇잎이 박혀있는 화석은 작아서 몇 개를 하숙집에 갖다 두었다. 나무화석을 우리 반 교실입구 복도에 갖다 두었더니 자연히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그래도 나는 묵묵히 두고 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복도에 이게 무엇이고 하면서 나무인줄 알고 들어 보려고 하다가 무거우니까 깜짝 놀라기도 하였다.

그리고는 꽤 시간이 흘렀다. 2학기가 시작 되고서 장학지도차 군장학사님이 오셨다. 분명 장학사님은 그것이 귀하고 좋은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신 모양이시다. 장학사님이 학교를 나서실 때 나를 데리고 나가서 작은 목소리로 말씀 하셨다.

"이 선생 그 복도에 나무화석 날 주면 안 되겠나? 날 주시려니까 사실 많이 아깝겠지요? 혹시 나에게 줄 생각이 있거든 좀 갖다 주실래요."

"예? 예."

나도 모르게 긴가 민가 대답을 하고 말았다. 장학사님께서 새집을 꾸미시는데 마당이 텅 비어 있어 나무화석이 장식으로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동안 고민을 하였다. 생각을 골똘히도 해 보았다. 교번 끝번인 학교에 발령이 나서 1년 만에 장학사님이 탐이 나는 물건을 내가 가지고 있어서 요청이 들어 왔으니 돈도 아닌 나무화석으로 장학사님과 연결이 될 수 있을까? 혹시 인사부탁도 할 수 있거나 높은 분을 알고 있다면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번쩍 스쳐 지나갔다.

한참을 지나 스산한 바람이 불고 겨울이 들어 인사철이 가까워 오면서 나의 생각이 바뀌었다. 그래! 모포의 명물을 갖다 드리자고 결정을 하였다. 나무화석을 시내버스에 싣고 시내에 가서 택시에다 또 실어서 기어이 갖다 드리고 말았다.

정말 이게 아닌데 사람의 마음은 간사하다. 나도 모르게 마치 무슨 종교에 홀린 듯, 뭐에 정신이 빼앗긴 듯 정말 갖다 드리고 만 것이다. 이후 나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장학사님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저 모포의 명물인 나무화석을 갖고 싶어 하시는 분에게 드려서 묻혀있는 옥을 빛나게만 만들어 달라고 속으로 빌었다. 지금 생각해도 잘한 일인지 못한 일인지 분간이 잘 가지 않는다.

나뭇잎화석은 목공예를 하시는 장인께 3개를 갖다 드렸는데'이것 신기한 물건이네, 잘 가져 왔구나.'하시면서 나무 받침을 만들고, 받침에 니스를 칠해서 멋진 나뭇잎화석을 작품으로 변신시켜 주셨다. 지금도 방에 두고두고 바라보신다.

정말 모포에서가 아니고서는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었을까? 모포에서 발견한 그 나무화석을 내가 보관하지 못한 것은 못내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포항 어느 댁 마당에 떡 버티고 앉아 있을 모포의 나무화석이 간혹 생각이 난다. 그저 다시 한 번 생각나게 하는 일들이다.

9. 후릿그물

매일 4학년 1반 교실에서 아이들과 씨름만 하다가 밤이면 술과 싸움을 하니 정신이 얼얼하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술을 마시지 않으려고 해도 어찌 그리도 학교가 파하면 곧장 술집으로 달려가게 만드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학교가 파하면 교감선생님을 따라 함께 모여야 하는 줄만 알았다. 교감선생님께서 대구 S초등학교에 근무 하시다가 촌으로 발령을 받아 왔다. 낙향이라 생각하니 오로지 술을 낙으로 생각하셨다. 동료교사들도 덩달아 아무 좌표도 없이 그저 교감선생님이 좋아하시는 약주를 같이 마셔 없애버리려는 것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이런 삶에서 헤어나는 방법이 하나 있었다. 바로 이 고장을 자세히 알아보는 것이다. 오늘은 이 고장 모포에 대하여 좀 알아보자. 크게 보면 이 지역의 경제·사회·문화나 지역의 특성도 있을 것 같다. 그렇게 크게 생각하지 않아도 모포를 빨리 알 수 없을까 고민해 보았다. 그저 훌쩍 교정을 나와 보자고 생각했다. 칠전 쪽에서 '어~샤! 어~샤!'하는 군중의 함성이 우렁차게 들리었다. 자꾸 그 소리에 끌리어 칠전 쪽으로 나도 모르게 걸어갔다.

모포 뒷산은 돌무더기가 솟아서 그런지 이름조차 뇌성산(磊城山, 혹은 봉화산)이다. 그리고 아래에 바다는 푸르다 못해 흰색을 띤 바닷물이 흰 포말을 휘날리고 있다. 자꾸만 아까 그 소리가 들리고 저절로 발길이 그 쪽으로 따라만 갔다. 아니 그곳에 마을사람들이 모여서 무엇하고 있는 것일까.

"아이고! 이 선상님 아잉 교?"

"예에. 이장님! 지금 이 시간에 무엇하고 계십니까?"

"예에. 후릿그물 안합니까."

"후릿그물이 뭡니까?"

"에∼? 꼭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우리 선상님이 빨리 알아들을 난가. 몰라? 마아 쉽게 말해서 그물을 바다에 던져두고, 양쪽 끝줄을 오므려 당겨 고기를 잡는 전통 어뻡(漁法)이지요."

"아∼! 예. 잘 알았습니다."

사실은 내가 내륙사람으로 그것도 발령 받아와서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찌 전통 어법을 어찌 알 수 있단 말인가? 하기는 6학년 교실 뒷벽 위에 고기잡이하는 그물의 종류 그림을 언뜻 보기는 한 것 같다. 나도 모르게 그저 아는 척 대답을 하고 만 것이다.

이런 설명을 하는 사이에 동네 남녀노소 구분 없이 아이들까지 모두가 달려들어 후릿그물 작업을 하였다.

"어기어차! 어∼영차. 어기어차! 어∼영차!"

이 소리에 따라 그물이 조금씩, 조금씩 자꾸 뭍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연자방앗간을 차리듯 그물을 감아올리는 나무틀이 있고 뭍에서는 네 군데 손잡이에 나온 나무막대를 잡고 여럿이 붙어서 돌리고 있었다. 그러자 천천히 그물이 땅으로 몰아 올라오고 있었다.

우리 조상들의 진짜로 현명한 고기 잡는 방법이 여기에 있었다. 그물과 이 나무틀을 설치하신 동장님이나 그저 구경하는 나까지도 신이 났다. 그 그물 속에서는 이름도 모를 다양한 잡어가 가득 차 있었다. 이마엔 땀이 나고 숨이 차드라도 잡혀 오는 고기가 있으니 더욱 '어기여차! 어~영차!'로 소리 높여 힘든 것을 잊어버리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당시만 해도 먹고 살기가 힘들었는데 하루 한 번 이렇게 해서라도 고기를 잡고, 또 공동으로 나누는 것이 우리 조상들의'두레'이다. 우리 조상님들의 현명한 삶의 방법인 것이다. 내가 올라오는 그물에 정신을 팔리고, 함께 부르는 구령 소리에 심취해서 저절로 끄덕이고, 흥얼거리고 서서 구경하고 있었다.

"선생님 여! 뭐 하시닝교, 퍼떡 그릇 안 가져 오시고요?"

"그릇 없는데요?"

"그라면 됐심더. 여기 두고 갈 테니까 나중에 가지고 가이소."

이장님은 삽으로 구덩이를 '쓱쓱'두 번 파서 구덩이를 만들어 놓고서 잡어를 한 양동이 갖다 부어버렸다. 고기와 함께 온 바닷물이 금방 모래사이로 빠지고 고기만 파닥거렸다.

후릿그물에 참여한 사람들에게는 무조건 한 양동이씩 퍼 담아 주는 것이 그 당시 인심이었지 싶다. 바닷가 모래바닥에는 저마다 집에 있던 형형색색의 그릇이란 그릇은 모두 총 동원되어 대기 중이었다. 이 또한 장관이었다. 이 어찌 내륙지방에서만 살다 온 백면서생이 이런 장면연출에 놀라지 않을 수 있으랴!

이렇게 잡은 고기는 저녁에 집으로 가지고 가서 온갖 방법인 반찬으로, 회로 밥상 위에 오를 것이다. 그러면 살기가 어려워도 오늘의 후릿그물은 기억에 영원할 것이다. 바닷가에 발령을 받고 이 또한 즐거움이 아니던가?

다음에 연락이 왔는데도 나는 그냥 물동이만 들고 나가기가 민망해서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고 저녁이었다. 그날도 후릿그물을 한 날이었는가 보다. 이장님께서 우리 집으로 직접 오셨다.

"오늘 왜 후릿그물 한다고 했는데 안 나오셨닝 교?"

"아이고. 한 번 구경했으면 됐지 예."

"선생님이 안 나오셔서 직접 고기 가져 왔심 데. 퍼떡 그릇 주이소."

겸연쩍게 내어 놓은 우리 집 양동이에 한 가득 부어 주시고서 한 말씀하셨다.

"우리 모포 고기 맛있게 드시소."

아니 이런 정말 황송하고, 미안하고, 부끄러워서 나는 속으로'이장님 고맙습니데이. 모포가 최곱니다. 모포가 아니고서는 이런 후한 인심이 어디 있을라고.'후릿그물 고마움에 그저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10. 학교운동장에서 순회영화 상영

1970년대만 하여도 우리나라는 사는 형편이 넉넉하지 못하였다. 모포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숙직을 할 때마다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숙직을 한다고 당직실인 숙직실로 가면 그것도 해가 지고 어둑해 지려면 숙직실에 불을 켜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불이 켜져 있는 것이었다. 이게 왜 이럴까? 도대체 누가 숙직실에 불을 켜는가? 정말 놀랄 일이었다. 아니 숙직실엔 내가 앉을 자리조차 없었다.

가까이 사시는 동네 분들이 숙직실을 차지하고 모두가 무언가에 심취해 있었다. 모두가 TV를 보고 계셨다. 텔레비전이 잘 없었던 시대였다. 그것도 커다란 진공관텔레비전인데 흑백이었다. 그래도'웃으면 복이 와요'라든가, '연속극 여로'에 푹 빠져서 매일 오시는 것이었다. 사실 당시에는 '개그'나'코미디'같은 용어도 잘 쓰이지 않던 시대였다. 달리 문화미디어가 없던 시대라 학교 자료용 텔레비전에 톡톡히 맛을 들이고 있었다. 한번 숙직실에 자리를 하면 소변이 마려워도 자리 때문에 일어 나오시지를 않았다. TV가 끝 날 때인 애국가가 나와야 모두 집으로 돌아가는 시대이었다.

어느 날 대구 TH영화사에서 영화 순회공연이 있다고 교무실에 찾아 왔다. 넓은 터가 없어서 학교운동장을 빌려야 한다고 했다. 교장선생님께서 당직인 나에게 운동장을 빌려 드리라고 지시를 하셨다. 영화 순회공연회사 담당자와 만났다.

운동장 사용료도 없이 마치고는 청소를 잘해 주는 조건으로 장소를 제공하여 주었다. 초청장이라면서 처음에 입장권 10장을 주셨다. 10장에 덤으로, 20장을 주시는 것이 아닌가? 가까이 계시는 선생님께는 2장씩을 드리고 나머지는 내가 평소 알고 있는 학부형, 학교지원을 아끼지 않으시는 학부형, 초소 순경 두 분께도 표를 드렸다.

학교가 파하고 나서 산그늘이 지고, 어둠살이가 오는 저녁이 되자 대형 스피커를 통해 오늘 저녁 모포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영화를 상영한다는 멘트가 나가고 이어서 유행가가 든 LP판에서 요란스러운 대중가요인 노래가 흘러 나왔다.

나도 어쩔 수 없이 저녁을 일찍 먹고 당직을 하러 나갔다. 교장, 교감선생님 사모님까지 벌써 나오셔서 입장하고 계셨다. 나는 당직이랍시고 숙직실에 앉아 있으니까 지역파견 순경이 두 분 계셨는데 오늘 저녁에 두 분 모두 동원되어 숙직실로 오셨다.

"이 선생 오늘 저녁당직은 우리가 설 테니까 영화구경이나 하러 가이소."

"아니, 명색이 당직인데 숙직실을 지켜야지요."

하기는 전화라고는 경찰전화와 군용전화밖에 없던 시절이다. 교육청에서는 수시로 관리과에서 점검차 오는 외에는 학교에 공무로 오시는 손님이 없던 시절이었다.

"전화도 없는 숙직실, 오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누가 학교 훔쳐갈까 봐요? 마아 영화구경이나 하러 가이소. 우리가 있을 테니까는…."

"K순경님!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가이소. 시골영화가 어떤 것인지도 알아야지요. 그래야 지역문화도 잘 가르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이제는 총각이신 P순경까지 거든다.

"아이 구. 이것 미안 해 서리. 이렇게 편리를 봐 준다니 고맙습니다. 그럼 수고 좀 해 주이소. 무슨 일 있으면 연락 해 주고요."

정말로 영화상영장인 운동장으로 갔다. 시골에 영화사가 들어오면 그 주변이 영화 마칠 때까지 시끌시끌하였다. 우리 학구 주변사람들만 오는 것이 아니라 산 넘고 물 건너 심지어 구룡포읍이나 동해면, 아니 당시 지행면 소재지에서도 구경하러 오곤 하였다. 그리고 대개 처녀, 총각들이었다.

드디어 영화가 시작되었다. 흑백텔레비전도 좋은 세월이었는데 "시네마스코프 총천연색"영화야말로 대단한 문화미디어가 아닌가. 물론 그 때는 애국가가 울러 퍼지고 끝나면, 이어서 '월남전 소식'과 '대한늬우스'를 꼭 상영하였다. 제목은 지금 잘 생각나지 않았지만 본 영화가 상영되었다. "섬마을 선생님", "귀신 잡는 해병", "돌아오지 않는 해병", "빨간 마후라", "동백아가씨", "흑산도 아가씨"등 제목이 흥행할 때이지 싶다. 물론 지방흥행영화는 도시에서 흥행을 하고 조금 늦게 이런 제목의 영화들이 주로 상영되곤 하였다.

본 영화가 상영될 때 한창 재미있는 장면에서 꼭 필름이 끊어지면 암흑세상이 되고 마는 것이다. 특히 필름이 끊어지려면 필름과 필름 사이가 마치 감자를 삼다가 눌어붙어서 누글누글한 색에서 동그라미가 생겨서 탁 끊어지고 마는 것으로 예고가 되는 것이었다.

이때가 문제다. 영화필름이 끊어지면 제일 좋아하는 것이 총각들이었다. 상영 중에는 어느 정도 빛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예쁜 처녀라고 생각하는 옆자리에 앉거나 서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 뒤의 이야기는 여기서 더 하지 못하겠다. 이후는 19금이다.

이런 필름 끊어지는 횟수가 많을수록 총각들은 휘파람을 불며 야단법석이었다. 이 또한 그 시대가 아니고서는 볼 수 없는 시골장관이었다. 필름이 끊어지면 덩달아 처녀들의 괴성이 어디선가 들리고 아수라장이 되는 것이었다. 다시 필름을 장전해서 상영이 되면 언제 그런 아수라장이 있었든가하게 조용하였다.

영화가 어느 정도 끝나려고 할 즈음 영화사 직원들이 둘러싼 흰색 천막을 모조리 풀어 버리면 영화가 끝나간다는 예고이기도 하다. 영화가 마침내 끝이 났다. 그렇게 시끌벅적 하다가 일시에 모두가 나가 버리면 학교는 천지가 적막강산이 된다. 그러나 당직자로서 시설을 보호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플래시를 들고 순회를 하려니까 K순경 왈,

"아니 이 선생님 조심하셔야지요. 지금 직접 순회를 하지 마시소. 뒤처리는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시간을 조금 두고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마아 숙직실로 들어 오이소."

"예? 예…."

정말 그랬다. 이래저래 한 시간여를 넘어서 확인한 후 이제는 괜찮아졌다고 했다. 이튿날 교실마다 문이 열려있고, 의자와 책상이 모아지고 난장을 만들어 놓았다. 내가 순찰 돌면서 플래시를 켜서 확인했다가는 맞아 죽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고 나니 정말 아찔하였다.

우리 학구지역은 아니었는데 등 너머에서 영화구경 온 총각이 기어코 처녀와 사건을 저질러서 경찰서로 잡혀갔다는 후문이 들렸다. 한편으로 이 일을 겪은 후에 K·P순경이 고맙기도 하였다. 순회영화 일정이 모두 끝나고 K·P순경에게 고마워서 밤에 막걸리 일배주를 사 드렸다.

세상은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선생이기 전에 나도 사람이고, 지역민이고 공생공사 하여야하기 때문이었다. 선생을 떠나서 지역사회를 위해 기여하고, 지역민을 도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이후 영화 순회공연이 왔을 때 교장선생님께서 장소허가를 하지 않으셨다. 기여보다 사회병폐(?)가 너무 많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후 영화 순회공연은 칠전회관 앞에서 상영하였다.

제2부 풍금소리

11. 뇌성산 소풍

모포초등학교에서 선생을 시작하고 한 학기를 마쳤다. 이제 2학기가 시작되고 바쁘게 일상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10월 18일, 2학기 소풍을 가게 되었다. 소풍 장소는 학교 뒷산인 뇌성산으로 정했다. 어느 학년으로 구분 해 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전교생 270여 명이 함께 가기로 교무회의에서 결정이 났다. 그러면 제일 먼저 뇌성산에 대한 문헌조사를 하였다.

뇌성산은 포항시 장기면 모포리와 구룡포읍 성동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산에 돌이 많고  뇌록(磊綠)-매새(매 : 매흙의 준말, 새 : 광석 속에 금분이 끼어 있는 잔 알갱이)  인삼  지치(紫芝)  오공(蜈蚣)-지네  봉밀(蜂蜜)  치달(雉獺)-꿩과 수달  동철(銅鐵)의 칠보가 나서 칠보산(七寶山)이라고도 한다. 높이 211.4m. 산성의 높이가 10척이나 되는 돌로 쌓은 성이 있고, 그 안에 못과 우물이 있는데 고려 현종 때 쌓은 것이라 한다.

뇌성산에는 지금 안타깝게도 곧 사라져버릴 위기에 놓여 있는 중요한 사적지 한 곳이 무성한 잡초 속에 묻혀 있다. 바로 "뇌성산 뇌록지(磊碌趾)"로 마을에서 보면 왼쪽 산허리 움푹 팬 곳이다. "뇌성산 뇌록"은 조선조 때 국가 중요 건물에 단청을 할 때 처음으로 가칠(假漆)을 하는 푸른색의 바탕칠 재료로 사용하던 돌이다. 이 돌은 어린 쑥이 올라올 때의 색보다 조금 더 진한 청녹색을 띤다.

시골학교에서 소풍을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고 궁금하였다. 뇌성산은 위에서 보듯이 칠보산이라고도 하였다. 높이는 211m이지만 그 높이로 상상이 별로 가지 않겠지만, 바로 바다 앞에서 치어다보는 산은 그렇게 높은 것으로 느껴진다. 소풍을 가기 전에 교무주임 선생님과 함께 사전답사를 갔다. 학교 뒤 지름길로 올라서 산 입구를 지나 가파르게 오르니 정말로 뇌성이다. 즉, 돌로만 이루어진 성이다. 그저 둘레에 있는 나무 외에는 돌무더기로 이루어진 산이다. 그래서 이 돌무더기만 있는 곳으로는 소풍으로 적지는 아니므로 조금 옆으로 가서 평지를 찾았다. 조금 지나가니 작은 돌담이 보이고 우물터도 있으며, 작은 평지도 있고 확 트인 앞바다가 보인다. 앞에 보이는 곳이 대진리 해수욕장이다. 이곳은 일명 해어포(海禦浦)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었고, 영암리 수영포와 더불어 포이포 수군 만호진의 진보(鎭堡)가 있었던 곳으로 우리 수군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러한 것을 조사하여 사전답사를 마치었다.

드디어 전교생이 소풍 가는 날, 1973년 10월 18일. 평소 수업이 있으면 9시에 수업이 시작 되지만, 소풍간다고 10시에 조례를 하니 일찍 온 아이들은 운동장 나무그늘에서 앉거나 삼삼오오 달리기도 하고, 고무줄놀이도 하고 대기시간이 길어질수록 아이들의 조바심이 더욱 났다. 그래도 아이들은 통제가 없으면 잘들 논다.

학년별로 줄지어 서서 교장선생님의 훈시가 있었고, 반장이 앞에 서고 남학생도 두 줄로, 여학생도 두 줄로 행보하고 나가고 그 뒤에 담임 선생님이 따라 간다. 제일 먼저 6학년이 앞장서고, 다음에는 1, 2, 3, 4, 5학년 순서로 줄줄이 연결되어 소풍 가는 날이다. 그것도 전교생이 줄지어 모두 한 곳에 가다니 참 신기하였다.

다람쥐 노래도 불렀다. 그래서 더욱 즐겁게 출발하였다.

(1절)산골짜기 다람쥐 아기 다람쥐 도토리 점심가지고 소풍을 간다. 다람쥐야~ 다람쥐야 재주나 한번 넘으렴 파~알딱 파~알딱~ 팔딱 날도 참말 좋구나.

(2절)산골짜기 다람쥐 아기 다람쥐 도토리 점심가지고 소풍을 간다. 다람쥐야~ 다람쥐야 재주나 한번 넘으렴 파~알딱 파~알딱~ 팔딱 날도 참말 좋구나.

우리 반 52명이 소풍을 가는데 도시락 없이 온 학생이 절반을 넘을 것이라는 사전 내용을 파악하였다. 며칠 전부터 소풍을 간다는 들뜬 생각도 있었지만, 난감한 일이 도시락 없이 오는 학생을 위하여 김을 사서 김밥을 하숙집 아주머니를 동원하여 30여개 말았다. 우리 반 아이들의 도시락 챙기기였다. 아울러 비닐 통에 물까지 준비하였다. 나의 생각이 적중하였다. 과연 소풍을 가는데 학생들 거개가 빈손으로 오는 것이다. 도시면 소풍을 간다고 하면 학부형 몇이라도 선생님 도시락을 준비할 텐데, 시골이라 본인 도시락도 없이 빈손으로 따라 오는 것이다.

바닷가 산골길을 올라가면서 누군가 혼자 "과수원길"동요를 부르니까 저절로 모두 따라 합창한다.

동구 밖 과수원 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 하이 얀 꽃 이파리 눈송이처럼 날리네. 향긋한 꽃 냄새가 실바람 타고 솔솔 둘이서 말이 없네. 얼굴 마주 보며 생긋 아카시아 꽃 하얗게 핀 먼 옛날의 과수원 길

그러면 길가 민들레도 고개를 흔들어 합창한다. 소풍 나온 아이들은 활엽수 상수리나무 밑을 지난다. 키 큰 해송 밑을 지나 잔풀이 돋아 난 작은 길로도 지나간다. 그러는 사이 모포 앞바다 산들 바람도 같이 소풍을 따라 나선다. 가끔 이름 모를 새들이 울어 대고, 바로 앞쪽에서는 장끼와 까투리가 놀라 스스로 "꿔~엉~ 꿩!"소리치면서 자기 이름을 부르고 날아간다. 그러면 작은 산새들도 우리도 있다고 함께 재잘재잘 거린다.

바람 따라 새소리 따라 올라오다 보니까 어느덧 도착지에 왔다. 제일 위쪽에 5, 6학년이 중간에 3, 4학년이, 아래쪽에 1, 2학년들이 앉았다. 우리 반은 4학년이므로 중간에 앉았다. 모두를 평지에 그늘이 있는 곳을 골라 앉혔다. 그러자 일부 아이들이 아침 일찍부터 가지고 온 것을 나에게 제출한다. 52명 중에 26명이 자기 도시락은 물론이고 담임 선생님에게 준다고 신문지에 꼬깃꼬깃하게 말아서 고사리 손에 땀이 밴 물건들이다. 삶은 달걀 1개, 담배 한 갑, 양말 한 켤레, 오이 1개, 사과 1개, 참외 1개, 날계란 1개, 쑥떡 한 쪽, 절편 한 쪽 등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는 자기만의 성의로 뇌성산 꼭대기까지 들고 온 것이었다. 그래서 누가 무엇을 가져 온 것인 줄 모르니까 내가 고맙게 받으면서 볼펜으로 출석 번호를 적었다.

이제 놀이시간이었다. 남학생과 여학생을 섞어서 동그라미가 되도록 두 팀을 만들었다. "수건돌리기"도 하고, "노래 부르다가 부르는 사람 수대로 만들기"등으로 벌칙이 생기면 장기자랑을 하는 등 즐거운 놀이를 하였다.

"둥글게~ 둥글게"라는 동요도 부르면서 짝짓기로 놀았다.

(1절)둥글게~ 둥글게~ 둥글게~ 둥글게 빙글빙글 돌아가며 춤을 춥시다. 손뼉을 치면서 노래를 부르며 랄~랄~랄~라 즐겁게 춤추자 링가~링가~ 링가~ 링가~링가 링 링가~링가~ 링가~ 링가~링가 링/손에 손을 잡고 모두 다함께 즐겁게 뛰어 봅시다. 둥글게~ 둥글게~ 둥글게~ 둥글게 빙글빙글 돌아가며 춤을 춥시다. 손뼉을 치면서 노래를 부르며 랄~랄~랄~라 즐겁게 춤추자.

마침내 점심시간이다. 도시락 지참이 없는 학생에게는 김밥을 나누고 생수를 준비하여 주었다. 나의 점심도 역시 김밥이다. 선생님들이 모이고, 사모님들도 동참하셔서 함께 음료수도 마시고 담소도 하였다.

우리학교는 저 아래 마치 장난감처럼 보인다. 포항에서 구룡포를 경유하여 영암까지 가는 시외버스가 저만치 꽁무니에 먼지를 뿜고 대진리 수양산으로 산굽이를 돌아간다. 그리고 시원한 모포 앞바다는 확 트인다.

저 멀리 모포등대도 보이고, 축항이 있어 큰 파도를 막아 준다. 항구로 통통배가 들고난다. 마치 비행기를 타고 내려다보는 조감도처럼 보인다. 정말 소풍을 뇌성산으로 오게 된 것이 다행이었다. 덤으로 사전답사까지 하여 두 번을 오르게 되었고, 역사적 자료를 찾아보는데 상당한 이론무장을 하게 된 것도 참 다행이다. 뇌성산 소풍을 정한 것은 참 다행이었다. 어렵사리 모포에서 가을 소풍을 마치고 아무 사고도 없이 학교로 돌아 왔다.

이제 아이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아직 학교가 파할 시간은 많이 남아서 교장선생님을 모시고, 고용원 아저씨를 포함해서 모두 여덟 분이 숙직실에서 회식을 하였다. 물론 이 자리가 준비되기 전에 모포에서 나는 바다고기로 회를 준비하여 두었다. 모두 모여앉아 정말 작은 시골초등학교 전체회식이었다. 이렇게 모포초등학교 가을소풍은 모두 끝이 났다.

12. 버스여차장과 선생

요즘에야 시내·외 버스를 타도 차장(車掌)이 없다. 그러나 1970년대는 버스 차장이 있어서 차문을 탕탕 치면서 "오라 잇!"해야 출발하는 시대였다. 버스에는 차장이 최고다. 차장이란 기차·전차·버스 등의 안에서 차중의 일을 맡아 보는 사람이다. 어른 장(長)자가 아니라 손바닥 장자를 쓴다. 손바닥으로 차를 쳐야 하니까 그런가.

"포항-모포(땅고개)-구평"으로 오가는 황색 선을 두른 시내버스가 하루에 3회밖에 없었다. 만약에 이 차를 놓치면, "포항-구룡포-모포-영암"으로 돌아오는 푸른 색 선을 두른 시외 직행버스를 타고 구룡포에 도착해서 약 30분간 쉬고 오는 것이다. 이 코스 말고 또 다른 코스는 "포항-오천-금오-장기"로 오는 버스를 타고 오면 금오에서 내려 약 2km를 걸어 들어와야 했다.

간혹 시간이 나면 구룡포 경유 직행버스를 탔는데, 항구의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다. 포항에서 구룡포까지는 정류소마다 내리고 타고를 반복하여 그래도 잘 운행이 되었다. 구룡포 항구에만 들어오면 차장이"30분간 정차 합니데이."하고 사라진다. 어디에 갔는지 소식이 없다. "포항-구룡포"간에는 손님이 많이 있지만, 구룡포에서 모포경유 영암 가는 버스에는 30분간 정차하면서 손님을 다시 모아야 운행하기 때문이기도 한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구룡포 항구에서는 '고래 고기'가 주종을 이루었다. 운 좋을 땐, 잡아 온 고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저런걸 보고 흔히 '고래가 집채만 하다'고 하는 말이 있을 법하다. 고래가 하도 커서 사다리를 놓고 대도(大刀)를 들고 칼로 쓱쓱 베고 난 뒤 호스로 물을 뿌리면 검붉은 고래 피가 막 흘러내려 바다로 다시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큼지막하게 베어 놓은 고래 고기를 갈고리로 이용하여 장정 넷이서 힘겹게 옮기는 것이다. 고래를 잡는 모습은 못 보았지만 그 큰 고래를 해체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이를 둘러서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니 이 또한 장관이 아니랴.

문제는 이 이야기가 아닌데 옆길로 갔다.

"포항-구룡포-영암"버스가 구룡포에서만 오랜 시간을 정차 하는 것이 아니라 칠전정류장에서도 오랜 시간을 정차하는 것을 한참 뒤에야 알았다. 왜냐하면 나는 학교 옆 모포정류장에서 항상 내리고 말았으니까 잘 몰랐던 것이다.

오후 나른한 시간에 수업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교실 오른편 높은 언덕배기 도로에 버스가 정차하면서 차장이 무어라고 소리를 쳐댔다. 알고 보니 수업하고 있는 나를 찾는 모양이다. 수업 중인데 웬 소란인지 나가 보았다. 다짜고짜로 차장이 삿대질을 하고 씩씩거린다.

"4학년 다~임 선생 맞지요?"

엔진소리로 잘 안 들리니까 고래고함을 쳤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예. 왜 그러십니까? 예…!"

"내가 다음 파수 들어올 시간에 칠전정류장에서 만납시데이."

그리고는 대뜸 오르막길이라"부르르∼릉!"하면서 불완전연소의 검은 매연을 뿜고 도망치듯 가버렸다. 이것 참 너무 고약하고 황당했다. 그것도 직행 시외버스 차장유니폼을 입고 모자까지 쓴 예쁜 차장아가씨가 순간에 나를 확인한 후 냅다 소리 지르고, 다음 들어오는 시간에 칠전정류장에서 만나자고 하니 이것이야말로 기가 찼다. '아하, 이것 분명 우리 반 아이가 사고를 쳤구나.'싶어서 반장을 조용히 불러 물어 보았다.

"반장, 차장이 왜 저렇게 고함을 치고 가는지 아느냐?"

고 물어보니 가관이었다.

"쌤예, 우리 반에 L이 세워 놓은 버스차장 돈주머니에 돈을 가져갔다 컸데예. 우리학교 아이들은 웬만하면 다 알고 있어요!"

"그래 고맙다. 아이들은 다 아는데 세상에 선생이란 나 혼자만 모르고 있었다니! 이것 참 큰일이구만."

드디어 일이 터졌다. 아니 큰일이네. 제일 먼저 다음 들어오는 버스가 오기 전에 사고 내역을 파악하고 이를 수습하여야 할 방안을 만들어 내어야 했다. 나는 조용히 L을 불러서 얘기를 들어 보아야 했다. 그런데 이 L이 아예 나와 마주치기를 꺼려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L 이웃아이인 L1을 불러 물어 보았다. L1의 이야기는 황당했다.

"쌤예, L이 돈을 가져오다가 다른 아이들이 봤어요. 그 광경을 본 10여 명 아이들 모두를 데리고 가서 돈을 똑같이 나누어 주고 그 돈으로 모두 과자를 사먹어 버렸다 카데 예."

라고 한다. 이것이 일이 크게 번지게 되었다. L은 가정형편이 어려웠다. 홀어머니만 계시고 사는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해초를 따고 미역 덕장에서 일하시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를 어째 일이 벌어지기 전에 수습을 빨리 해야 하는데 시간이 없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우선 변제를 해 주고 마무리를 빨리 해야만 조용해지지 싶었다. 시간이 되어서 시외버스가 도착해서 차장이 내리고 나를 만났다.

"4학년 담임선생 맞습니까?"

"그렇습니다만…. 도대체 왜 그러십니까?"

"사실은요. 귀 반에 아이가 우리 회사공금을 훔쳐 갔는데 말입니더. 이걸 우짜믄 좋겠습니까?"

"그래 예."

"어짜던동 변제를 해 주셔야 하는데. 우얄까요? 안 그러면 고발이라도…"

"예? 뭐라 꼬요? 고발…? 도대체 그 돈이 얼마나 되는데 그럽니까?"

"한7,000원 쯤 되겠지요."

"그런데 정확하지도 안쿠마는…. 학모자님께는 확인해 보았습니까?"

"예…. 그런데 하도 집이 가난해서 돈이 한 푼도 없다 안 캅니까."

"그러면. 진짜, 아이를 고발 할라고 합니까?"

"예…, 지도 형편이 어려워서요."

하기야 그 당시 얼마나 살기 어려운 시절인가? 시외버스 여차장을 하려면 강단도 있고 그 어려움을 감내해야 하는 그런 세월이었다. 정말 이 일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을 것인지가 가장 큰 고민이었다.

"그러면 제가 제안 하나 하겠습니다."

"예에. 어떻게 해 주실랍니까?"

여하튼 여차장은 회사공금을 변제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것을 알아보니까, 돈은 혼자 훔쳤지만, 10여명이 나누어 모두 써 버렸으니 혼자에게 책임지우는 것도 그렇고, 또 버스차장님이 식사를 하러 가려거든 그 돈 주머니를 가지고 내렸어야지요. 차장이 주의를 하지 않은 것도 문제가 안 있습니까?"

"예, 그걸 그렇게 훔쳐 갈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여태 이 코스로 다녀도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물론 지도 조금은 책임이 있기는 있지 예…."

그때는 가냘프고 힘든 그 버스여차장이 얼마나 애련해 보이는지 나도 몰래 코끝이 찡긋하였다.

"그렇지요. 그럼 이렇게 합시다. 나도 담임으로 이런 일에 휘말리는 것이 좋지 않으니까 내가 가진 돈이 이것 밖에 없으니 4,000원으로 해결합시다."

"예? 예에…. 고맙심더. 고맙심데이. 참말로 고맙심데이 선쌤예…."

돈을 여 차장에게 건넸다. 그러자 갑자기 여차장이 나의 손을 덥석 잡으면서 기어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하였다. 또 나의 마음이 찡해왔다. 공연히 나의 마음이 울컥하기도 하였다. 아! 이것이 사람 살아가는데 주는 감동이던가?

금4,000원으로 이의를 걸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해결했다. 그나마 얼마나 다행한 일이든가? 이 일로 왈가왈부한다면 초자선생이면서, 총각선생님으로서, 담임으로서 그 벅찬 사회적 책무를 어떻게 견뎌낼 수 있었겠는가.

지금이야 4,000원이 그렇게 큰돈이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큰돈이었다. 내 월급 27,000원에서 4,000원을 공제하여야 하니까 말이다. 1973년에 처음 시작한 교사의 월급이 27,000원이던 세월의 이야기이다. 이를 해결하고 난 후에서야 학부형들이 알고서 이를 또 해결 하시려고 해당 학생의 학부형들께서 모두 모이셔서 십시일반으로 거둔 돈 금4,000원을 가지고 교실을 찾아주셨다.

정말 안 이래도 되시는데. 정말 괜찮은데. 모포사회의 인심이 이렇게 좋을 수가. 그런데 꼭 '학부형들이 미안해서 안 되겠다.'고 하시니 그 정성 내 또한 마음 약한 총각선생으로서 어찌 뿌리칠 수 있었겠는가?(이건 아닌데, 정말 아닌데…) 기어이 모아 오신 돈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사실상 안 받아도 되는데,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저지른 일인데….). 그러나 내 양심에는 정말 못내 송구스러웠다.

이것이 모포사회에서 일어 난'버스여차장과의 나의 스캔들'이다.

13. 해삼

늦게 배운 도둑이 무엇을 못한다더니만, 늦게 배운 술로 인하여 모포사회 전체에 소문이 났는가 보다. 술 잘 먹는 이 선생으로 소문이 났으니 말이다.

결혼을 하고 장모님이 와계셨다. 바닷가에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딱히 하는 일 없이 학급 경영록을 정리하고 있자니 마침 심심하던 차에 누가 왔다.

"선쌤, 계십니꺼?"

"누구십니까?"

창문을 여니 어떤 아저씨가 나와 보라고 손짓을 하였다. '내가 모르는 아저씬데 왜 저러지?'하고 나가니까 양동이 한 가득 해삼을 들고 왔다.

"선쌤예. 오늘 비도 오고 해삼을 잡았는데 팔리지도 않고 해서 술 잘하시는 선쌤댁에 가져 왔심더. 마아 3,000원만 주이소."

"아이고. 내가 무슨 그런 소문이 났습니까? 누가 해삼 산다 캤습니까? 가지고 가이소."

아예 부정적으로 들리는 말도 그렇고 손사래를 치니까 그 아저씨께서 기가 찼는지,

"그러면 1,500원만 주소."

"아니, '해삼 산다.'고 안했습니다."

"아! 예에. 내가 가져가도 못 먹는데, 그라믄 마아 선생님께 그냥 드리고 가겠습니다. 그릇 주소."

"됐다 카이 그러십니다. 왜 자꾸 그러는 대요."

사실은 나도 그 당시 안주로 나오는 해삼을 잘 먹었다. 그런데 막상 해삼을 내 손으로 장만해야 한다는 데 대한 부담감 때문에 그렇게 나도 모르게 거절하게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이번에 그 아저씨께서 우리 집 마당에다가 아예 부어 버리고 나가 버렸다. 물론 그 아저씨도 단단히 화가 치밀어서 그냥 그렇게 어렵게 잡은 해삼을 내동댕이치고, 확 부어 버리고 나가신게 분명하다. 이를 어째 돈을 치르지 못한 것도 미안하고, 해삼을 장만해야 하는데 장만할 줄 몰라서 난감해 하고, 무슨 일이 이 비오는 날에 이렇게 일어났담? 자아! 이것 참 난감하였다.

나도 술을 설 배워서 그저 술집에서 나오는 안주나 받아서 먹어 보았지. 장만하는 것 한 번도 못해 보았다. 해삼을 장만해 놓으면 맛있게 먹었지. 그것도 꿈틀거리는 이 해삼을 겁이 나서 손도 못 댔다. 게다가 뒤집으면 싯누런 배때기는 어찌 그리 내륙지방 사람으로서 겁이 났는지 모른다. 해삼 등은 보면 볼수록 징그럽고 오글오글 느껴지는 것이 그 때는 그렇게 겁나 하였다.

마침 장모님께서 와계셨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홱 버리고 간, 살아 있는 해삼을 주워 담아서 장만을 생각을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장모님! 해삼 좀 장만 해 보실랍니까?"

그러자 장모님께서 나오셔서 보시더니,

"아이고! 이 사람아 나도 겁이 나서 못 장만켔다. 해삼을 먹기는 먹어 봤는데…. 아이구우! 이 서방, 나 못해."

아이구우 이런! 이를 어째! 해삼은 살아서 마당에 기어 다니고 있었다. 술은 잘도 마시면서 안주를 못 만들다니 나도 한심했다. 그것도 장모님께서도 계시는데. 내가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때 반짝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아! 생각났다. 앞집총각에게 한번 여쭤보자. 바닷가 사람인데 설마 못하랴.'그리고 앞집총각을 찾았다.

"K총각! 계세요? 비도 오는데 소주 한잔 합시다."

"누구십니까? 아예…. 이 선생님! 그래. 좋지요, 좋습니다. 그런데 이 선생님 무슨 좋은 안주가 있습니까?"

"마침 해삼이 좀 생겨서 그런데 해삼 장만을 줄 압니까?"

"해삼? 해삼 장만은 거야 많이 해봤습니다. 명색이 바닷가 사람인데…. 그런데 어디로 갈랍니까?"

"예. 우리 집으로 가입시다."

"예에? 집에 해삼 잡아 뒀습니까."

"예에, 집에 해삼이 갑자기 많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앞집 총각을 모셔 왔다. 대구 유수대학교인 Y대학교 사대를 나오셔서 발령을 받기 전에 쉬는 중이라고 했다. 대학교에서 축구선수도 했다고 한다. 진짜로 도마 위에 한 마리씩 얹어서 장만하는데 전문가를 뺨치게 잘 했다. 해삼 안주가 모두 장만해지고 소주가 나왔다. 비오는 날 내 입이 궁금하던 터라 해삼 안주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 해삼을 가지고 오신 그 아저씨께는 미안하고 송구스럽고 이를 어째. 아까는 분명 나도 모르게 비오는 날 해삼을 사라고 하니까 공연히 퉁명스럽게 대한 것이 미안하였다.

주자 십회훈에 "부접빈객거후회(不接賓客去後悔-손님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으면 떠난 뒤에 뉘우친다. 손님이 왔을 때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대접하지 않다가 가고 난 뒤에 후회해 보았자 이미 늦었다는 말이다.)"라 하지 않았든가? 즉 이런 말을 내가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지행합일하지 못한 내가 선생으로서 미련하고, 순간 판단이 왜 그리도 모질었는가 말이다. 어찌 남이 공들여 이룬 일에 대가도 없이 공짜로 아니 날로 먹겠는다는 말인가? 이를 어째 두고두고 이 일에 나 자신의 원망이 뇌리에 박혀 있을 일을 저질렀단 말인가? 정말 송구하고 죄스러운 일이었다. 추후에 우리 집에 다시 그 아저씨께서 꼭 오시면 만약에 다시 오신다면 기꺼이 돈을 더 치르더라도 꼭 사드려야 하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하였다. 주제에 나는 흥이 나서 글을 썼는데 막상 그 결과로는 그 해삼 아저씨가 지금도 못내 아쉬움으로 밖에 남지 않는다. 다시 만날 수 없는 아저씨가 되고 말았다.

한편 그날 장모님께도 대접하고, 덩달아 내자도 맛있게 먹게 되었다. 확실히 모포에 발령 받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먹어도, 먹어도 해삼이 너무 많아 줄어들지를 않자 앞집, 옆집, 앞에 앞집, 옆의 옆집 모두 모셔서 해삼과 소주파티를 즐겼다.

끝내 그날 이후 그 해삼 아저씨는 결코 만나지 못했다. 아니 그날 아마도 대구에서 장모님도 오셨고, 대접은 하여야 했고 해서 용궁에서 보내어 준 아저씨인가? 아니면 그 아저씨로 현신을 하여 나를 깨우치게 했단 말인가? 지금도 그 미스터리에 나는 잠 못 든다.

14. 장교와 선생

나는 군대에 현역으로 입대를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군번과 제대증이 있다. "5관사(병)제18호로 전역되었다."는 증명서가 말해 준다. 흔히 말해서 단풍하사다. 군번 8400526×. 계급은 하사. 초등학교 교사가 되기 위하여 국가에서 배려해 준 제도로 RNTC(하사관 무관후보생) 제4기 수료자이다.

2년간 750시간의 호된 교내훈련으로 군사학 27과목을 이수하여야 한다. 1년차 주당 9시간, 2년차 주당 6시간 등 군사과목을 이수하여야 함으로 군복을 입었다 벗었다 하여야했다. 아울러 1년차 3주간, 2년차 3주간 모두 6주간 군대 병영에 입소하여 실습을 이수하여야만 했다.

그것도 임용 전에는 5관구에서 필기와 실기시험을 모두 통과해야 임용을 해 주던 제도이다. 물론 동기 160명 중에는 탈락하여 현역 하사관으로 차출된 수가 10%정도 되었다. 임관 후 예비역으로 학교 발령을 받아 8년간 복무하여야 한다. 예비군훈련은 일반 제대군인과 똑같이 받았다.

1973년 10월 어느 날이었다. 운동장에서 체육수업을 하고 있었다. 체육은 2시간을 연결하도록 운영하였다. 먼저 순환운동 등 체조를 간단히 하면 교육과정에 맞는 체육수업을 하여야 한다. 그날은 교육과정으로 4학년 피구를 하고 있는데, 군용 트럭 한 대에 병사들이 단독군장한 채로 가득 태우고 운동장에 먼지를 일으키면서 들어왔다. 그리고 내렸다. 그 중에 한 사람만이 새하얀 소위 계급장을 달고 반짝 빛났다.

"수고하십니다. 말 좀 여쭙시다."

하면서 나에게 군대인사인 거수경례를 붙였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아, 우리 부대원들이 총검술훈련을 하려니까 잠깐 운동장을 빌렸으면 합니다."

"예. 그러면 교장선생님의 허락을 받아야 되니까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교장 선생님은 체육수업에 방해가 되지 않으면 운동장 한쪽에서 사용허가를 내어 주어라고 하였다. 소대원 20여 명이 일목요연하게 줄을 맞춰 기합 소리도 우렁차게 총검술을 하였다. 우리 반 아이들도 덩달아 총검술을 구경하다가 마칠 시간이 되어 체육수업을 마쳤다.

그러자 해병대 장교가 슬금슬금 나에게 다가 왔다.

"혹시 아시는 분 아닙니까?"

"아! 예, 어떻게…."

라고 하는데 해병대 빨간 명찰을 보니까 소위 서종×가 아닌가! 그러니까 고향 불국사초등학교 동기생이었다.

"아니, 너 종× 아닌가? 어떻게 해병대엘 갔나?"

"응. 해병대에 지원했다. 여기 근무지 관할이지."

"그래. 나도 올해 5월 1일자로 이곳에 초임지로 근무하게 되었네."

"그래. 여기 내가 근무하는 관할지이니까. 그래 앞으로 자주 보자."

철모를 쓴 아래 얼굴은 온통 햇볕에 그을려 얼굴이 새카맣다. 정말 이름을 확인하지 못했더라면 모르고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것 얼마 만에 만난 초등학교 동기생인가? 아니 여기서 이렇게 만날 수가 있을까? 하기는 서울에 한양대학교 공대로 진학했다는 소문은 얼핏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이 바닷가에서 아니 모포에서 만나다니 정말 반가웠다. 훈련을 모두 마치자 군인들이 차에 오르고 '고마워. 나는 간다.'는 말 한마디 남기고 휭 가버렸다. 마치 뭣에 홀린 듯 했다. 그저 그 옛날 불국사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같이 뛰어 놀았던 것으로 오버랩 되고 말았다.

그리고 나의 교사생활로 일상 시간이 흘러갔다. 토요일이 되자 고향으로 나가려고 "구평-포항"시내버스에 몸을 실었다. 성동리로 시내버스가 내리 쏟아지면서 내북초등학교 푸른 숲 앞을 지났다. 공당리 마을회관을 지나면 상정리 검문소가 있었다. 검문소에서는 검문하는 군인과 경찰이 함께 차에 올라 하나하나 확인한 후 포항으로 내닫게 되었다. 상정리 오르막길을 힘들게 버스가 올라간다. 산골길을 돌아 내려가면 약전이었다. 오른쪽으로 가면 흥환이 나오고, 직진하면 동해면 도구였다. 도구에는 해수욕장이 있어 제법 번화하였다. 어느새 포항해병대사령부 앞을 지나고 BOQ 앞에 멈춘다. 그 때 각진 모자의 해병대 장교 한 사람이 탔다.

나는 버스 뒷자리에 똑 바르게 잘 앉아 있었다. 군인 장교가 성큼 들어오더니 내 옆자리에 털석 주저앉는다.

"누구야! 아니 너 서 소위 아니가? 어디 고향가나?"

"그래, 그래. (고향)집에 안 가나. 니는?"

이때는 장교 체면도 없이 그저 경상도 사투리가 막 튀어 나오네.

"마침 잘 되었네. 나도 고향에 간다."

"그래. 오늘 만난 김에 죽도시장에서 한 잔하고 가자."

"응, 좋지."

우리 둘은 의기투합하여 포항버스주차장에 내려 죽도시장으로 갔다. 서 소위는 우선 무엇이라도 먹자고 운을 떼었다.

"나는 회는 그렇고, 우리 통닭 먹을까?"

"그러지 뭐, 나는 아무거나 잘 먹지."

둘이 통닭에 소주를 먹고, 마시고, 또 퍼 먹었다. 집에도 가기도 전에 포항 죽도시장에서 벌써 흠뻑 취하였다.

"아니. 우리 이러다가 집에 언제 가겠노? 이제 시외버스 타러 가야지."

"그러지. 택시타자."

시외주차장에 내려 표를 끊고, 또 경주를 향해 떠났다. 아차! 이것 큰일 났다. 경주역까지 35분 걸리는데, 문제는 소변을 보지 않고 탄 것을 알아 차렸을 때는 이미 직행버스가 출발하여 효자 검문소를 통과하고 있었다.

한참 다리를 꼬다가 포기했다. 또 다리를 꼬아 보았다. 술을 먹고 시외버스를 타려면 반드시 화장실에 다녀와야 하는데…. 그런 준비성도 없이 그저 시외버스를 보자말자 고향에 가야 된다는 급한 강박관념에 차를 타고 만 것이다. 드디어 경주역에 도착했다. 경주역 앞 직행버스정류장에서 기차역 화장실까지 그렇게 빨리 달려 본 적이 없었다. 익히 알다시피 술을 먹고 소변 마려운 것 참기가 그렇게 어려운 줄은 당해 보지 않고서는 모를 것이다.

그 이후 어김없이 토요일 고향에 들리려면 타이밍이 잘도 맞아서 우리 두 사람은 장교와 선생으로 늘 만나게 되었다. 심지어 비오는 날에도, 겨울에는 눈 오는 날에도 그렇게 정확하게 약속이나 한 듯 만날 수 있었으랴. 모두가 모포초등학교에 근무하면서 다시 찾은 초등학교 동기생인 해병대 장교 서 소위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 아닌가?

당시 해안지역에는 밤 10시면 통금이다. 바닷가에 철조망이 쳐있고, 그 철조망에 매달린 빈 깡통을 보면서 참 무서움을 느꼈다. 해안가는 바로 국경이요, 전선이었다. 밤이면 매복으로 군인들이 경계를 선다. 이러한 국경 아닌 국경에서, 전선 아닌 전선에서 수고하는 군인들이 있어서 우리는 밤에 편안히 잠을 잘 수 있는 것이었다.

1973년 12월 24일. 그러니까 크리스마스이브 날이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반 아이들이 군 초소방문을 계획하였다. 우리 학구에, 아니 모포 지역에 군 초소가 3개나 있었다. 45, 46, 47초소. 먼저 칠전에 있는 46초소에 들러 준비한 위문품과 위문편지를 전하고 크리스마스 송가를 합창하였다. 또 이런 계획도 물론 서 소위 관련도 있었지만, 그 당시 간첩색출도 상당히 있어 군인들의 고생이 아주 많았다. 국토방위에 노력을 많이 할 때라 시의 적절하게 학교의 허가를 받아 국군위문을 실시하였다.

지금 생각해도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된 것이 결국 서 소위와 상당히 관련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지금까지 그 동기를 만나면 그때 그 모포의 운동장에서 만난 이야기에 꽃이 핀다. 그 장교의 부인은 모교 교육대학 한 해 후배이기도 하였다. 세상 살면서 그 인연이란 어찌 그리도 끈끈한 것인가. 바로 그 선생과 장교 말이다.

15. 모포초등학교의 위상

1973년 5월 1일자로 발령 받아서 어떻게 하면 초등교육을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 빠졌다.

내가 발령을 받아보니 주특기 교육이 체육 분야인 축구종목이었다. 축구감독 겸 지도자로는 A선생님께서 맡고 계셨다. 이미 4월에 축구선발전 등을 치렀다. 그러나 축구대회 참가 전에 부전선수참가로 불상사가 발견되어 해체된 상태이었다. 이 조그만 학교에서 어떤 교육을 해야만 교사로서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인가?

학교는 작지만 할 수 있는 것은 노력으로 찾아내는 것이다. 무엇일까? 또 다시 매일 매일 밤마다 고민하였다. 때마침 한국교육개발원(=KED)에서 연구자료를 배포한다고 하였다. 교육대학을 다닐 때 특별 연구과목에서 "도서관학"과 "현장연구"중 택일에서 연구는 나중에 현장에서 꼭 해야지만 도서관학은 낯이 선 학문이라 "도서관학"을 선택하였다. 학교 규모가 너무나 작아서 "도서관학"은 현재는 별 쓸모가 없었다. 현장연구에 눈을 돌렸다. 아울러 당시 KED에서 현장연구라는 잡지와 함께 신청만 하면 준다는 연구보고서이었다. 회원에 가입하였고, 매월 무료로 서울특별시 서초구 우면동에서 연구보고서가 쏟아져 나오면서 시골 바닷가 작은 학교에 근무하는 나에게 까지 어김없이 10여권의 보고서가 매월 도착하였다. 물론 선배님들에게는 낯이 선 자료 들이었다. 나는 잡지와 함께 이 보고서를 차곡차곡 모았다.

드디어 이론정립이 나에게 정착되어 그 당시에 『배움책(=Work Book)』이라는 우리말의 생소한 용어가 생성되었다. 바로 이것이다. 내가 교육현장에서 해야 할 일이 이것이다.

새 이론의 요약은 이것이었다. 존 듀이의 교육서적 중에 "목표이원론의 분류"에서 모든 교육에서 목표를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한 단위시간의 수업에서 목표를 찾아야 하는 것이었다. 목표는 "행동목표"로 반드시 장기목표와 단기목표가 있으며, 하위 단기목표로 구체적인 행동목표를 설정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자리 수 받아 올림에서 이것을 알면 이후 인간생활에서 모든 합계의 합을 산출할 수 있다." 그렇다. 수학은 왜 배우는가? 결국 인간생활에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일 것이다. 그러면 이것을 한 시간 공부하여 구체적인 목표가 나올 수 있는 학습목표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수업전개가 어려운 것이 자연 과목이었다. 한 학년 과목을 선택하여 연구 과제를 삼아야 했다. "초등학교 5학년 1학기 자연 배움책(=Work Book)"이라는 주제이었다. 물론 이론 무장을 하였고, 아울러 현실적으로 자연과목을 배울 수 있는 배움책 개발에 착수하였다. 이 준비로 1974년을 맞이하였다.

1974년에 "인쇄매체"라는 연구영역도 생소하여 교육청 담당자도 이런 영역을 연구를 할 수 있습니까? 반신반의 하던 시절이었다. 경상북도교육연구원에서 답변이 왔다고 했다. 대단히 선진적 사고를 가진 교사의 생각이고 KED에서 지향하는 뜨는 연구과제이라고 답변이 왔다. 문제는 인쇄매체이므로 글을 인쇄하여야 하는데 당시로는 시골에서 타자를 칠 수밖에 없었다.

결혼후 타자기(=동아 마라톤 타자기)를 구입하여야 했다. 급료가 31,000원일 때 120,000원짜리 타자기를 구입하였다.〔타자기가 4개월치 급료이었다.〕 마침 내자가 타자수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타자치는 것은 내자에게 부탁을 하였다. 이론을 분석하여 자료를 내어 놓고, 배움책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낮에는 수업을 하고, 밤이면 낯 삼아 이론을 쏟아 내어 원고주고, 타자를 치고, 수업진행을 위한 지침서를 만들고 3개월을 고생해서 자료가 완성되어 마침내 포항시교육청 산하 교육자료전에 출품하여 "우량상"을 받았다. 경상북도 교육자료전에 출품하여 역시 "우량상"을 받았다. 참고로 우량상은 3등급의 상이다.

교육자료전에 빠져 1975년에는 새로운 모색을 하였다. 매년 건강기록부를 정리하는데 문제는 담임 혼자서 시력검사를 하는데 힘이 들었다. "자동시력검사기"를 만들려고 시도하였다. 마침 중학교 과학 은사님께 찾아가서 아이디어를 요청하였다. 은사께서 중요한 것은 돈이 가장 적게 들면서 실용성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집에 돌아와 고민을 하였다. 사실상 학교에서 시력검사는 1.5m에서 떨어진 곳에서 한 쪽 눈을 가리고 숫자, 그림, 원에서 어느 쪽이 트인 것인가를 알면 시력검사가 결정되는 것이다. 머리 좋은 아이는 1분 이내 그것을 모두 외어 시력이 상당히 좋은 학생으로 정해지는 것이다.

이를 조사하기 위해서 당시 울산에 있는 유명안과에 갔다. 그 당시에 벌써 프로젝트 기계로 자동시력검사기가 나와 있었다. 그 기계 값이 1,200만원이나 하였다. 나는 교사 한 사람으로 감춰서 지시하고, 확인하고, 시력을 결정할 수 있는 그런 자동시력검사기를 만들고 싶었다.

자동시력검사기의 원리는 대강 다음과 같이 하였다. 파트를 크게 두 가지로 만들었다. 검사기가 자동으로 나와야 하고, 이를 지정·조작할 수 있는 조정기가 있으면 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한 원리는 대단한 아이디어가 숨어 있다.

첫째, 검사기가 있는 곳은 원통을 만들어 시력의 결정 단위별(1.5, 1.2 등)로 지정되고 난 후 나타내어 보일 수 있는 장치와

둘째, 검사기와 2m 떨어진 거리에서 조정할 수 있는 조정기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내용을 설명하니 중학교 과학 선생님이신 은사께서 왈, '이 떨어진 거리를 무엇으로 조정할 수 있는가'가 관건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조정할 수 있는 장치를 연구하여 오면 만들어 주겠다고 하였다.

참 이론은 근사하였는데, 이것이 무엇일까? 집으로 돌아와서 포기하려 하였다. 마침 B선생님께서 일본에 친척이 있어 당시 돈으로 12만 원짜리 자전거를 타고 오셨다. 잽 사게 브레이크를 밟고, 브레이크를 조절하셨다. 바로 저것이다. 자동시력검사기를 만들려면 브레이크 줄이 있어야 한다. 여기까지 이르렀는데, 시골에서 자전거 브레이크를 찾으니 겨우 1m도 안 되었다. 최소한 2m는 넘어야 하는데 자전거 브레이크 줄이 2m가 넘는 것을 파는 곳을 몰랐다. 또 고민에 빠졌다. 마침 대구 처가에 들렀다. 장인께서 고등학교 서무과장을 하셨다.

"뭐 좀 여쭤 보겠습니다. 자전거 브레이크 줄이 필요한데 그것도 긴 줄이 필요합니다. 어디가면 살 수 있겠습니까?"

"뭘 그걸 가지고 고민 하노? 삼덕 네거리에 가 봐라."

하셨다. 정말 삼덕 네거리 윤업사에 들려 보니까 브레이크 줄이 3m짜리도 있었다.

당장 구입하여 만들기 시작하였다.

첫째 원통을 만들었다. 원통 바깥에 다섯 군데 문을 만들고 원통에 브레이크 줄을 연결하여 감았다 풀었다 할 수 있게 하였고,

둘째, 조정기까지 이 브레이크 줄을 가져와서 조정기 위판에 꺾기를 만들었다.

이를 시험하였다. 자동시력검사기 사용법은 먼저 검사자(=담임)가 조정기에서 얼마의 시력 판정치(예: 1.5, 1.2 등)를 보여 주기 위해서 지정한 후 조정기를 꺾은 후 다섯 가지(숫자, 그림, 원에서 어느 부분으로 트임 등) 중에 무엇을 하려는가를 정하면 2단계로 구분한 후 셋째로 두 가지가 결정된 부분에서 검사기창을 열어 주는 것이다. 피검사자가 틀릴 경우 다시 다른 것을 지정하여 열어주면 되는 것이다. 여기서 1.5m 거리에서 이 내용으로 검사를 하는데 문제가 있다. 검사기 안에 전기를 설치하여 밝기(=조도, 룩스)를 정해 주어야 한다. 밝기는 안과 전문의께서 200룩스로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 자동시력검사기로 측정하면 아주 편리하고 교사 혼자서 지정하고, 확인하여 판정하고 기록할 수 있는 장치이었다. 그야말로 외국에서 들여온 1,200만 원짜리 프로젝트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보완하고 준비하여 경상북도 교육자료전(대구명덕초등학교 강당)에 출품하여 "우수상"을 수상하였다. 이 결과로 포항시교육청에서도 "우수상"을 주었다.

1975년 모포초등학교는 조그만 시골학교로서 포항시교육청 우수상, 경상북도교육청 우수상 등 자료전 종합점수 "포항시교육청 4등"을 하여 모포초등학교의 위상을 날렸다.

이후 이 자동시력검사기는 경상북도교육자료전에 전시되었다가 포항시교육청이 인수하여 "포항시교육청학생과학관"에 장기전시를 허락하다가 이후부터는 영구기증을 하였다.

16. 대비정규전 훈련하다

요즘도 간혹 바닷가를 가다 보면 군 철조망이 보이기도 한다. 1973년도만 하여도 동해안 바닷가는 거개가 철조망이 쳐져 있거나 그렇지 않은 곳에는 밤에 매복하기 위하여 모래를 잘 정리하여 둔 곳이 많았다. 철조망에는 빈 깡통이 연속으로 매달려 있었다.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전선 아닌 전선을 느꼈을 것이다. 내륙지방에서만 살다가 이런 광경을 보니 화들짝 소스라치기도 하였다. 밤이면 더욱 통제되는 지역에 살다 보니까 생활이 위축되고 공포의 분위기 속에서 살아 왔다.

간혹 밤이면 군용 터럭이나, 안테나 달린 네모난 검은색 특수차량이 출몰하였다. 혹시 모를 간첩의 통신체크를 위하여 군 수사부대에서 자주 이곳을 순찰, 점검하는 것도 보아 왔다. 밤 10시만 되면 해안가를 통제구역으로 만들어 버렸다.

발령 받기 전에 모포지역에 간첩이 출몰하여 뇌성산 꼭대기에서 학교를 향해 총질을 하여서 교무실 캐비닛에 구멍이 나 있었다. 아직도 이 나라는 휴전하고 있지, 평화가 아니었다. 교무실에 앉아서 회의 때마다 그 캐비닛에 난 총구멍을 현장에서 보고나니 더욱 섬뜩했다. 모포 1리 이장님께서 간첩 잡은 무용담을 들려 주셨다. 열심히 채록하여 정리하였다. 결심했다. 이 무용담을 절대 그냥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 싶어 이야기를 적고, 콘티를 짜고 해서 그림 극을 만들었다.

이름 하여 "모포리 용감한 예비군아저씨 간첩 잡다."라는 제목이었다. 이를 가지고 "반공그림극수업"을 하고 내친 김에 포항시교육청 교육자료전에 출품하여 "우량상"까지 탔다.

일상에서 또 공문이 왔다. 귀교에서는 "매월 대비정규전훈련"을 실시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일을 위해 교전이 붙었다고 가정한다면 학교에서는 제일 우선이 학생대피이고, 다음으로 학적부 반출이었다.

서무업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대비정규전훈련 계획을 세워 실시하여야 한다. 우선 "모포초등학교 대비정규전 상황도"를 그려 두었다. 학적부 반출 준비, 학생이동 대피경로, 인도자 결정 등이었다. 총괄은 교장선생님이시고 현장에는 교감선생님과 교무주임 선생님이 맡으셨다. 실무는 내가 맡았다. 작은 상자를 만들고 그 위에다가 "학적부 반출함"이라 기재하고 교무실 등 학교 열쇠꾸러미를 넣고 훈련을 실시하였다. 이의 실시상황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고도 하였다.

하루는 장기면에 출장을 다녀오는 중이었다. 오후 3시 반으로 기억한다. 금오에서 버스를 내려 학계리(재필)로 걸어오고 있는 순간이었다. 밝은 낮에 갑자기 대포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사격하는 총소리가 가깝게 들리었다. 동해 공해상으로 대포가 날아가는 것이 보이고 시뻘건 불을 뿜어댔다. 조그만 쾌속선이 쏜살같이 공해선상으로 날아간다. 이어서 포항 오천(=해병대 사령부)쪽에서 군 헬기가 연속적으로 날아왔다. 완전히 입체적으로 마치 실전이 일어났나 보다 했다. 군 헬기도 따라가다 공해상에서 사라졌으니 더 따라가지 못하는 가 보다. 아예 대낮에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아마도 계원리 앞바다인가 보다.

나중에 들리는 소리에'계원리 해안가에 비트를 파고 숨어 있던 간첩이 발각되자 몇 명은 죽고, 몇 명이 우리국군 소대장을 쏘고, 쾌속선으로 도망을 갔다'고 한다. 이것이 아마도 전쟁시초일 것이다. 대비정규전 준비가 꼭 필요했다. 준비하면 언제나 안전하다. 대통령의 말씀에도 유비무환이라 하지 않았던가. 미리 준비가 되어 있으면 걱정할 것이 없다. 매월 대비정규전을 훈련하고 보고를 하여야 하는 것이 나를 더욱 바쁘게 만들었다.

이번 달에도 대비정규전을 훈련하여야 하는데 무슨 좋은 이벤트가 없을까 고민, 또 고민하였다. 그러자 선배님 왈,

"이 선생! 매월 반출함만 들고 나오지 말고 M16 소총 좀, 구경할 수 없을까?"

"예. 소총 M16!"

그렇다. 초등학교 동기이면서 해병대 초급장교 서 소위에게 부탁을 좀 해 보자. 사전에 만나서 대비정규전 경각심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이벤트를 하고 싶다고 하니까 흔쾌히 나의 청을 들어 주었다.

수요일 학교가 일찍 파하고,『대비 정규전 이벤트』를 시작하였다. 군에서 서 소위가 M16 소총, 기관총, 유탄발사기, 수류탄 등을 비롯하여 각종 소형장비를 가지고 와서 우리 군의 무기재원과 최대사거리, 유효사거리 등을 설명하여 주었다. 진짜 무기를 보고 홍일점 선배 W여선생님은 아주 놀라워 하셨다. 학교 사진기로 이런 장면을 열심히 촬영도 하였다. 교무실에서 서 소위의 특강을 들으며 더욱 훈련의 강도를 높이고, 호국안보의 강한의지를 보였다.

이번 달 대비정규전은 실감나는 이야기와 장비를 보고 대비정규전을 기관에서 꼭 하여야 하는 필요성을 느꼈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 계원리 해안가의 비트사건도 있었고 이곳이 뒤숭숭할 때 용케도 좋은 기회가 되었다고 교장 선생님께서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바닷가가 아니고서는 겪어보지 못할 것이다. 편입된 예비군훈련도 교사에게 순회교육을 해안가 거주자는 4일간을 훈련하였다. 내륙지방에서는 2일이면 교육이 끝났다. 모두가 바닷가 해안에 근무한 덕(?)으로 안보에 철저히 호응하였다. 모포초교에 근무하면서 대비정규전 훈련을 확실히 실시하였다.

17. 영화기사하다

선생으로 참 복이 많은가 보다. 일 많은 복 말이다. 초임교사를 발령받고 나니 여러 가지로 행운이 따라 왔다. 내가 발령 받을 것이 아니라 여선생님 TO이었는데 마침 내가 발령을 받았다. 시골 초등학교(6학급 규모) 인사 구성상 교장, 교감, 교무주임, 회계선생, 여선생 1명, 남자 선생님 2명인데 여선생님 TO에 내가 발령을 받았다. 단일학급으로 구성된 학교에서는 특히 여선생님이 꼭 필요했다. 운동회 때 무용담당, 양호업무, 또 홍일점으로도 필요했다고 본다. 내가 발령을 받고 나니 교감선생님의 걱정이 태산이었다.

남자선생으로 발령을 받고나니 4학년 1반 담임에 주 업무는 서무, 양호, 자료, 과학, 생산, 도서 업무 등 나열할 수없이 많았다.

첫째 서무업무는 주요공문서 접수 및 수발, 기타업무 담당자가 없을 때 처리하여야 하고, 수시보고통제 공문서는 시도 때도 없이 와서 괴롭혔으며, 졸업증명, 직인관리, 재물조사, 당직배정 등 무수히 많다.

둘째, 양호업무는 지역에 약방도 없었고, 군위생병 출신자가 경영하는 약포 하나가 오로지 있을 뿐이었다. 웬만하면 작은 부상은 양호담당선생이 치료까지 해 주어야 했다.

셋째, 자료업무는 1∼6학년 전 과목에 쓰이는 자료실을 모두 관리 하여야 한다. 게다가 중간놀이 시간을 위한 음악선곡, 체조, 음반관리까지, 심지어 숙직실에 있는 TV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수시로 교육자료 구입과 대장정리, 분기별 자료 확충보고서 제출 등 이런 일들이 중첩되어 있다.

넷째, 부수적으로 과학업무는 실험·실습자료 관리 및 시약·시료관리, 과학경진대회, 교육자료전 등 이의 업무도 만만치 않았다.

다섯째, 생산 업무는 본래 11학급이상이면 새마을주임이 있어야 하는데, 새마을주임이 없으니까 이 업무도 나에게 배정이 되었다.

여섯째, 도서업무다. 교양을 위한 도서뿐만 아니라, 교과서 수급·배정 및 교수학습지도서 관리, 연구보고서 관리 등 무수히 많았다.

크게 나누어 보아 6가지 업무이었으나 이외에도 자질구레한 업무들이 모두 나에게 떨어지고 말았다.

발령을 받자말자 교무주임선생님께서,

"이 선생 공문서 작성할 줄 알지요?"

라고 물으셨다.

"기본으로 작성하는 것은 『학교행정』과목 시간에 배웠습니다."

고 하였더니,

"허허허…. 그래서는 안 되고, 이리 와 보이소."

작성의 기초실무를 보여주시고서는 당부가 있다고 했다. 앞으로 공문이 오면 해당 업무별로 분류하시고, 교무 및 연구업무에 대한 공문이면 접수와 동시에 기안하여 책상 고무판 밑에 넣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시면 공문서 작성 기술이 빨리 익혀질 것이라고 하였다.

정말 그랬다. 매일매일 공문서가 오는데 학급 수가 많던 적던 관계없이 공문서는 교육청이나 협조기관에서까지 똑같이 매일 오는 것이다. 초임에서 교무·연구업무에다가 기안하는 영광(?)을 안았다. 하도 기안을 많이 하게 되니까, 공문서 작성 기술은 일취월장(?)하였다.

본래는 이것이 아니었고, "생산 업무"관련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너무 옆길로 빠졌다.

생산 업무는 원래'새마을주임'이 맡아야 하는 업무인데 정원이 적어서 신참인 내가 맡았다. 교육청공문도 그렇지만, 협조기관인 면사무소나 군청 등에서도 공문이 온다. 공문이 온 것 중에 거창한 공문이 왔다. 당시 유신시대가 막 끝난 1973년이니까, 학부형에게 교양교육을 시키라는 공문이었다.

첫째, 애국가를 4절까지 가르치고,

둘째, 접붙이기 기능을 교육하고,

셋째, 정신교육으로 "제주도 출신의 새마을 사업에 성공한 '돌하르방'이라는 영화를 상영하여야 한다."고 했다.

교육받는 학부형들에게 점심을 대접하여야 한다는 추신도 있었다. 교육을 위한 예산까지 배정이 되었다. 아이구나! 이를 어째, 계획을 세워 실시를 하고, 사진도 촬영하여 결과보고를 하여야 한다. 마침 자료담당자로 포항시교육청에서는 각 면소재지마다 AV기자재센터를 두어서 "영사기 상영기술"을 배워 둔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실시계획을 작성하여 결재 맡고, 지정된 날에 참석할 수 있도록 안내장을 발송하였다. 학교가까이 계신 학부형을 동원하여 점심준비를 계획하고, 면소재인 장기초등학교 AV기자재센터에 영사기와 영화필름을 빌려왔다. 영사기 필름 끼우는 것도 연습하였다. 이제 만반의 준비를 하여 실시만 기다렸다.

초등학교에서 이러한 학부형교육을 맡아서 하도록 한 최초의 공문 발상은 누가 하였을까? 교장선생님의 인사말씀에 이어 연수일정을 설명하고, 1차시에 애국가 4절까지 부르기를 하였고, 2차시에 실습지에서 접붙이기도 실습하였다. 이제 점심시간이 되어 국수를 준비하였다. 오후 교육은 정신교육시간이라서 "돌하르방"영화를 감상하면 되었다.

드디어 솜씨를 발휘하여 필름을 16mm영사기에 장전하고 스위치를 올렸다. 영화가 시작되었다. 바로 문제가 발생하였다. 100V 전기시설인데다가 학교에서 사용하는 전기이며 영사기를 돌리는데 자꾸 끄지는 것이었다. 40명이 앉아서 영화를 감상하여야 하는데 문제였다. 학부형들은 불평한마디 하시지 않으셨다. 시골이라서, 전압이 약해서 영사기가 돌아가지를 않는다. 안 그러면 조금 돌아가다가 서 버린다. 참 난감하였다. 일단 교장선생님께 보고를 드렸다. 그러자 이장님께서 마을회관으로 가자고 했다. 허가를 받아 마을회관으로 갔다.

영사기와 필름을 들고 낑낑거리면서 이동하였다. 온 몸에 땀범벅이 되었다. 칠전 마을회관은 당시에 매우 협소하였다. 40명을 수용할 수 없어서 바깥에 서고, 겨우겨우 영화를 상영하고 학교로 돌아 왔다.

이런 상황에 처해서도 천만다행인 것은 당황하지 않았고, 수료식을 마쳤다. 지나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닐 텐데. 내가 처한 상황이 과연 어떠했으랴. 정말 속으로는 당황하였고 초임에 온갖 일을 나에게 맡겨 두고 선배님들은 속으로 희희낙락(?)하였을 것인가?

학교교사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만 하라면 얼마나 좋았으랴. 교사이기 전에 한 기관의 조직원이고, 그 일원으로서 처리해야 할 잡무가 너무 많았다. 아이들 가르치는 것 1/3, 잡무 보는 것 1/3, 학부형 상대로 1/3이다. 정말 선생을 사표내고 극장이나 차릴까하는 생각이 간절하였다.

어쨌든 나는 초임교사로서 모포초등학교에서 16mm 영사기를 돌렸다는 것이 나의 인생여정에서 가장 커다란 영광(?)이었다.

18. 보리 베기 하다

오늘은 봉사활동을 하는 날이다. 1973년 당시는 유신과업으로 교육기관에서는 매일 무척 바빴다. 국가 정책의 파급효과를 측정하기 위해서는 초등학교에서 확인하는 것이 제일 빠르다고 하였다.

모내기를 하려면 먼저 보리를 베어야 한다. 수요일 오후에 봉사활동을 하여야 하였다. 모포는 보리항구다. 보리항구답게 보리 베기 봉사활동을 하여야 했다. 그것도 초등학생을 대상이다. 모포학구에서는 기관이라고 모포초등학교, 파출소의 지소격인 초소(경찰 2명 근무), 행정으로 모포1리, 2리, 대진리, 학계리(재필)의 이장님이 계시는 것이 전부다.

보리 베기 농촌봉사활동! 4학년이상 전원이 봉사활동을 나가야 한다고 한다. 4학년이래야 이제 6월로, 4개월이 된 고학년이다. 크게 저학년으로 1∼3학년, 고학년 4∼6학년으로 나뉘기 때문이다. 저학년에서 4개월이 된 고학년인 '4학년 봉사활동'을 어떻게 하여야 하나 그것이 걱정이었다. 날카로운 낫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보리를 베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시골출신이라 낫질을 많이 한 축에 들어간다. 소 풀베기. 보리 베기, 벼 베기, 나무하기 등을 오랫동안 해 왔기 때문에 위험을 줄일 수 있지만,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이 아이들 52명을 어찌할 것인가로 걱정이 태산이었다. 학교에서 양호업무도 맡았기로 응급상자와 붕대를 가지고 고학년(?) 농촌봉사활동을 하러 출발하였다.

6학년은 6학년대로, 5학년은 5학년대로 출발하였고, 우리 반은 타 학급보다 인원도 많고 게다가 초보담임(겨우 한 달하고 며칠간)이라고 4학년에는 지도교사가 한 분 더 따라 오셨다. 보리밭으로 지나가면서 왠지 한하운의 보리피리 시가 생각났다.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린 때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ㄹ 닐니~리.

줄지어 보리밭으로 가는데 아이들은 재미가 나는지 곧잘 "꽁당보리밥"동요를 부르며 즐겁게 출발하였다.

꼬꼬댁 꼬꼬 먼동이 튼다. 복남이네 집에서 아침을 먹네. 옹기종기 둘러앉아 꽁당보리밥 꿀보다도 맛좋은 꽁당보리밥. 보리밥 먹는 사람 신체 건강해!

보리를 베어야 하는 밭으로 가서는 이장님의 주의사항을 들었다. 오늘 보리는 일단 밭의 보리를 베어 바닥에 깔아 놓으면 되는 것이었다. 이어서 내가 보리 베기를 시범으로 하였다.

"자! 모두들! 보리는 이렇게 베는 것이다. 아직 여러분들은 어리기 때문에 한꺼번에 많이 잡지를 말고, 적게 잡아서 보리의 밑동에 낫을 넣어 당기면 베어진다. 이 때 낫은 왼쪽 보릿대 잡은 손가락을 주의 하여야 하고, 손가락을 베거나 다쳤을 때는 즉시 논에서 나와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야 한다."

고 설명을 하였다.

남학생들은 소 풀을 베고 한 경험이 있지만 문제는 여학생들이었다. 걱정이 태산 같아 조마조마 하면서도 시행을 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난감하였다.

"자! 지금부터 보리 베기를 시작 합시다!"

우리 4학년 52명이 일제히 보리밭 고랑에 붙어 서서 연거푸 낫질을 해 대었다.

"아야! 피…."

"선쌤요! 여기 손 베었어요!"

"여기도 손 베었어요!"

"여기서도 베었어요?"

"저기도 손 베었어요!"

"저기서도 베었어요?"

마치 모기소리가 앵앵거리는 것 같았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따라오신 한분 선생님은 붕대를 감다가 붕대도 모두 떨어졌다. 할 수 없이 러닝셔츠를 벗어 찢어서 감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감당이 불감당이었다. 이래서는 도저히 진행을 할 수가 없었다. 남학생 중에는 왼손잡이도 제법 있었다. 여학생들은 아예 낫질을 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슨 보리 베기를 한다는 말인가?

"자! 학생들은 모두 논에서 나오세요!"

그래도 안 나오자 호루라기를 불어서 모두 밭둑으로 불러내었다. 그만 중지 시키고 그늘 밑으로 가서 앉아 쉬도록 하였다. 할 수 없이 나 혼자 밭에서 보리를 베기 시작하였다. 모포는 보리가 많은 보리항구라서 그 무덥고 긴 하루에 배당된 보리를 베고 나니 전신이 내려앉고 땀범벅이 되었다.

학생들은 모두 낫을 위험하지 않게 가지고 온 낫집이나, 없는 학생은 헝겊으로 감게 한 후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렇게 선생 둘이 남아서 땀을 뻘뻘 흘리고 오후 참까지 베고 있으니까 그 때 6학년은 배당 받은 보리밭을 모두 베고 돌아오고 있었다.

6학년 선생님 왈,

"아이 구! 이 선생, 고생하네. 그런데 학생들은?"

"(…)집에 모두 보냈습니다."

"아이, 그 저… 말이 고학년이지, 손을 베어서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모두…."

정말 속으로 울먹였다. 아니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얼마나 힘들었는지 나도 잘 몰랐다.

"그래 이것은 무리지. 말이 4학년이지. 3학년에서 올라 온지 이제 넉 달인데 집에서 낫질이나 해 봤겠어. 보리 벤다는 것이 무리지. 여하튼 수고했습니다. 이제부터는 6학년이 한꺼번에 베어 드리겠습니다."

"예? 고맙습니다."

역시 초등학교에 담임교사를 하더라도 6학년 담임을 하여야겠구나 생각하였다. 6학년이 오자 한 이랑씩 들어서서 보리를 베기 시작하였다. 한 이랑씩만 베어도 일시에 누에가 뽕잎을 먹어 들어가듯 솔발솔방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순식간에 세워져 있던 보리가 가지런히 눕혀 버리고 말았다.

모포에서 보리가 많이 생산되는 보리항구 버리꾸지[包衣浦]에서 농촌 보리 베기 봉사활동은 그래도 잘(?) 마쳤다.

19. 퇴비증산하다

참! 1970년대 교사라는 직업은 농촌에서 어렵고 힘들었다. 초임교사로서 업무를 여러 가지를 맡았다. 서무, 양호, 자료, 과학, 새마을(생산, 학부모 계도) 등 업무가 이래저래 겹치기도 하였다. 6학급 규모에서는 새마을 주임이 없어서 새마을업무를 내가 맡았기 때문에도 일이 더욱 번잡스럽게 많았다. 새마을업무는 대개가 면사무소에서 오는 공문으로 처리하고 보고하여야 하는 것이다.

파리잡기, 모기잡기, 퇴비증산, 시범 묘포장 관리, 학부모 계도에는 애국가 교육, 새마을정신교육용 영화(16mm)상영, 생활개선 등 부과되는 일이 학교선생이기 전에 잡무가 쏟아졌다. 그것도 모두 실시한 후에 사진을 찍고 일목요연하게 보고서를 만들어 발송하여야 했다.

이 새마을업무를 하면서 우스개 이야기가 하나 있다. 면장 명의로 공문이 왔다. 담당 선생님이 바빠서 실시하지 못하고 보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면장이 학교를 찾아와서 교장선생을 찾으니 마침 출장을 갔다고 하니까, 이제는 교감선생님을 찾으셨다. 교감선생님이 나오셨다. 면장과 만나게 되었다. 그러자 다짜고짜로 교감선생님의 뺨을 때려 버렸다.

교감 선생님 왈,

"왜 나를 때립니까? 이렇게 때릴 수 있습니까? 급수가 높아도 내가 높을 낀데."

그러자 면장 왈 서슬이 시퍼렇게,

"그래? 왜 못 때려. 당신은 감이지만, 나는 장이기 때문에 때렸다. 왜? 내가 왜 못 때려?"

적반하장이지. 교원은 별정직이고, 아울러 급수가 교장선생님이 한참 높으며, 아울러 교감선생님도 급수가 높다. 면장이래야 당시 4급 을직 사무관(오늘날 5급)이다. 정말 웃지도 못할 해프닝을 벌리고도 행정이랍시고 하고 있을 때였다.

또 퇴비증산으로 우스개 이야기가 전해 왔다. 대통령께서 청하 보경사로 방문이 있었는가 보다. ××면 어디 마을이지 싶다. 관광지라서 분명히 대통령께서 퇴비증산에 관심을 보이실 거라 생각은 했다고 한다. 급하게 퇴비증산을 한다고 마을 어귀에 퇴비장을 만들었다. 그런데 정상적으로 할 일이지. 물론 갑자기 퇴비를 모으려니까 힘은 들었겠지. 꾀를 내었다고 한다. 산에 소나무를 아름 채 베어다가 속에다 쌓고 정말 거나하게 퇴비를 겉에다 발라 쌓아서 대단한 퇴비증산의 시범지처럼 만들게 되었다. 드디어 대통령이 지나가면서 유별나게 퇴비를 잘 만들어 둔 것을 보시게 되었다고 한다. 대통령께서는 마냥 흐뭇해하면서 반드시 현장을 확인하시는 것이었다. 퇴비가 잘 쌓아진 현장에 도착해서 속을 헤집으니까 과연 퇴비가 그 속에까지 있었겠는가. 담당공무원은 즉석 징계를 받았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런 얘기를 듣고서 아무 일없이 넘기려면 보고를 잘 해주어야 하는 시대이었다. 사실 학교와 면사무소 사이에 위계가 어디 있으랴. 기관으로서 협조할 수 있는 것은 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지 않는가. 면사무소에서 온 공문도 있고 해서 학교에서 퇴비의 양을 채워 두어야 했다.

자유학습의 날에 퇴비를 모으기 위해서 고학년이 동원되어 풀베기에 나섰다. 풀베기는 위험요소가 있었다. 무성한 풀을 덥석 베다가는 그 속에 뱀이 나오거나 그렇지 않으면 말벌이 나오기 때문에 세심한 준비와 응급약품을 반드시 지참해서 가야했다.

집에서 가져 오는 것은 1인 한 자루의 낫과 장갑, 새끼를 약3m 정도를 준비하라고 했다. 고학년이 출발하여 지역 하천가 제방에서 풀을 베기 시작하였다. 응급약품을 준비하여 갔는데 다행스럽게도 아무 불상사가 없었다.

모두가 풀을 베어 새끼로 묶어서 학교 퇴비장에 가지고 왔다. 남학생들은 어께에 짊어지고 오고, 여학생들은 머리에 이고 오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이 또한 장관이 아니랴. 그리고 퇴비를 갖다 잘 쌓아 두었다.

매일 공부하던 학생들은 방학이 되어 모두 각 가정으로 돌아갔다. 나는 업무상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 퇴비장에 가 보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고학년 전체가 그렇게 많은 풀을 베어다가 퇴비를 만들어 두었는데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어졌다. 풀이 삭아서 모두 녹아버렸다. 퇴비가 되려면 풀만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일을 어찌하나?

고용원 아저씨 왈,

"방학이 끝나는 동시에 면에서 퇴비증산 심사가 있다."

고 일러 주었다. 이제 큰일이 났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풀을 베어다가 퇴비장을 만들어 두었는데 모두가 삭아 없어져 버리고 심사는 온다고 하니 이 일이 큰일 아닌가?

어쩔 수없이 교장선생님의 허가를 받아서 비상연락망을 동원하여 학생 1인당 2Kg씩 퇴비를 베어 오라고 했다. 등교하는 첫날에 풀을 지고, 이고 또 오게 되었다. 이 모두가 초자선생의 업무 미숙의 탓이었다. 새로이 퇴비장을 만들고 수선을 떨어야만 했다.

풀을 끌고 와서 퇴비를 만들어야 되는 곤욕을 상상해 보라. 이 일을 하기 싫다고 하지 않을 수 없으며, 무던히 참고 국가시책에 공공기관으로서 협조를 하여야만 했다. 내가 업무 잘못하면 나도 면 직원에게서 뺨 맞으랴.

풀을 베어모아 묶어 학교까지 가져오기가 그 절차며 그 수고로움이 어떠하였겠는가? 그 당시로서는 아무도 불평 없이 모두가 국가시책이라는 새마을정신으로 그저 꿋꿋이 지킬 수밖에 없었다.

20. 논두렁콩 심다

1974년 면사무소로 부터 온 공문은 논두렁콩심기 지원을 나간 후 그 실적을 보고하여 달라는 것이었다. 이 또한 대통령의 농촌에 대한 대단한 정부시책이었다. 왜냐하면 한 치의 땅도 귀중한 시대였다. 논에 모만 심어 둘 것이 아니라 논과 논 사이에 논둑이 있어서 둑이 물만 가두는 역할이 아니라 그 둑에 무언가를 생산하여야 한다는 취지이었다. 즉 이 취지가 어린 학생이 있는 개개인 가정마다 어릴 때부터 머릿속에 심어 주라는 의미가 부여 되어 있었다.

어려서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고 초등학교 운동장에 호박과 배추를 심은 적이 있다. 물론 이를 잘 가꾸어서 가정마다 호박과 배추를 조금씩이라도 나누어 주었다. 이는 그것의 생산만으로 다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작은 공간에도 그냥 두지 말고 무엇인가 생산을 하여서 가정에 도움이 되라는 의미일 것이었다.

아무도 불평 없이 또 자유학습의 날을 이용하여 모내기가 끝난 논두렁으로 동원이 되었다. 이러한 일도 이장님과 함께 동원되어 지정하는 논두렁에 콩 심기를 하여야만 했다. 논두렁콩심기는 단단히 주의하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무논에 빠지기는 예사고, 문제는 논두렁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을 수 있으며, 심어 놓은 모도 헤치기 십상이다.

이장님께서 학생들을 불러 모아 놓고 "논두렁콩심기 시범"을 보여 주셨다. 먼저 논두렁의 흙이 손으로 잘 매만져 있는 둑에 작대기로 일정량의 간격으로 구멍을 뚫고 먼저 지나가면 뒤따라가는 사람이 한 구멍에 논두렁 콩 2∼3알씩을 넣어주어야 한다.

이제 학생들이 논두렁 콩 심기를 시작하였다. 정작 많은 학생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작대기로 구멍을 뚫고, 따라가면서 콩을 2∼3알씩 넣어 주면 되는 것이다. 주의할 점은 구멍을 뚫는 사람이 적당한 깊이로 뚫어 주어야 한다. 작대기에 깊이 한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헝겊을 묶어 주었다. 그 깊이만 눌러주면 되는 것이다. 이제는 몇 조를 나누어 논둑 중간마다 시작하여 일을 빨리 마치도록 해 주었다. 할 일이 없는 아이들은 장난도 치므로 논두렁콩심기 현장을 견학하도록 줄 지어 앉히었다. 그러자 체계도 있고 현장관찰공부가 되었다.

요즘은 밭에 콩 심을 때는 기구로 하여 혼자도 심을 수 있다. 좋은 세상이다. 농기구는 이렇게 편리하게 발전하였다. 구멍 뚫고, 콩이 내려오고, 뒤에 롤러에서 묻어 주고 일목요연하게 혼자서도 콩을 잘 심을 수 있다. 우리나라의 과학이 농기구까지 이렇게 만들어 많이 발전하게 되었다.

안 된다고 손 놓고 가만히 앉아만 있을 것이 아니라 움직이고 연구하고 생각하면 없던 돈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 작은 종자돈으로 또 그 생산을 늘리게 되면 급기야는 큰 공장까지 운영할 수 있는 것이 새마을정신이다.

점심시간에 배곯았던 지난날 우리 시대를 보라! 지금은 세계경제를 주도하고 그 원동력이 되지 아니한가? 논두렁에 콩 심기까지의 생각이 중요한 것이다. 작은 일이 큰일을 만들어 주게 되니까 그러한 것이다. 그것이 잘 살게 될 수 있는 힘이다. 모포초교에 발령을 받아서 많은 것을 경험한다. 논두렁에 콩 심기를 체험하고 그 현장을 관찰학습까지 하였다.

21. 피사리하다

또, 면에서 공문이 왔다. 피사리에 협조하여 달라는 내용이었다. 계획을 세워 고학년(4∼6학년)은 수요일에 또 동원하여야 했다. 초등학교이면서 곧잘 정부시책에 동원이 되었다.

피사리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는 "농작물에 섞여 자란 피를 뽑아내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면 피사리 하는 이 식물의'피'란 무엇인가? 벼와 같이 자라지만 나중에는 월등하게 자라서 벼 생육에 방해가 된다.

피는 외떡잎식물인 벼과에 속하는 1년생 초본이다. 키는 1m에 이르며 뿌리는 깊게 내린다. 잎은 벼의 잎과 비슷하지만 잎혀와 잎 귀가 없어 구별된다. 꽃은 8 ~ 9월경 줄기 끝의 수상꽃차례에 무리 져 피고, 이삭의 길이는 10 ~ 30㎝이며, 낱 꽃에 까락이 있거나 없다. 열매가 맺힌 이삭은 조와 비슷하지만 조보다 좀 엉성하고 암 황갈색을 띤다.

논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모판에서 아예'피사리'를 한다. 왜냐하면 2∼3포기로 모내기를 하는 데 잘못하면 이앙 후에 논에 자라면서 벼 생육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이 방해가 어느 정도인가 하면 논에 벼가 보이지 않고 새카맣게 피만 올라 와 보인다. 그 논벼는 폐농이 된다. 옛날에 가뭄이 들면 벼는 물이 없어 죽어도 이 피는 끝까지 살아남아서 시골에서는 "피 논"이라고도 한다.

어려서 아버지의 명령으로 모판에서 피사리를 하여 보았는데 정말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모판에서 피사리를 잘못하면 모종인 벼를 다 뽑아 낼 수 있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웠다. 모판에 피사리를 할 줄 알면 농부가 다 되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모판에서 피사리를 하려면 어지간히 자세하게 관찰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도 햇볕이 쨍쨍하게 나서 똑같이 생긴 모판에서 천천히 관찰하면서 특이하게 드러나는 피를 골라서 뽑아내어야 한다. 얼핏 보면 그놈이 그놈 같다.

학생들의 피사리는 모내기를 하여 벼가 논바닥에 자라고 있다. 이미 피키가 더 큰 것을 제거하려는 것으로 '피사리'라고 한다. 즉 이미 벼와 함께 자란 피를 제거하여야 내년 농사에 방해가 되지 않으며, 피가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으면 늦기 때문이다. 피가 열매를 확산시키면 다음 해 논농사에서 다시 자랄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이러한 피사리를 학생들까지 동원하였나? 본래 논농사를 하면서 소득이 너무나 적었기 때문이다. 소득을 줄이는 역할을 이 피도 한 몫을 했기 때문이다. 모판에서 못한 피사리를 크게 자란 후 벼와 구분이 잘 될 때 일손이 부족한 논부터 동원하여 이 피를 제거 하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말이 4학년이지 아직 어린아이인데 피사리를 어떻게 하여야 하나 오늘도 이장님이 함께 하셨다. 오늘 하는 일을 설명 하셨다.

"여러분! 이곳은 우리 동네에서 농사짓는 곳입니다. 여러분들! 보십시오. 벼보다 높이 자란 놈이 '피'라고 하는 것인데 이것을 뽑아내면 됩니다. 뽑은 것은 반드시 밖으로 가지고 나와야 하며, 그 자리에 버리면 안 됩니다. 그리고 벼를 다치지 않게 조심하여야 합니다."

주의사항을 마치고 아이들은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무논으로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아이들은 신나하면서 피를 뽑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도 여학생은 어려워하고 힘이 모자라서 피를 잘 뽑지도 못한다. 정말 힘든 봉사활동이다. 물론 국가에서 이 초등학생까지 동원하여야 하는 정부시책도 그렇지만 이를 실행하러 나온 나도 힘들어 하였다.

시간이 흘러갔다. 남학생들이 뽑고 여학생들이 들고 나오기 시작하였다. 큰길가에는 뽑혀진 피가 수북이 쌓이기 시작하였다. 자꾸자꾸 쌓였다. 정말 이 학생들이 얼마큼 도움이 되랴 했는데 막상 해보니 많이도 뽑아내었다. 이것이 봉사활동의 묘미이기도 하였다. 고사리 손이 정부시책에 실적을 올리고 있었다. 한창 피사리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데 자전거 한 대가 급히 오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오면서 인사를 꾸벅하였다.

"아이 구! 선생님 수고하십니다. 모포초등학교 학생들이 피사리 봉사활동을 나오셨구만요?"

"아, 예. 누구십니까?"

"면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요. 우리가 할 일은 우리가 하지요."

"그래도 학생들이 잘 하고 있습니다."

"예?"

이런 얘기를 하면서도 속으로는 불만이 없을 수 없다. 말이 고학년이지 이제 4학년을 남·여학생 52명이 혼신을 다 하고 있었다.

피사리는 아주 간단하지만, 어린 학생을 동원한다는 것이 못내 미안하였다. 이런 일을 겪고 나니 "피사리"라는 것을 흠뻑 느꼈을 것이다. 이것이 1973년의 피사리 농촌봉사활동이었다.

22. 초등교사의 출장애환

이제 발령을 받은 지 3년차이다. 그리고 6학년도 맡았다. 열심히 가르치고, 열심히 교사생활을 하였다. 나는 특히나 이 학교에 처음 발령을 받아서부터 4학년을 받아서 그 학생들을 5학년, 그리고 6학년까지 지속적으로 3년간 담임을 맡았다. 아울러 결혼도 하여 가정이 있고, 아들까지 낳은 상황이었다. 그저 모두가 살아가는 진행(?)이 잘 되고 있었다. 나는 열 번째 막내로 이제 자리를 잡아서 아내와 아이와 함께 그것도 바닷가에 작은 초교에 발령을 받아서 열심히 근무하고 살았다.

경주 고향에서 어머니께서도 가끔 들리셔서 고마웠다. 내자도 어머니를 좋아하였다. 늦게 낳은 막둥이와 손자도 보시고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몰랐다. 그리고 맡은 업무도 나날이 더해 갔다. 일요일도 없이 학교 일에 매달렸다. 그리고 성취하였다. 아니 맡은 일에는 최선을 다 하였다. 교사이면서 행정을 모두 도맡았다.

출장이 잦았다. 6학년 담임으로서 어느 달엔가 확인해 보니까 30일 기준에 일요일 빼고 26일 근무 중에 출장이 자그마치 17일! 학생들 공부는 언제 가르치랴! 65%가 출장이다. 물론 출장도 하루 종일 가야 되는 것도 있지만, 잠깐 면소재지로 사진 현상하러 갈 때도 있다. 출장 가지 않은 날이 거의 없다.

한번은 아침밥을 거르고 첫차로 포항시교육청에 출장을 갔다. 그날따라 비가 왔다. 모포의 유명세가 있는 땅고개! 땅고개는 유명하였다. 왜냐하면 '모포 처녀가 시집을 가서 10년 살아도 한번 붙은 고무신의 흙은 떨어지지 않는다.'는 그 유명한 땅고개 흙이다. 출장을 간다고 구두를 깨끗하게 닦고 나왔는데, 그 땅고개 흙이 달라붙기 시작하여 온통 내 구두에는 밑바탕을 넘어 구두 위까지 올라 앉아 흙 구두가 되고 말았다. 버스에 오르기도 민망할까 보아 정류소에 기다리면서 무덤 옆 잔디에 구두를 닦고 또 닦았다. 그래도 완전하지를 못해 버스를 타면서 버스기사 눈치를 안볼 수가 없었다. 포항에 도착했다. 문제는 회의시간이다. 급히 택시를 타고 교육청에 들렸다. 회의장소가 바뀌었다. 또 급히 택시를 타고 당시 중앙초등학교 강당으로 들어갔다. 웬걸 학무과장님의 훈시가 있었다. 훈시 중에 들어갔으니 훈시를 중단하고서는,

"방금 늦게 들어오신 선생님은 어느 학교 선생입니까? 회의에 오시는 분이 정신이 빠져서 이렇게 늦게 오시다니 되겠습니까? 새마을정신이 빠졌습니다. 빠졌어, 나중에 보고하십시오."

억울했다. 시골초등학교가 있는 것을 모를 리 없겠는데, 그렇게 혹독하게 나무라시니 정신이 확 들었다. 아침도 굶고, 비오는 날에 흙과 사투를 하면서 버스를 타고, 택시타고 해도 늦는 것을 어찌하랴. 개인적이라면 몰라도 공무 출장을 와서 내가 늦게 도착했으니 당연히 들어야할 소리쯤으로 치부하고 말았다. 명색이 교육청 학무과장님이 시골교사의 항변을 받아 줄 것인가?

또 출장비는 문제 중에 문제이었다. 출장비는 "공무원의 출장 여비는 법령(공무원 여비규정 제28조-여비의 조정)에 의거 각급기관장의 책임 및 재량 하에 예산의 범위 내에서 지급하도록 되어 있으며, 해당 공무 여행시 여비의 전부 또는 일부항목의 지출이 불필요하거나, 해당 정액보다 적게 소요되는 것이 명백한 경우에, 여비지급액이 예산의 범위를 초과하는 경우에는 여비의 정액을 감액하거나 여비의 전부 또는 일부를 지급하지 아니 할 수 있다. 이러한 여비의 조정 및 지급결정은 각급 기관장이 결정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물론 그 당시는 이런 법령이 있는 것조차 몰랐다. 그저 교감선생님이 확정하여 경리선생님이 돈을 주면 받는 것뿐이었다. 예를 들어 포항까지 왕복 시내버스비가 160원인데 출장비라면 하다못해 최소한으로 버스 왕복 차비 320원은 주어야 할 텐데, 출장비라는 게 고작 250원이다. 이것도 감지덕지다. 출장비 예산이라는 것이 3개월마다 배정되어 오는데, 분기(3, 6, 9, 12월) 초에는 교장, 교감선생님이 출장을 자주 가시면서 출장비를 모두 받아 가 버리면 분기 말에는 이마저 출장비가 없다.

그것도 교장·교감선생님의 출장 책정비는 관내 1회 1,000원씩으로 많이 배정해 주고, 교사가 출장을 가면 겨우 250원이다. 실비도 아니고 아예 실경비인 차비왕복비도 모자라는 금액이다. 지금에서야 겨우 알았다. 기관장이 결정하는데,『여비 지급액이 예산의 범위를 초과하는 경우에는 여비의 정액을 감액하거나 여비의 전부 또는 일부를 지급하지 아니 할 수 있다.』하였다. 이것이 법령이요, 법(法)이다. 그러면 평교사는 무엇인가 박봉에 공무 출장비까지 뜯어 가다니. 출장비가 적다고 하면 교감선생님은 이 법령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쉽게 말해서 법을 최대로 이용하는 것이다. 그것이 현실이었다.

바로 억울하면 '출세하라.' 그래서 나는 회식이 있어서 노래를 하라면 반드시 "회전의자"를 불렀다.

(1절)빙글빙글 도는 의자 회전의자에 임자가 따로 있나 앉으면 주인인데 사람 없어 비워둔 의자는 없더라. 사랑도 젊음도 마음까지도 가는 길이 험하다고 밟아버렸다. 아~ 억울하면 출세하라. 출세를 하라.

(2절)돌아가는 의자야∼ 회전의자야 과장이 따로 있나 앉으면 과장인데 올 때 마다 앉을자리 비어있더라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보자고 밟아버린 젊음을 즐겨보자고 아∼ 억울해서 출세했다. 출세를 했다.

이것이 시골학교 교사의 출장애환이다. 또 사무(私務)는 교장, 교감선생님께서 하셨다. 얼마나 고마운지(?) 모를 일이다.

제3부 청춘을 묻으며

23. 당직 몰아하다가 아버지 여의다

나는 열 번째로 태어난 막내다. 아버지 51세, 어머니 44세에 나를 낳아 주셨다. 형님 네 분, 누님 다섯 분으로 모두 윗분이시고 나는 막내다. 흔히 남들은'열 번째 막내는 얼마나 행복 하였을까?'라고 하는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에 아버지께서 회갑을 맞이하셨다. 1959년이었다. 오래 살지 못하는 시대였었다. 예순 하나가 되면 회갑이라 하여 성대한 잔치를 하는 것이 사회적인 관례이었다. 회갑연에 시골에서는 집집마다 부조를 가지고 오는데 현금은 없으며 거개가 현물이었다. 부조기에 본동 김××댁 감주 1동, 본동 이××댁 탁주 1동 등이라고 적었다. 마치 향약두레로 보인다. 회갑연에 모두가 돈을 내지 않고 이러한 예물을 들고 오시는 것이 부조인 시대였다.

막내라서 장가를 일찍 들여야 한다고 하셨다. 일찍 결혼한다는 것에 뜻이 별로 없었다. 나는 초등학교 교사를 하면서 중등준교사 국어시험을 보아서 중등교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초교 교사로 부임한 첫해에 그 뜻을 펴기 위해서 겨울방학 당직을 일찍 당겨 정해서, 빨리 마치고 대구 학원에 등록할 생각으로 당직(일·숙직)을 당부하여 방학 앞 일정에 몰아 두었다. 방학이 되자 다른 선생님들은 모두 고향 가고 휴가를 가고 하셨다. 당직 15일간을 당겨 모아 하루하루를 근무하고 있었다.

1973년 12월 21일에 전보가 날아들었다.

"부친상급래."

당시로서는 초교에서조차 전화가 없을 뿐 아니라, 이 전보가 최고의 통신수단인 시대이었다. 설마 그렇게 건강하셨는데 아버지가 돌아 가셨겠나 아니겠지. 그냥 흘려보냈다. 그런데 당직을 근무하고 있는데, 또, 전보가 왔다.

"부친상급급래."

설마 나의 아버지가 진짜 돌아 가셨겠나 아니시겠지, 또 그냥 흘려버렸다.

이튿날 전보가 또 왔다. 이번에는,

"부친상급급급래."

아니 이게 정말일까? 벌써 전보를 3통이나 받고 보니 당황하고 황당했다. 전보를 치고, 받는 사람의 문자 표기가 부정확하였다. 그래도 자꾸 전보가 오니까 반신반의하면서도 교무선생님께 당직을 당부하고 땅고개로 올라가서 버스에 몸을 실었다.

경주시외버스주차장에 내리는데, 질녀가 포항 가는 시외버스를 타려는 찰라 였다. '아차! 기어이 아버지께서 돌아가셨구나.'하고 그제야 겨우 정신이 확 들었다.

"야! 희야 어디 가니?"

유일하게 내가 근무하는 이곳 모포를 알고 찾아 올 수 있는 사람은 백형의 큰딸인 큰 질녀뿐이었다.

"삼촌! 삼촌 아이가? 그래. 여태껏 뭐하고 있었노? 응? 와~ 이제 오노."

"와? 무슨 일이 일어났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카이.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전보를 몇 번이나 쳐도 안 오고…."

질녀가 생각해도 내가 한심하여 보였는가 보다. 질녀지만 나와는 세 살 차이로 대화가 마구 되었다. 전보를 혹시 못 받은 줄 알고, 다시 전보를 치다가, 치다가 그래도 안 오니까, 이제는 직접 찾아가는 중이었다. 요즘이야 휴대폰도 있지만, 그때는 기관인 학교에서조차도 전화가 없던 시대였다. 시대가 시대인만치 정말로 아날로그인 그런 시대이었다.

집에 도착하니 마을입구부터 시끌시끌하게 북적되고, 벌써 여러 장의 만장들이 펄럭이었다. 들판에까지 천막이 쳐지고, 친지들이 많이 와 계셨다. 또 이웃사람들로 북적이었다. 친지들은 재․종반 외에도 삼종, 사종까지도 많았다. 아버지 재․종반이 스물여덟 집이나 되니 정말 많았다.

늦었지만, 돌아가신 아버지를 뵈었다. 궁금했던 것은 평소 편찮으시지도 안했으며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를 여쭤보았다. 숙형께서 알려 주셨다. 그렇지 않아도 초겨울이 들면서 아버지는 사흘 동안이나 감기를 하셨다고 한다. 그 날도 백형, 중형, 숙형 등 세 분이 같이 자리를 했다고 한다. 계형은 멀리 경남 충무 한산도에 돈 벌러 가셨고, 막내인 나는 시골초교에서 선생 한다고 못 왔다. 오전에 세 분이 모여서 기다리는데 아버지 왈 바쁜 사람들은 일하러 가라고 말씀을 하셔서, 백형은 시장에 나가시고, 중형은 앞산에 나무하러 가셨고, 숙형 혼자만이 그래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하셨는지 아버지 곁에 종일 계셨다고 한다. 덕분으로 숙형만이 종신을 하셨다.

어떻게 보면 아버지께서는 참 건강하셨다. 우리 열 자식뿐만 아니라, 큰 집, 작은 집 등의 조카, 질녀 모두를 혼사시키셨다. 큰아버지는 일찍 돌아 가셨고, 작은 아버지도 회갑 전에 돌아가셨다. 하기는 할아버지도 예순 전에 돌아 가셨으니 단명 집안이었다. 그래도 아버지만큼은 집안에서 최장수를 하셨다. 당년 일흔 여섯에 운명을 하셨다.

나는 눈물 한 방울도 나지 않았다. 셋째 누님께서는'아이고! 저것 봐라, 저거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네.'라고 나무랬다. 사실 나는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눈물이 안 나온 것인지, 매몰차서 눈물이 없었는지.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스물다섯 살 총각만 두고 가셔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약 한 첩 올리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아파 했을 뿐이다.

하기는 막내를 두고 초등학교 입학 전에 서당 다니고 신학문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초교 졸업하고 또 서당에 2년간 다녔다. 독학으로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 입학하려고해도 또 신학문을 하지 말라고 말리셨던 아버지, 그래서 직접 돈 벌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려는데 끝까지 말리시던 아버지라서 그랬는지. 정말 나도 모르게 아버지와 나와의 거리가 있었고, 대학을 다니면서 하루 5시간 아르바이트에 3시간 군대훈련, 아침 끼니를 직접 끓여 먹어야 하고, 점심은 굶다시피 저녁은 아르바이트 집에서 만찬을 얻어먹고 돈 벌고, 공부하기에 내가 너무나 지쳐서 그런 거리감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나 늦은 도착으로 아버지 장례일정은 하루를 늘인 4일장으로 치르게 되었다. 그것도 경주에서 50년 만에 추운 맹동, 영하 14도 날씨인 1973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날이었다. 장례를 치르고 난 후 어머니께서는 나를 안 보려고 돌아 앉으셨다. '그렇게 네 아버지 살아 계실 때에 장가를 가라고 했는데, 말 안 듣는 자식은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난감했다. 어쩔 것인가? 나의 뜻을 굽힐 것인가? 굽히지 않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많은 불효를 저질렀다. 막내 자식을 결혼시켜 놓고 편안히 눈감으셨으면 좋았을 것이다. '부모님은 나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나무는 고요히 있고자 하여도 바람에 흔들리며, 효도를 하고자 하나 부모님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것을 왜 몰랐던가? 아주 늦게야 알았다. 나 같은 경우는 막내로 부모님이 나를 기다려 주실 수 없는 것이다.

6학급 규모에서 50여 일간이 넘는 긴 겨울방학! 이의 관리를 위하여 선생이기 전에 당직자로 일․숙직을 하여야 했다. 정말 선생이기 전에 양 어께에 무거운 중압감이 가득했다. 당직자는 학교시설을 보호하고, 공문서를 처리하여야 하며, 어려운 업무가 있을 시에는 담당 선생님을 또 호출하는 것이었다. 정말 교사로서 국가공무원으로서 그 책임이 막중하였다.

아버지를 여의고, 아니 돌아가시고서 많은 갈등이 왔다. 중등준교사 국어선생님의 꿈을 버렸다. 결국 그 갈등이 오래 가지 못하고 1974년 2월 25일 종업식 하고 나서, 선보고 그해 4월 20일에 결혼하고야 말았다.

"아! 아버지! 나의 아버지! 죄송합니다."

땅을 치고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응당 결혼은 할 것인데 그 타이밍이 문제이었다. 같은 값이면 붉은 치마라고 하였는데, 아버지 살아계실 적에 결혼을 하였더라면 나의 인생이 달라졌을까? 지금도 이의 갈림길에 누가 답을 옳게 해 줄 것인가?

결혼인 인륜지 대사를 놓고, 아버지를 여읜 자식으로서 나의 지론과 모포초등학교의 당직과 공직으로 얽매인 몸으로서 판단이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옳았는가는 오늘도 자꾸 의문이 생긴다.

24. 숙직실에서 계형 만나다

지금은 세상이 모두 참 빠르고 편의하다. 삶에서 상당한 선진국형으로 진입하면서 도로 포장과 교통의 편리, 개인의 통신이 극도로 발전되어 살기 좋은 금수강산의 대한민국이다. 집들도 건축재가 수입되고, 언덕 위에 그림속의 동화처럼 집 짓고 살게 되었다.

간혹 시간이 나면 대포도로(대구-포항고속도로)를 통하여 포항 북부시장 입구 포항 물회집에 들러 한 그릇하고, 포스코를 지나 부추의 고장 청림, 아니 청포도가 주저리주저리 열리는 청림을 지나 도구, 약전, 흥환, 구만리, 호미곶을 거치며 석병, 강사, 구룡포 해수욕장, 그 옛날 고래 해체작업을 하던 구룡포항, 삼정, 구평을 지나 모포에 간다. 그렇게 자가용을 타고 질주를 하여도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는다. 하기는 칠전, 대진, 신창, 앙포, 계원, 두원, 연동, 오류 감포 해수욕장을 지나 전촌, 팔조 고개를 넘어 노동, 양북면 어일, 와읍, 토함산이 보이는 곁으로 경주 관해동(觀海洞) 추령(秋嶺)을 넘어 덕동, 천군 보문호를 지나면 경주를 통과하고 건천, 영천, 경산을 지나서 대구로 들어선다. 휴우! 세월 한번 좋다.

요즈음 이렇게 좋은 세월에, 좋은 세상에 살아간다. 내가 근무하던 모포초등학교는 정말 바닷가 오지 중에 오지이었다. 교통이 불편하여 잘 찾아오지 못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아파도 약을 살 수 없던 그런 곳이었다.

1973년 5월 첫 발령을 받고서 나의 청춘과 정열을 모두 바치었다. 학습지도와 출장과 학내 담당업무와 또 퇴근 후 교사간의 화목과 방문해주시는 학부형과 교장 선생님, 교감선생님의 지시사항, 교무주임선생님의 업무지시 등도 모자라서 학년간 예체능 수업(나는 풍금 치는 음악학습)협조까지 가리지 않고 무엇이고 적극적으로 무서우리만치 처리하였다.

모든 것을 처음 경험하는 것이라 싫어하지 않고 마다하지 않고 무조건적 헌신으로 진행하였다. 심지어 자료실 관리에서도 몇 십 년이고 묵은 때를 모두 닦아 내었고, 도서실 업무에도 모든 책을 쓸어내리고 닦고, 조이고, 떨어서 새로 설치하다시피 하였다. 뿐만 아니라, 두고두고 놓아 둔 묵은 때를 떨어내었을 때 한편으로는 속이 후련하였다. 수업에도 열심히 하여 너무 열심히 하여 기어이 목이 부었다. 야간에 과외로 1, 2, 3학년 내용의 도구학습인 위계수업을 맡아 지도하였다.

침도 넘기지 못했다. 먹지도 못했다. 아니 찬물도 넘기지 못했다. 이를 어찌하여야 하나? 그래도 현장수업은 바로 들어가야 하고, 목이 아파 소리를 내지 못하고 판서로 대치하고 설명은 다음으로 미루었다.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이제는 기운이 없어서 걷지도 못했다. 이러한 마당에 교무주임선생님이 오셨다.

"이 선생! 이러면 안 되지, 죽지. 아니 끝나지. 오늘은 좀 쉬어 봐!"

"…(소리도 내지 못하고 고개를 꾸벅하면서 예로 대신함)."

드디어 쓰러졌다. 반장이 소리치고, 교무주임선생님이 다시 오셨다. 나를 숙직실로 데려갔다. 이제 비로소 눕혔다. '아! 모든 사람은 이래서 죽는다. 나도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도 죽는다.'삼단 논법이 따로 없었다. 내 몸이 쓰러지라고 달려드니 기어이 쓰러지고 마는구나. 죽는구나. 숙직실에 누워서 이불을 덮고 있으려니 더욱 쓸쓸했다. 여학생 부반장이 떠다 준 냉수 한 주전자! 냉수만 동그마니 남아 있었다. 서글픔에 못내 눈에 눈물이 고였다. 장가도 못가고 총각 귀신이 되는 구나. 내가 왜 이러나.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선생이기 전에 행정 사무원이요, 선생이기 전에 경영관리자요, 선생이기 전에 사회 조직원이었다. 이 모두를 떠안고 가야 하는 '선생이란 직업'이 주어진 긍지만으로는 해결하지 못하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야 하는가. 왜? 너무 힘들었다. 이 직업을 어떻게 뚫고 저 노련하신 선배님들의 뒤를 개척하여 따라 간단 말인가? 이래저래 아픈 사이에도 고민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고민 또 고민하고 있었다. 어느새 해가 지고 숙직실에 어둠이 내렸다.

"계십니까?"

"…."

"아무도 없는가?"

하고서는 숙직실 미닫이문이'드르륵'하고 열렸다. 불도 켜지 못하고 어두컴컴한 방바닥에 누워 있는 나를 알아보고서는 아니 깜짝 놀라 하신 분이 계셨다.

겨우 몸을 추서려 일어나면서 보니까 나의 계형(季兄)이셨다.

나는 형님이 네 분 계신다. 백형이 계시고, 중형, 숙형, 계형이 계신다.

"…(아이 구 형님!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말도 못하나? 우예 됐노? 사람이 왜 이래? 응? 말 좀 해 봐라."

그때야 내가 연필을 찾아 글로 썼다. 그런 것이 아니고, 목이 아파 말을 못한다고 하니까, 그러면 약이라도 지어 먹지 무엇했느냐고 하신다. 여긴 약국이 없다고 하니까, 그러면 뭐라도 있을 것 아니냐? 약포만 있어서 그런 약은 없다고 하니. 그러면 포항이나, 장기라도 나가면 된다고 한다. 그것 몰라서 안 나간 것이 아니고, 업무가 바빠서 약 지어먹을 생각조차 못하다가 오늘 드디어 넘어져서야 이렇게 누워 있다고 하였다. 아이 구! 답답한 이 동상아 하신다. 내가 생각해도 답다운 사람이다. 그 날 저녁에 숙직실에서 내내쉬었다. 그러는 사이 계형이 지나는 화물차를 잡아타고 구룡포에 나가서 용케도 편두선염 약을 지어 오셨다.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계형께서 지어 오신 편두선염 약을 먹고 푹 쉬었더니 그래 이제 입이 떨어진다. 나에게는 네 분의 형님이 계신다. 백형, 중형, 숙형, 계형으로 모두 친형님이시다. 보통사람으로는 이런 명칭까지도 없을 텐데 말이다.

계형은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으시다. 그러니 방문한 해에 서른 살이시었다. 울산에 사시면서 감포에 우연히 오면서 모포초등학교에 선생 발령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어서 찾아오신 것이었다. 계형은 기어이 걸어서 밤새 금오로 나가시고, 화물차를 얻어 타고 감포로 가시고 말았다. 못내 주무시고 가시라는 나의 뜻이 전달되지 못하고 그냥 헤어졌다. 그 후로 계형은 보지 못했다.

넷째 형수님과 조카, 질녀를 두고 전기기사로 열사의 나라인 바레인으로 출국하셨기 때문이었다. 3년이 지난 뒤 형수님이 병환으로 돌아가시고, 그 때서야 계형이 다시 귀국 하셨다. 우리네 인생사는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닌가 보다. 열사의 나라에서 돈을 벌어 오면 행복하게 사실 줄 알았는데 형님이 돌아오시기 전에 형수님께서 운명하시다니 애석하기 그지없었다.

넷째 형수님이 살아 계실 때 형수님 집에 갈 때면, 내 목소리가 계형의 목소리와 흡사하다고 하셔서 마치'형님이 오신 줄 알고 깜짝깜짝 놀라'하셨다. 이제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하시고 영면하신 형수님 못내 송구합니다. 지금이사 이 말씀 드리니 송구하고, 죄면 서럽습니다. 부디 구천에서라도 계형을 보살펴 주옵소서. 그리고 구천에서라도 행복하십시오.

나는 그 후로 무리하면 꼭 편도선염이 와서 침도 못 넘기는 고생을 하다가, 1974년 4월 25일 결혼 후부터는 내자가 있어서 보신을 많이 하고 목을 보호하는데 충실하여 많이 나아 졌었다. 누구나 직업병을 가지고 있지만, 특히 목에 신경이 쓰인다. 가족력으로 먼저 숙형께서 후두암으로 65세에 돌아가셨다. 이어서 백형께서 후두수술 후 한 달 만에 71세에 돌아가셨고, 그러나 용케도 중형은 천식으로 해서 79세에 돌아가셨다. 계형은 오늘날까지 생존하신다. 아마도 위장이 안 좋으신 모양이다. 나도 어떤 질병으로 죽을지는 모르겠지만 자꾸 후두에 신경이 쓰이는 것이 사실이다.

또, 요즈음 여성에 흔한 갑상선 중에도 저하증이 의심이 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사람은 태어난다. 그러면 살다가 죽는다. 물론 이 죽음이 어떠한 과정을 가지고, 삶의 종지부를 찍히느냐에 차이는 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죽는다.

나의 학위 졸저인'김동리 소설에 나타난 죽음의 양상연구'에서는 비록 문학이지만 사람이 태어나서 죽음이라는 대명제에서 나타나는 양상을 보면 시대 차이는 나지만 결과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치는가에 따라 결론이 나고 마는 것이다. 즉, xyz 좌표상에서 보아 태어나면서 그 과정에 따라 자연회귀냐, 영원회귀냐, 구법적(求法的) 회귀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25. 신혼살림 성공기

아! 1974년! 나의 인생에서 1974년 4월 20일 10:00 대구 삼성예식장에서'따~안~ 딴~따~ 단, 따~안~ 딴~따~ 단…'웨딩마치를 울리고 한 쌍이 나의 일가(一家)를 이룬 날이었다.

초등학교 교사생활 1년 만에 낙찰계를 들어 그 돈으로 결혼을 하였다. 아니 고민스런 총각딱지를 후딱 떼게 되었다. 물론 결혼 전에는 하숙을 하였다. 당시로는 사는 형편이 매우 어려웠다. 다시 말하면 나는 우리 집에서 형님 네 분, 누님 다섯 분으로 막내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생존하실 때 나를 장가가라고 했는데도 불효를 하고 말았다. 문제는 조카, 질녀들이 많아서 삼촌이 장가를 안 가면 저네들이 시집, 장가 못 간다고 나를 만날 때마다 결혼 하라고 성화였다. 그러나 용케도 요즘 같았으면 못갈 뻔한 장가를 드디어 가게 되었다. 나의 키는 작았지, 얼굴은 못생겼지. 경제적으론 돈이 없었지, 도대체 무엇보고 누가 나에게 시집오려고 할 것인가 말이다. 그랬다. 그러나 나는 나, 혼자 벌어서 사는 몸이었다.

결혼하기 전에 방 준비 때문에 고향에 계신 어머니께서 오셔서 방도 한 칸 얻었다. 신혼 준비를 한다고 해도 그저 백지 상태에서 준비하였다. 단돈 1만원을 들고 포항시내에 생필품을 사러 나갔다. 최소한의 인간생활에 필요한 찬장 하나, 커피 잔과 받침 세트, 차 숟갈, 냄비 두 개, 숟가락·수저 다섯 벌, 밥그릇, 국그릇, 종지기 각 몇 개씩, 물동이, 바가지, 주전자, 방비, 쓰레기 통, 휴지 약간, 자루 몇 개, 도마, 칼, 연탄집게 등을 장만하여 부엌에 정리하여 놓고 보니 마음에 부자가 되었다. 하기야 그 당시에도 잘 사는 사람은 얼마나 잘 들여 놓고 살았을까? 과연 대구에서 살던 처녀가 이런 형편의 나의 집에 시집와서 살 수 있을까? 한편 여러 가지 걱정도 참 많이 했다.

그래도 모친이 오셔서 보시기에는 아무 것도 없다가 밥을 해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한 것이 마음에 드신 것인지 방문을 열고 부엌을 들여다보시면서 한 말씀 하셨다.

"야야! 그래도 아무 것도 없었던 부엌에 많지는 않지만 잘 정리 해 두었네. 그런데 정말 도시처녀가 여기 와서 네한테 살 수 있을까? 그것이 참 걱정이다 야."

"뭐 사람 사는 것이 별거 있겠습니까? 그리고 살다가 필요한 것 있으면 하나씩 돈 벌어 사다주면 돼지 뭐. 걱정하지 마이소."

"그래도 너무 허술하다 야. 이를 우짜노?"

"아이 구우! 참 걱정도 팔자라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시라니깐요."

"시간 날 때 부엌으로 나다니는 데 슬리퍼 하나 있으면 참 좋겠다."

또 걱정이신 어머님이 지나가는 사람 남 말 하듯 툭 던지신다. 안 그래도 막내가 장가를 간다는데 아무런 도움 없이 이렇게 살아가려는 아들을 보면서 어느 누가 엄마라도 걱정 안할 수 있으랴마는 그저 눈에 눈물이 글썽이신다.

"예, 포항 출장 갈 때 사 올게요."

어머니는 나를 마흔 넷에 낳으시고, 천연두 마마를 앓아서 얼굴에 코 쪽으로 좀 얽으셨다. 나를 낳으면서 천연두 마마까지 하시니 그 몸이 어떠했으랴. 그리고 자식을 많이 낳으면 여성으로서 그냥 안 아픈 곳이 없다고 하시는데 특히나 신경통으로 약을 장복하고 계신다. 게다가 화병이라도 나신건지 못 피우시던 담배까지 줄담배를 피우신다.

막상 걱정이 되어 나의 신혼집에 오실 때 연세가 68세이셨다. 게다가 자식을 많이 낳으셨으니까 관절염이 오셔서 잘 걸어 다니시지도 못하셨다. 손가락이 편찮아서 연탄불도 잘 맞춰 넣기가 어려우시면서도 막내아들이 장가간다고 하니까 걱정이 앞서서 와 보신 것이다.

"어머니! 연탄불도 내가 시간에 맞춰 와서 갈아 넣으면 되고, 모든 것에 신경 쓰지 마시고 그냥 방에만 계십시오."

"알았다. 학교나 잘 다녀오너라."

하시면서도 내가 오기 전에 연탄불을 갈고, 연탄재까지 치우시고, 하물며 밥까지 해 놓으시니 제 때 맞춰 밥 먹으라고 하신다. 부모님은 자식이 스무 살이 넘어도 걱정을 못 버리시는 것이다.

결혼하여 경주 큰집에 하루를 보내고 바로 트럭에 짐을 싣고 나의 신접살이가 있는 모포로 오고 말았다. 물론 근무도 근무고, 무엇보다 나의 반 학생들이 걱정이었다. 그러자니 자연히 일찍 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아이 고오! 이런 정말 아무것도 없네."

입성 첫 날 내자의 첫 목소리다. 그래도 어쩌랴. 어려우면 어려운대로 살고 형편대로 사는 것이 인간이제. 모든 인간이 처음부터 잘 사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라고. 특히 1970년대에 사는 우리들 군상들로는 말이다.

학교에서 결혼을 하자말자 실습지 한 이랑을 주셨다. 고추심고, 파 심고, 무 심고, 배추 심고, 웬걸 반찬을 만들 수 있는 채소는 형형색색으로 모두 심어 두었다. 그리고 이제는 된장, 간장, 고추장과 참기름, 소금만 준비하면 될 것이다. 아울러 생선이 있으면 결혼 초보로서 그런대로 갖추어 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자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반소사음수(飯疏食而飮水)하고 곡괭이 침지(曲肱而枕之)라도 낙역재기중(樂亦在其中矣)이라."이는 나물 먹고 물마시고 팔베개 하고 누었으니 사나이 대장부 이 보다 즐거움이 더 있으랴.

사실 내가 너무 자만하였나? 신혼살림에 많지는 않았지만, 방 두 개에 부엌 하나 이렇게 살면 되지 않겠나 싶었다. 방1에 신혼 방, 방2에 서재로 방하나 가득 책이 쌓여 있다. 곧 이것이 마음의 부자요, 선생으로서 지식의 운용자다. 그래도 내가 신부에게 선물로 「여성중앙」잡지를 매월 포항에서 사 오는 것이었다.

모포에서 신혼살림은 신부로서 고역이었다. 빨래를 하고 빨랫줄에 늘어놓으면 모래가 수북하니 쌓여 빨래를 바깥에 못 늘어 둔다는 것과 여성으로서 강한 바닷가 자외선 때문에 모자를 항상 써야 되고, 차단제를 발라야 외출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당시 하루 버스가 3회 왕복으로 밖에 운행되지 않으므로 꼼짝 못하는 것이 불편 중에 불편이었다. 그리고 문화생활이랄까 다방 하나 없는 그런 곳이었다. 약방도 없고 "약포"라는 것이 겨우 하나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새색시로서는 이곳 생활은 바로 갇힌 것으로 당시 그저 라디오나 듣고 집안에서 책이나 읽어야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당시 나는 다른 것에는 아껴도 책 사는 것에는 아끼지 않았다. 문학에 뜻이 있어 한국문학 100권 선집을 사 두었다. 부활과 대망, 후대망 시리즈를 준비하여 두었다. 내자는 시간 나는 대로 곧잘 독서삼매에 빠지곤 하였다. 하기는 지금까지 그 책을 윤독하고 있지 아니 한가?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한국문학전집을 정독으로 3회나 읽었다고 한다.

당시에 흑백 TV사기도 어려워 신혼집에는 없었다. 물론 바람 잘 나야 하는 선풍기도 없었다. 가장 손쉽게 바람을 나게 하는 부채가 겨우 둘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부챗살이 많은 노란 종이판에 콩기름을 먹인 부채다. 하기는 바닷가라 기온이 늘 시원하였다. 1년 여름 중에 1∼2일간만 반짝 더웠지 모포지역이 바닷가라 선선한 편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모포에 살면서 1년에 가장 무더운 날이 1∼2일 정도뿐이라는 것이었다.

차츰 시간이 지나니까 결혼한 것을 아신 학부형님들께서 고추, 마늘, 파, 무, 배추, 오이, 호박, 감자, 고구마, 생선 등 반찬을 할 수 있는 채소와 고기를 수시로 갖다 두시고 가셔서 천만다행으로 걱정이 없었다. 아울러 이런 학부형들이 무척 고마우셨다.

이렇게 하여 모포에서 대구처녀와 결혼하여 장남을 출산하고 나의 대를 잇게 되었다. 이것이 나의 모포에서 신혼살림 성공기다.

26. 모포와 장인

모포에서 신혼집으로 살다보니 주인집이 도로가 나면서 헐리게 되어 두 번째 사는 집으로 이사를 하였다. 1975년 여름이었다. 아침에 출근을 하는데 내자가 나를 붙들고 귓속말을 한다.

"저거, 노란 것이 무에요?"

"으~어…? 뭐라고 말을 해야 빨리 알아듣지?"

멍석에 산골짝에서 추수한 것을 우케(=찧기 위해 말리는 벼)에 늘어 두었다. 아침 햇살에 샛노란 벼가 멍석에 가득 늘어놓은 것이 내자가 무척 궁금하였던 것이다. 내자는 도시에서만 살다가 와서 이 나락(=벼 알)을 모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작은 소리로 궁금해서 물었을 것이다. 하기는 대구시내에서만 살다가 이곳 바닷가로 시집을 왔으니 모를 만도 하지. 하도 갑자기 물으니까 나도 얼른 대답이 안 나왔다.

"우리 밥해 먹는 것이 뭐지요?"

"쌀!"

"그래요. 쌀을 알았으면 말이지, 이것을 방앗간에 가서 찧으면 껍질이 벗어지고 안에 쌀이 나오지요. 그런데 껍질이 벗어져도 그 정도에 따라 더 깎을수록 7분도, 8분도라 해서 색깔이 조금 달라져서 흰쌀이 됩니다."

"아니 벼를 찧으면 쌀이 된다. 이런 건데 무엇을 그래 길게 설명해요?"

괜히 모른다고 해서 자세히 설명을 해 주고도 핀잔이었다. 내가 너무 자세히 설명을 하였나 보다. 그런데 알게 모르게 아침부터 핀잔을 듣고 보니 나도 쌤통이 났다. 다시는 설명 해 주는가 봐라~!

나는 시골 출신이라 벼를 물에 불리고, 소독도 하고, 볍씨를 뿌려서, 모판에서 거꾸로 엎디어 그 힘든 피사리도 하고, 모도 찌고, 쏟아지는 장대 비 속에서 모내기도 하고, 초벌에서 서너 번 땀 흘려 가면서 김매기를 하여, 곡식이 익으면 벼를 베고, 말려서 탈곡하여 가마니에 담고. 창고에 넣었다가 방앗간에 가려면 이렇게 우케에 늘어 말려서 수분이 적당할 때 실어 가서, 찧어서 등겨와 쌀을 구분하여야 한다. 그리고 집으로 운반하여 곳간에 넣어 보관하면서 적당량을 퍼내어 밥을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일련의 과정을 모두 알고 있는데 내자는 완전히 초보단계다.

이를 어째…? 토요일 오후 시내버스를 타고 가면서 공부를 시켰다.

"저것이 감자 꽃이고, 이것이 들깨다. 이것이 보리요, 저것이 밀이다."

라고 하는데, 밀하고 보리를 또 구분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밀은 조금 덜 진하고, 미끈하게 생기고 밋밋하게 자라지만, 보리는 색깔이 진하고 통통하게 자란다."

이런 식으로 소나무, 오리나무, 감나무 등을 하나하나씩 깨우쳐 갔다.

점심시간에 자전거를 타고 집에 들렀는데, 내자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왜 울었어요?"

고 하니까, 대구에서 아버지하고 어머니께서 오셨다가 그냥 가 버리셨단다.

"그 참, 난감하네."

나도 할 말이 없고, 왜 오셨는지, 그리고 왜 가셨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당시 그저 짧은 시간에 자전거 타고 집에 와서 점심 먹고, 다시 다람쥐 쳇바퀴 돌듯 일상생활을 하여야 하는 직업이었다. 그때는 오늘 날처럼 휴대폰도 없던 시대다. 그저 속이 답답할 뿐이었다. 무슨 속내가 있으시겠지. 아니면 명색이 맏사위 집인데 그냥 가 버리시다니? 그것도 처음 오시는 사위집에 말이다. 참, 섭섭하게. 물론 우리 사는 게 말이 아니었지. 큰방에 보면 농도 없고, 쌀자루와 옷 보따리와 이불이 그대로 놓여 있고, 라디오 한 대와 전기다리미(=혼수품) 한 개만 있으니 두 어른께서도 기가 찼을 것이다. 작은 방에는 내 책이 가득히 들어 있고 허드레 물건만 놓여 있는 것을 보고 가셨을 것이다. 아니 내가 지금 생각해도 물론 황당하셨을 것이다. 딸을 이런 곳에 왜 시집을 보냈을까 후회도 하셨겠지.

수업을 마치고 어두컴컴해서 돌아 왔다. 마당에 높다란 물건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방에서 나오는 내자가 역시 시큰둥하다. 그 시추에이션이 그렇게 느껴졌다.

"오늘 하루 종일 왜 그래요? 마당에 이 두 큰 물건은 또 다 무엇인가요?"

"아버지, 어머니께서 캐비닛만 사다 내려놓으시고 바로 가셨어요."

"캐비닛은 왜 사오셨는데?

"내가 혼자 있을 시간에 심심할까봐 TV라도 한 대 사 오실라 하다가 혹시 몰라서 들렀다가 옷장이 없어서 캐비닛을 사 오셨다 하네요."

"이런 고마우실 데가…."

그런데 캐비닛을 혼자 들여 놓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동네 청년을 모셔서 큰방에다 들여 놓고 막걸리 한 잔씩을 하였다.

그래 명색이 맏사위가 결혼해서 살아가는데 형편이 어려워서 이렇게 옷장을 사 주시다니 고마우시기가 한량없으시다. 그렇지 않아도 돈이 모이면 사려고 했는데. 물론 다음 이사에 가서는 TV도 사고, 선풍기도 샀다. 그 캐비닛은 7년 동안 이사 갈 때마다 이동하여 요긴하게 쓰면서 대구로 이사 오면서 하양에서 버렸다.

장인은 풍채가 아주 좋으셨다. 본래 고향은 '경북 영양'이시지만, 중국 길림성 길림시 교하에서 출생하셔서 고교까지 다니시고 한국으로 다시 오셔서 살게 되셨다고 한다. 중국에서 고교까지 공부하시면서 일본어를 잘 하셨다. 그리고 예인이셨다. 목각·박 공예와, 서예, 수석, 우표, 화폐, 코인 수집을 하시면서 복권수집까지 하셨다. 젊어서는 트럼펫에 럭비까지 하셨다고 하니 취미가 다양하셨다. 그리고 상당한 주량이 있어서 밥 반주에 1, 3, 5, 7, 9잔으로 술을 드셨다.

여러 직업을 거쳐서 나중에는 대구에서 당시 K여상 초대 서무과장을 맡아 하셨다. 이건 나중에 안 이야기지만, 아들 둘이 함께 살게 되었을 때 둘째 아들이 친할아버지인 줄 알고 있다가 자라니까 외할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깜짝 놀랐다는 것이다. 장인께서는 둘째 아이를 지금도 무척 좋아하였다. 스포츠 신문을 자주 사러가게 되었고, 필요할 때마다 시중을 잘 들어 주었기도 하다.

6.25 전쟁에도 참전하셔서 오른쪽 다리에 탄피가 3개, 왼팔에 두 개, 좌골신경 마비로 요즈음은 걸음을 못 걸으셔서 P요양병원에 계시게 되었다. 당년 87세이시다. 2003년에 국가보훈대상자로 신청하여 인정을 못 받으시다가 다음 해에 "국가유공자 7급(최하위 급수)"을 받으셨다.

그때 장인께서 한 말씀 하시기를, "대한민국에 태어나서 국가에 세금을 내고 살아야지, 함부로 국가의 돈을 축 내면 되겠느냐?"고 하시면서 한사코, 국가보훈대상자 신청을 거부하시다가, 이 맏사위의 간곡한 부탁에 모쪼록 응하셔서 국가유공자의 최 하위급수인 7급을 받으시게 된 것이었다.

물론 국가보훈대상자를 임의로 신청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증빙은 충분했다. 육군병원에서 치료하신 근거와 육군본부의 인사기록카드에까지 등재 되어있는 사실적 근거로 신청하고, 병원에 가셔서도 사정 한번 없이 신청시 현 상황으로 그대로 진찰을 받으시고 겨우 유공자 7급을 받으시게 되신 것이었다.

장인께서 한 말씀 하시기를,"자네가 근무하던 거기 모포에는 바다낚시를 할 때 자주 들린 곳이었다. 특히 모포 앞바다와 영암리 신창에 밤바다 낚시를 자주 들렸었지."하고 마치 지나가시듯 말씀하셨다.

장인께서는 알게 모르게 모포와의 인연이 이미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27. 교사와 이사

나의 이사가 발생한 시점은 결혼을 하고 난 후 가정을 꾸리면서 빈번히 일어났다. 매년 2월말이면 교사로서는 인사이동이 되어 곧잘 이사를 하여야 한다. 그리고 내가 이사를 가지 않아도 공연히 오가는 선후배님들로 인하여 무언가 허전하고 씁쓰레해지는 것이 인간의 정 붙이고 산 결과인 셈이다. 이 또한 인간의 삶의 한 모퉁이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사란 무엇인가? '집을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것.' 이렇게 생각하면 아주 단순할 것이다. 뭐 그냥 집 옮긴다. 정말 이것이 아니었다. 결혼하고 신혼살림을 하던 차에 갑자기 주인이 집을 비워 달라는 것이었다. 1975년 모포에서 새집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이사는 하여야 한다. 옳지! 내가 왜 진작 이런 생각을 못했는가? 나의 제자들이 있지 어니한가?

"여러분! 내가 지금 살던 집이 헐리게 되어 이사를 가야 하는데, 자기 집에 세놓을 집이 있는지 알아보아라."

하였는데, 그러자 말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선생님! 우리 집에 사랑채가 비워 있어요. 새로 지은 집이에요. 아버지께 여쭤 보이소."

H양이 이사할 수 있는 집 정보를 주었다.

"그래. 고맙구나."

바로 점심시간에 알아보았다.

"아! 예. 우리 집에 선쌤이 오시면 좋지요. 마침 H의 담임 선생님이시네요. 이삿짐은 오늘 저녁에 마아~ 옮기지 예."

그리하여 H양의 집 사랑채로 짐을 옮겼다. 바로 최초에 신혼으로 살던 집에서 100여m 정도라서 차도 필요 없고, 리어카와 동네 아이들을 불러 모아 한 아름씩 안고 이사를 하였다. 짐은 다른 것이 아니고 전부 나의 책뿐이었다. 줄줄이 책을 머리에 이고 마치 개미가 비 온다고 이사하는 광경이었다.

나는 책에만 신경을 쓰는데, 내자는 유리그릇이었다. 이사를 하고 나면 반드시 후회가 되는 것이 유리그릇이라고 한다. 아무리 이사를 잘 하여도 유리그릇, 그것도 제일 아끼는 그릇이 잘 깨지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란다. 내자는 가까운 거리라고 해도 유리그릇을 하나하나 신문지를 끼워서 패킹처리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니 밤을 꼬박 새우는 것이었다.

새로 이사하는 집은 방이 두 칸이라서 큰방은 잠자는 방, 나머지 작은방은 나의 책방이다. 부엌에는 찬장을 넣고 연탄을 넣어도, 그래도 넓어서 좋았다. 무엇보다 새로 지은 집이어서 내자가 무척 좋아하였다. 모두 연탄을 사용하던 시대이었다. 부엌에는 연탄을 쌓아두고 쌀통도 함께 두어야 했다. 단지 그때까지만 해도 모포에서는 상수도 시설이 없었다. 그러나 새로 이사를 한 집에는 뒤꼍에 마침 펌프가 있어서 식수로 퍼 쓸 수 있어서 아주 편리했다.

큰방에는 농도 없이 쌀자루 하나, 외출복을 걸쳐두는 횃대보가 쳐져 있고, 이불을 개어서 쌓아 두고, 옷상자가 하나 있었다. 그 위에 나란히 베개 두 개. 이것이 신혼살림 전부였다. 작은 방에는 내가 주문 제작한 책장 하나에 책은 가득히 꽂아 두었다. 그리고 헌 의자가 하나 놓여 있다.

부엌에는 포항에서 1만원 주고 사온 찬장 하나, 작은 쌀통 하나, 연탄이 100여 장, 번개탄이 20여 장이 있다. 냄비와 작은 솥 하나, 나무 주걱, 주발, 국그릇 3벌씩, 기타 종지기 여럿, 숟가락 3개. 그리고 커피 통, 찻잔, 차받침, 찻숟갈이 전부다. 그래도 간은 맞추어 먹어야지. 된장, 간장, 고추장, 참기름, 소금, 마늘 등은 상비하여 두었다. 이상이 우리 집 첫 이사를 하고 정리한 양상이다.

이리하여 첫아들이 있어서 큰방의 부족한 부분을 매우고 살았다. 나는 기억을 잘 못하였는데, 내가 시골 선생 8년 하는 동안 차에 싣는 이사는 8번, 짐을 손수 날라서 한 이사까지는 모두 9회라고 한다. 왜 그러냐 하면 나는 8년 동안 다섯 군데 학교를 인사 이동하여 다녔으니까 그런 모양이다. 초임인 모포초등학교(3년에 2회), 두 번째 내북초등학교(2년에 1회), 세 번째 감포초등학교(1년에 1회), 네 번째 괘릉초등학교(2년에 2회), 다섯 번째 하강초등학교(2개월에 3회) 등이다. 이사를 자주 가게 되면 나는 책 박스꾸리기 선수가 되어야 했고, 내자는 그릇꾸리기에 선수가 되어야 했다.

문제는 전근하여 장거리를 이사 갈 때, 같이 지내던 동네 분들, 아니 학부형들이 함께 나오셔서 어떨 때는 눈물까지 흘리시는 것을 보고 이것 역시 이사를 자주 하여서는 안 되는 구나를 느꼈다. 물론 한편으로는 그것이 인지사정이 아니겠는가? 이사를 가는데도 '그 사람 잘 갔구나.'하면 역설적으로 정말 잘못 살고 간 것이 아니겠는가? 처음으로 자동차에 짐을 싣고 떠나는데, 온통 동네 분들과 학부형들이 두루두루 모두 나와서 배웅을 하여 주면서, 손까지 흔들 때는 눈시울이 시큼하였다.

그러자, 이삿짐 화물기사분이,

"아이 구! 선생님은 인심을 많이 얻고, 살다 가시는 모양입니다."

"예에?"

"어떠신 분은 이사 가면서 새벽에 몰래 가시는 분들도 있고, 빚을 안 갚아서 살림까지 끄집어 내리는 경우도 있습디다. 안 그러면 욕을 얻어먹고 도망가다시피 하는 분들도 있습디다. 그런데 선생님은 오늘 보기 좋습니다."

"아이고! 그래요. 앞으로는 우리도 더욱 이웃 분과도 잘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렇지요. 선생님들 이사를 많이 해 봤으니까 잘 압니다."

이런 얘기를 어제같이 들었는데 살다 보니까 정말 그 말이 옳은 말씀인 것 같다.

심지어 두 번째 전근 갔다가 고향으로 돌아 왔을 때 그 집 주인 아주머니께서 쑥떡을 이고 나의 고향까지 찾아오신 적도 있었다. 시골에서 처음에는 그저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는데 가는 곳마다 정을 붙여 드리고, 떠나서 다시 찾고, 지나서도 다시 찾고, 그래서 남다른 정을 쌓아 갔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공립학교 교사를 하면서 이사는 자연히 따라 다니게 되어있다. 특히 가정살림을 하다보면 더욱 그렇다. 공립교사와 이사는 엄연히 붙어 다니는 짝이다. 이사를 마치고 나면 1주일간 몸살을 한다. 나도 그렇고, 내자도 그랬다. 하는 것 없이 고되다. 그래서 이사는 더욱 고되다.

이사를 하고, 정리를 하고 나면 또 '집들이'라는 것을 꼭 하여야 하는지 이 또한 내자의 고생을 더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사와 집들이는 연결고리이다. 그런데 이 집들이를 하여야만 또 끈끈한 이웃 간의 고리를 만들지 않나싶다.

교사를 하면서 이사해야 하는 것은 정말 세상사 중에 힘들고, 고된 일이지만 그래도 초임지인 모포에서 살다가 한, '이사 가는 날'이 내 생애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이사였다. 이삿짐에 포함한 내자와 아들이 늘었고, 나를 아끼시던 여러 학부형들의 애잔한 헤어짐의 아쉬움을 그날에야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28. 모포와 아내

빨리 장가를 가서 어여쁜 아내를 맞이하고 싶었다. 나는 무슨 일이 그렇게도 많았는지, 장가를 갈 시간이 없었다. 아니 일을 만들어서 자꾸 하니까 교장선생님께서는 그래서 나를 좋아하셨나 보다. 그래도 장가를 빨리 가야지 하는 생각은 늘 하고 있었다.

나의 결혼 이야기는 이래서 여러 가지로 복잡하였다. 본시 아버지께서 권해 주시던 곳은 경주 안강읍에 있는 어느 사과밭집 규수이었는데, 내가 그 당시는 장가를 가기 싫어서가 아니고 공부를 더 하고 싶은 욕심에 거절하고 말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교사 발령을 받고서부터 막내아들을 곧 장가보내시고 싶어 하셨다. 그러던 차에 가을 농번기 때 큰집에 들렸는데 무논 벼를 베는 곳에서 아버지께서 결혼 말씀이 나왔다. 그 얘기를 듣다가 그만 도망을 가고 말았다. 그런 후부터는 아버지는 결혼말씀을 하시지 않으셨다. 그러자 백형, 중형, 숙형 세 분께서 자꾸 장가이야기를 하셨다.

백형은 막내 뜻도 모르고 지가 사귀는 여자가 있는지도 모르겠으니 여하튼 빨리 장가를 들어야 '딸(=질녀, 당시 22살)인 질녀를 시집보낼 수가 있다.'라고 하셨다. 중형은 막내가 빨리 장가가야 '우리 아들(=조카, 당시 24살)도 장가 들일 수 있다.'고 하였다. 숙형은 아마도 막내가 사귀는 처녀가 있을 수 있다고 판단하셨는지 자꾸 꼬치꼬치 물으셨다.

나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서 새로운 생각이 들었다. 이제 홀로 남으신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고 나면 아무도 나를 생각해 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니 불현듯 장가라도 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곤 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장가를 들었다. 결혼 3일 만에 1.5T 화물차에 살림을 싣고 내자와 숙형과 함께 모포(=칠전)로 이사를 하였다. 물론 그 전에 신혼집을 구해서 기본은 준비를 하였지만 나의 살림이 처음으로 생기고 아내가 생겼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경주를 지나 보문, 덕동을 지나 감포-두원-계원-양포-신창-대진-모포2리인 칠전으로 왔다. 시내를 제외하고 대다수가 비포장 길이었다. 새색시를 태우고 좋은 길로 가야 하는데 덜컹거리는 비포장 길을 그것도 화물차를 타고 시집을 가야 하니 정말 면구스러웠다. 대구에서만 살다가 산골로, 바닷가로, 산(수양산을 돌아서)꼭대기로, 기어코 바닷가에 낯설고 물 설은 그 바닷가에 내려놓았다.

짧게 말해서 대구에서 경주로 시집 온 것이 아니고 모포2리 칠전으로 시집을 온 것이었다. 숙형은 화물차에서 짐을 내렸다. 무거운 것(조립식 책장 포함) 몇 개를 들어 넣어 주시고 그 화물차를 타고서는 경주로 돌아 가셨다.

모두가 낯설고 부엌까지 낯이 선 이 곳에서 이제 살아가야 하는 곳이다. 어떻게 보면 아내는 하루아침에 그냥 던져두어진 신세이었다.

"이제 내일부터 내가 출근하고 나면 혼자인데 무얼 하고 살지요?"

"나는 책을 많이 좋아합니다. 출근하고 나면 다행이 책이 많아서 책을 읽겠습니다. 그리고 푸른 바다도 가끔 보고 살지요."

이것 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책에라도 낙을 붙이겠다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 "한국문학 전집" 100권 들이가 있었고, "부활", "속 부활"등을 준비하여 두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대구 시내에서만 살다가 시골로 와서 소일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는 궁금하였다. 그렇다고 밭일을 하거나 농사를 짓는 일도 아니면서 무엇으로 소일을 할 것인가? 나는 일이 많아서 코피를 흘리지만 말이다. 한 가지 제안으로 1주일이나 2주일에 극장 영화구경 1회, 아니면 다른 지역으로 여행하는 것이었다. 흔쾌히 들어 준다고 하고 일요일이면 포항으로 영화구경을 다녔다. 돌아 올 때 상정으로 오지 않고 구룡포로 돌아오거나, 감포로 가서 구경도 하고, 오천으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결국 도시 사람이었던 아내를 점차 시골풍에 익히는 실습을 하였던 것이다. 내자는 매일 일찍 일어나서 마당에 물 뿌리고, 마당을 쓸어서 깨끗함을 돋보이었다.

바닷가라서 강렬한 햇빛을 피하기 위해 아내는 목에 스카프를 두르고, 나폴 거리는 흰 모자를 눌러 쓰고 얇은 망사 장갑을 끼고, 그렇게 중무장을 하고 버스를 탈 때도 작은 망태를 하나 꼭 준비하고 나다녔다.

그래서 오늘은 구룡포 항으로 갔다. 버스에서 내려서 30분 여유가 있으므로 고래 해체작업을 구경하고서 고래 고기 맛을 보았다. 그리고 구룡포 항구를 이곳저곳 구경하기도 하였다.

또 다른 날은 장기장이라 5일 시골 장을 구경하였다. 난전에 펼쳐진 온갖 물건들을 보고 참 신기해하였다. 도시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눈도 덜 뜬 강아지가 있는 동물 장, 옷전, 신발전, 채소전, 곡식전을 둘러보았다. 장터국밥 하나로 배고픈 것 모든 것을 해결하였다. 장기읍성과 향교를 둘러보고서는 새삼 우리 역사를 재인식하기도 하였다.

이제는 가까운 대진리 매진으로도 갔다. 바다가 솟아올라 온 바다 속의 바위, 그 곳에서는 이름 모를 해초들이 자라고 있었다. 아는 이름들은 겨우, 미역과, 다시마, 파래, 곤피 정도이었다. 문제는 곤피다. 경주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이름이지만 도시에서는 낯설다고 한다. 중국 사람들은 해대(海帶), 곤포(昆布)를 미역이나 다시마로 혼용해 쓴다. 곤피는 정확하게 미역보다 울퉁불퉁하게 생겨 곰보 자국 난 다시마다.

또 하루는 이곳 바닷가가 아닌 구평으로 갔다. 모포에서의 바닷가가 아닌 구평에서 바닷가는 또 다른 곳이었다. 이 구평은 모포를 오려면 구평버스를 타야 하는데, 어쩌다가 땅고개에 일찍 오면 구평가는 버스를 타고 앉아 있으면 다시 땅고개를 거쳐 포항으로 나가게 된다.

내가 출근을 하고 나면, 총각 때 찾아오던 처녀들이 우리 집으로 침입(?)하여 온다. 그리곤 진한 커피를 한 잔씩 청해 들고 간다고 한다. 어떨 땐 혼자 있는데 마치 시위라도 하듯이 들어온다고 한다. 그래도 아내가 잘 설득한 탓(?)인지 아무 탈 없이 차 대접을 하여 돌아가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시골인심이라 후할 때는 후하지만, 따질 땐 따지는 것이다. 용케도 사탕을 나누어 먹고, 커피를 마시고 도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아울러 곁에 계시는 교장, 교감사모님께서도 들리시고, 과거에 초등학교 교사를 하시던 Y선생님(=나중에 대구예고 교사로 봉직) 사모님도 함께 모이시곤 하였다. 의문을 모두 풀고 시골 바닷가에 모이셔서 오순도순 얘기로 꽃을 피우기도 하였단다.

무엇보다 내가 초임에 하숙하던 집 아주머니, 아니 술을 가르쳐 주시던 술 사부님(?)께서 아내 혼자인 것에 자주 들려 주셔서 내가 좋아하는 호박잎, 물외 오이, 가지 등 반찬도 갖다 주시고 기타 곡물도 주셔서 무엇보다 고마움을 느끼고 살았다.

이러한 고마움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하는 인정에서 그 좋은 뜻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살아간다. 정말 인생의 선배님이시며, 삶의 선배님들이시다. 그리고 곧잘 지도해 주셔서 백골이 난만망인 것을 깨닫고 살고 있다.

항상 거주할 집을 얻더라도 학교와 조금 떨어진 곳, 아니 너무 자주 어울리지 않고도 잘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이중환의 택리지인 복거(卜居)이다. 혹시 너무 가까이 하여 무슨 오해나 곡해를 불러일으키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므로 조금은 이것을 아내가 알고 있기도 하였다. 그 후로 이사를 하려면 학교와 조금 떨어진 곳, 낮에 학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어도 모를만한 거리에 항상 집을 구했다. 물론 아내가 스스로 이런 일을 그렇게 하게 되었다.

한번은 강사, 석병을 지나 장기갑(=오늘날 호미곶)등대로 갔다.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박물관이 있었고, 그 옛날 불을 비추이기 위해 사용한 여러 가지 형태의 등불이 있었고, 그 사용 또한 특이했다.

정말 이렇게 소박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한 번은 우리 반 아이들이 우리 집 곁에서 놀고 있었던 모양이다. 들어오라고 해서 대구에서 가져온 롤빵을 잘라 주었다고 한다. 그 시골 바닷가 아이들에게 당시에 롤빵을 주었으니 그 맛을 어찌 잊어버릴 수가 있겠는가? 집으로 갈 땐 설탕이 잔뜩 묻힌 큰 사탕 한 개씩을 주었으니 이 또한 아이들이 어찌 잊어버릴 수가 있었겠는가? 초임지 모포초등학교 제9회 동기회 창립일(2011년 8월 8일)에 처음 만난 자리에서 제자들에게서 들은 이야기이다.

내자는 곧 나의 큰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는 일들이 많아지기 시작하였다. 그저 그렇게 시골학교, 초임교사의 아내로 살아가고 있었다.

29. 큰 아들을 얻다

집에서 열 번째 막내고, 다섯 번째의 아들이다. 우리 집에서 마지막으로 결혼을 하였다. 어머니는 내가 결혼한 것을 아주 좋아 하셨다. 아버지께서 살아 계셨을 때 결혼을 하였으면 더욱 좋아하셨을 것을 그것을 지키지 못하여 어머니께 항상 미안해하였다. 대구색시를 얻어 결혼한 것이 더욱 어머니는 좋다고 하셨다. 시간이 나는 대로 내자와 함께 어머님이 계시는 경주 큰집에 자주 들렸다.

"얘야! 소식 없느냐?"

"예? 무슨 소식 말입니까?"

"아∼아 소식 말이다?"

"아∼아 소식이라니요?"

"결혼 했으면 아이를 낳아야지요?"

이제는 형수님들까지 동원되었다. 참 얼마 됐다고? 이래 난리냐? 그러면서도 혹시 내가 부실(?)하여 자식이 없는 것이 아니냐? 별 걱정이 다 들었다. 그러는 차에 자꾸 몇 개월이 흘렀다.

내자가 대구 친정에 다녀 온 후에 임신이 되었다고 하였다.

"아! 나도 남자(♂)는 맞구나! 임신이 되었다니… 다행이다."

임신 중에 아버지 기일을 맞았다. 내자가 도시에서만 살다가 시골에서 제사 드리는 일을 도우려니 벅찼던 모양이다. 당시만 하여도 우리 집에서는 재래식으로 준비하여야 했다. 부엌에 불을 때며 일을 하여야 한다. 놋그릇을 닦아야 했다. 놋그릇을 닦으려면 기왓장을 부수고, 갈아서, 짚에다 싸서 닦아야 했다. 뿐만 아니라 제기며, 병풍을 준비하였다. 전을 직접 붙이려면 뒤 곁에 솥뚜껑을 뒤집어 걸어 놓고, 기름을 칠하여 전을 붙여야 하였다. 산적할 고기를 장만하고, 고사리, 도라지, 배추 등 3색 나물을 챙기며, 탕(=육탕, 어탕, 계탕)을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까? 과일을 준비하고, 특히 계절에 따라 특이한 과일을 준비하여야 한다. 아울러 떡(편)은 백설기를 준비한다.

조상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보본(報本)이요 천지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정성일 뿐이다. 아무런 욕구나 욕심이 아닌, 오늘날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여 주신 조상님과 낳아 길러주고 사랑하여 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는 정성의 표시일 것이다. 그것은 효도의 연장일 뿐 어떠한 기복이나 피화를 원하는 욕심이 있어서는 안 된다. 정성스럽게 제사를 올리는 사람은 자연히 만사가 순탄하게 되는 복이 얻어지는 것이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심신을 정결하게 하는 재계를 하여야 한다. 재계는 몸가짐을 깨끗이 하고 마음과 정성을 집중하여 신을 섬기고자 하는 것이다.

제사 음식은 정결하게 정성을 다하여 준비하고, 제례 지낸 음식은 저장해 두지 않으며, 즉시 많은 사람이 골고루 나누어 먹어야 복을 받고 물자가 부족한 그 당시 영양 보충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제사란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두려워하면서 예를 받들면 복을 받게 되나니, 복이란 백가지 모든 것이 순하지 아니함이 없게 되는 것으로, 안으로 몸을 다하고 밖으로 도에 따르는 것이다. 조상의 제사란 어떤 기원의 욕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마음속에서 우러나와 정성과 공경을 다해 제물로 받드는 자손 된 도리를 다하여 서로 화합하고 사랑하는 정신으로 나가는 일이다. 여기에서의 복이란 속된 복이 아니라 모든 일이 순하게 되는 것이다. 부모와 조상의 제사를 통하여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자매 사이에 우애하며, 일가친척 사이에 화목하게, 가족애를 다지는 일이다.

오늘날 전통적인 제사 의식이 서양 종교의 영향으로 많이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이 훨씬 많기는 하나 제사의 의의를 바르게 인식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우리의 전통적인 제사 의식을 바르게 계승하여 제사가 미신이나 우상 숭배가 아닌 크게는 인류 화합을 도모하고 작게는 효도의 연장으로 일가의 화친을 이루게 함을 알아야겠다. 제사 올리는 것과 부모를 생각나게 하는 것으로 그저 나의 큰 아이 출생을 기다린다.

출산예정일이 1개월이 지났는데 아직도 낳지 않아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토요일이라 학교를 파하고, 모포 땅고개에 올라 중간버스를 타고 포항에 도착하였다. 그리곤 이내 시외버스 주차장으로 냅다 달려 대구행 고속직행에 몸을 실었다. 오늘은 출산을 하려나 어쩌려나 생각에 잠기면서 대구 처가에 들렀다.

장모님만 계셨다.

"오이! 자네 잘 왔네. 선교가 몸 풀었다 아이가."

"예? 몸을 풀었다고요?"

"와아? 모르겠나?"

"선교가 아∼아를 낳았다 말이다."

"뭐, 낳았는데요?"

"따라와 보라카이."

무엇을 낳았는지 말씀은 아니 하시고 나를 끌다시피 대구 '중앙산부인과'로 데려갔다. 2층으로 올라갔다. 아니 곱상한, 아직도 얼굴이 바알간 아기를 낳았다.

"아이고! 수고 했어요. 밥은 잘 묵나요?"

"…."

"언제 낳았제?"

"6월 16일(월)에 낳았지."

"아니, 오늘이 6월 21일(토)이니까, 벌써 한 칠이 다됐네."

그러니까 당시로는 전화도 없었고, 개인통신이 어려운 시절이라, 출산한지 6일째 되는 날, 내가 온 것이었다. 끝내 무엇을 낳았는지 물어 보지도 못했다. 저녁에 장인께서 퇴근하셔서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이 서방! 축하한다! 아들을 낳아서 참 기뻐 제?"

"예? 예…."

얼떨결에 아들을 낳았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나도 이제 아버지가 되었다. 나의 아버지 돌아가시고 꼭 1년 6개월 만에 대를 이어 주셨다. 내자는 남매가 없고, 자매만 셋 있어서 은근히 나도 장인을 따라 딸만 낳는 게 아닌가 걱정도 많았는데, 용케도 내자가 아들을 낳아 주었다.

나는 모포초교에 초임으로 발령을 받고 그렇게 재산 1호를 챙겼다.

30. 고기반찬과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평생을 논·밭 일구고 경작 하시다가 생을 마치셨다. 나를 쉰하나에 낳으셨으니 이 또한 오늘날에서는 경천동지할 일이 아니겠는가? 아버지(1899년 고종 광무 3년 출생)의 목표는 나를 초등학교에 졸업시키고, 서당에 다니게 해서 인간생활에 필요한 사성을 쓸 줄 알고, 기제사에 축문만 쓸 줄 알면 된다고 생각하신 모양이셨다.

"아버지, 이제 초등학교만 졸업하고는 밥 못 먹고 삽니다."

"그래도 살아야지. 농사짓고, 밭농사하고 그러면 살지. 장가가서 그래그래 살지."

"아버지 이제는 시대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사람 사는 것은 그저 그런 것이다."

"아닙니다. 전 공불해야 합니다. 그래서 선생이 꼭 될 겁니다."

"뭐~까(무엇으로) 공부한데…"

"제가 벌어서 하지요."

"몰라. 어떻게 지가 벌어서 한다고?"

"예. 제가 벌어서 합니다."

독학하고 경주고등학교에 입학해서 돈이 되는 아르바이트는 모두 하였다. 교육대학에 입학하였다. 교사자격증을 취득하고 드디어 초등학교 선생이 되었다. 당시 경상북도 영일군 교번 끝번 55번 모포초등학교에 발령이 났다.

그때서야 아버지는'나는 정말 못할 줄 알았는데 네가 정말 선생하게 되었구나.'하고 항복(?)아닌 항복을 하셨다.

뜻이 있어 장가가라는 것 뿌리치고, 공부(=중등준교사 국어 공부)를 더 하려고 했는데 자식을 더 기다려 주시지 않고 그만 돌아가셨다. 늦게야 정신 차리고 장가를 갔는데 아버지는 안 계시었다. 늘 어머니께 미안하였다. 열 자식 낳아 막내인 내가 결혼을 하고 아버지께서 눈을 감으셨다면 좋았을 텐데 기어이 내 아망에 그것도 아버지 돌아가시고 난 후 결혼하게 되니 정말 미안하였다.

모포에서 후릿그물로 얻은 고기하며, 학부형님께서 일찍 일 나가신다고 새벽에 마루에다 고기 두고 가신 것하며, 늘 고마운 일들이었다. 모포에서 해조류인 미역도 먹고, 생선이 떨어질 날이 없이 지속적으로 쌓이게 되었다. 내자는 많은 생선을 감당하지 못했다.

"여보! 저 많은 생선을 어쩐다지요?"

"자, 지금부터 시범을 보일 테니 보십시오."

말을 마치게 바쁘게 도마와 칼을 준비하고, 큰 물동이에 물을 가득 들여다 놓고 마당에서 시범을 보이었다. 싱싱한 고기는 반찬을 해도 나 혼자 먹거나, 아니면 구워도 먹었다. 고기가 지천으로 쌓이니 어쩔 수가 없었다.

생선은 한 마리, 한 마리 배를 갈라서 내장을 끄집어내었다. 물에 깨끗하게 씻어서 철사에 꿰었다. 철사에 자꾸 꿰었다. 빨랫줄처럼 자꾸 꿰었다. 늘어서 말리었다. 큰집에 갈 일이 있으면 포대기에 꼭꼭 눌러 담아서 갖다 드렸다. 경주 내륙지방에서는 바닷가에서 말린 생선을 어머니께서 잘 잡수었다.

참! 아버지께서 계셨더라면 일단 싱싱할 땐 회로 술안주 하실 수 있었을 텐데. 안 그러면 적당히 소금을 쳐서 바로 구워 먹어도 좋았을 텐데. 마르면 적당히 무를 넣고 끓여서 두고서 밥반찬으로는 생선이 제일 좋았을 것이다. 경주만 해도 내륙지방이라 생선을 사다 먹어야하기 때문에 겨우 갈치나 멸치로 족한 것이었다.

우리 집에는 누나들이 많아서 매형들이 자주 오셨다. 당시 최고 반찬이 무를 썰어서 넣고 마른 생선을 함께 찌져 먹는 것이 최고 반찬이었다. 오늘 내자가 생선을 굽고, 찌지고, 조려서 한상 가득 올려 주는데 진수성찬이 이 아니랴? 바닷가로 발령을 받아서 생선은 정말 많이도 먹어 보았다. 이 또한 모포초교로 발령받아 온 덕이 아니던가?

근무를 하면서 제사 지낸 집에 초대되어 갔는데, 이 아니 웬 일이냐? 나오는 것 반찬 모두가 생선 일색인 것을 정말 모포초교로 발령 받아 온 것은 행운 중에 행운이었다. 내륙지방에서 채소 반찬만 먹다가 생선 반찬을 먹으니까 밥맛도 좋을 뿐만 아니라 소화도 잘 되고, 우선 반찬을 구해 먹는다는 데는 얼마나 좋은 일인가?

늘 아버지의 밥상이 걱정이었던 어머니는 모포 초임지에 오셔서 몰래 아버지를 생각하고 계신 듯 했다.

"아이고! 이런, 밥상에 생선이 이렇게나 많이 있네."

"왜 반찬이 마음에 안 듭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좋은 생선반찬이 그 옛날에 있었더라면 네 아부지가 얼마나 잘 잡수었겠노?"

"갑자기 아버지는 왜?"

"아니. 그래 생선을 보니까 생각이 나네."

"내 어렸을 때 아버지는 갈치 구어서 반찬 잘 하시더구먼."

"그래. 그 때는 그랬지. 아이들에게 안 주고 어른이 밥을 잡수어야 일을 하시지. 그래서 그랬지. 너희들에게는 주지 못했지."

"아니, 갈치꼬리 가느다란 것을 새카맣게 구어서 나에게 주더구먼."

"맞아, 맞네! 너희들에게는 그저 생선 흉내를 내면 되지. 그래서 꼬리라도 버리지 않고 꾸어서 주었지."

"그런데 구운 갈치 꼬리도 나만 주데 예. 그때는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르겠습디다."

이제 효도를 하고자 하나 나의 부모님은 모두 기다려 주시지 않는다. 두 분 모두 고향 선산에 누워 계신다. 나를 쉰하나에 두신 아버지께서 오래 사실 수가 있었겠나?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에 회갑 맞으셨다. 아버지 연세 76세에 수(壽)를 다하셨으니 우리집안에서는 장수하신 축에 드신다. 시골 농경시대를 겪으신 분이다. 조부 59세, 백부 60세, 작은아버지 60세에 돌아가셨다.

기어이 나는 선생을 하고서, 모포에서 고기반찬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제4부 파도소리, 풍금소리

31. 용의검사와 자연목욕탕

1973년! 4학년 담임을 맡고서 매주 월요일에는 용의검사를 하였다. 손톱, 발톱, 목의 때와 머리카락 길이 등 검사하여 개인용의검사 누적표를 완성한다. 그런데 아무리 검사를 하여도 발전이 없었다. 즉 목이나 손의 때가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리, 아무리 검사를 위하여 씻거나 자르고 단정히 하여 오라고 하여도 진전이 없었다. 이를 어째, 무슨 방법이 없을까?

마침 교무회의에서 이번 주 '자유학습의 날'에는 단체로 자연목욕탕인 시냇가로 간다고 발표가 있었다. 드디어 수요일 자유학습의 날이 왔다. 집에서 사용하던 수건과 비누를 가지고 오라고 하였다. 형형색색의 수건을 가져오고, 비누도 종류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어쨌거나 단체로 시냇가목욕을 위해 데리고 가야했다.

교실을 벗어나서 단체로 시냇가로 가는 도중에는 동요도 부르고 두 줄을 지어 끝없이 이어서 걸어갔다. 그것도 비포장도로에 먼지 날리며, 가끔가다 화물차가 지나가면 도로먼지를 모두 덮어 쓰기도 하였다. 길가 이름 모를 풀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다. 간혹 아는 이름의 꽃을 볼라치면 자기가 아는 꽃이라고 떠들면서 갔다. 이름 모를 노란 꽃, 제비꽃, 민들레도 우리가 지나가면 마치 환영이라도 하듯 반겨준다.

가는 곳이 궁금하였다. 교감선생님께서 훈시를 할 때 오늘 가는 곳은 학계리 가는 길에 민물과 바닷물이 합수되기 전에 있는 시내로 간다고 하여 모포 2리 칠전을 지나갔다. 이제 칠전 마을회관 앞도 지나니 동네 어르신들께서 "너희들 오늘 어디가나?"하신다. 뇌성산이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서'오늘 모포초등학교 자연목욕탕에 가는 구나.'하는 것처럼 높이 서 있다.

1∼6학년 270여명이 단체로 줄지어 목욕하러 가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정말 시골이 아니고서는 이런 광경이 어디 있으랴. 그것도 가림도 막힘도 없는 시내 거랑인 자연목욕탕인 것을. 거랑에 도착하였다. 주의사항을 듣고서 제일 먼저 1·2·3학년이 한 그룹으로 물이 얕은 곳으로, 4·5·6학년 남학생은 학계리 재필 쪽으로 저학년 그룹을 가운데로 4·5·6학년 여학생은 칠전 쪽으로 자리를 지정하여 주고서는 목욕을 시작하였다. 그러자 키가 큰 남학생들은 자꾸 4·5·6학년 여학생들이 목욕하는 쪽으로 기웃거렸다.

시골은 시골이다. 한꺼번에 이렇게 큰 목욕탕에서 목욕을 시작하다니. 자연이 주는 최대한의 혜택이다. 물을 덥히지 않아도 목욕물이 되고, 자연히 흘러가는 도랑물에 몸의 때를 불리고, 벗기고 있다.

한편 성질 급한 아이들은 물에 들어가자 말자 자갈돌로 때를 벗기고서는 따갑다고 호들갑을 떤다. 일단 때는 물에 몸을 불려야 된다고 주의사항을 덧붙였다. 수영할 줄 아는 아이는 벌써 깊이 들어가서 물장구를 친다. 그러면 옆의 아이들은 이 튀는 물을 피하기 위해서 물가로 나오고 만다. 이러나저러나 자꾸 시간이 흘러가니 저절로 몸에 때가 불기 시작한다. 자갈돌로 쓱쓱 문지르고 비누칠을 열심히 해대고 비누거품을 만드는 아이들도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것은 장관이다. 270여 명이 단체무료로 자연목욕탕에서 때를 벗기고 있다니. 게다가 시끄럽기는 시장같이 와글와글 거렸다.

때를 다 벗기고 단정하게 된 사람부터 검사하여 합격하면 집으로 먼저 돌려보낸다고 하니까 키 큰 남학생들은 부리나케 검사를 하러 나온다. 물론 합격할 리가 없다. 빨리 집으로 가서 놀려고 검사만 맡으로 온 것이었다. 불합격을 받고서는 기분이 상했는지 물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시간이 40분이 지나자 이제부터는 학년별로 검사를 제법 받으러 나왔다. 제법 합격을 받고 일찍 가는 여학생들이 보였다.

늦게까지 모두 합격을 시키고서 교사들도 교감선생님과 함께 귀교했다. 자! 오늘 이렇게 자연목욕탕 단체목욕을 했으니 월요일 개인별용의검사 누적표에는 ○표가 많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손·발톱, 머리카락은 또 어떻게 될까? 포켓검사도 가끔 같이 곁들일 때도 있었다. 물론 호주머니 검사에서는 깜짝 놀랄 때도 있었다. 남학생들 호주머니 속에는 가끔 미역 귀다리를 넣고 다니기도 하였다. 점심 거르는 학생은 미역귀가 밥이기 때문이었다.

월요일이다. 개인용의검사 누적표를 하나하나 체크하면서 역시 단정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첫째, 남학생들 바지는 헤어 진 곳이 많았다.

둘째, 여학생들 신발이 많이 낡았다.

셋째, 남학생들 머리카락은 제 때 자르지 않아 너무 길다.

넷째, 남·여 모두 세수만 하고 얼굴에는 아무것도 바르지도 않았고, 또 얼굴에 부스럼이 많이 나기도 하였다.

이를 어째, 아무리 용의단정을 강조하여도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해결되지 못하는 것이 많았다. 아무리 가난해도, 아무리 헌옷이라도 깨끗하게 세탁하여 단정히 입으면 달라졌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이를 검사하고 표시하고 변화를 일으키려고 계속 검사하였다.

차츰 용의가 달라지고, 남·여 학생들의 전체 모습이 좋아 보였다. 이제는 개인별용의검사 누적표를 스스로 기록하도록 하여 그 발전됨을 스스로 느낄 수 있도록 자율화하였다. 그래서 인간은 통제보다 자율이 좋은 것인가 보다. 확실히 스스로 용의단정을 꾸려 나갔다.

그러자 이제는 자연의 목욕탕이 사라졌다. 이것이 교육이다. A를 A′로 만드는 것이 교육(敎育)이다.

정말 교사의 경험으로 보아 시골에서는 업무도 많지만, 변화하는 결과인 교육의 재미(?)를 톡톡히 느꼈고, 교사도 인간으로서 엔도르핀을 많이 생산하여 삶의 욕구해소도 늘어난 것으로 느꼈다.

32. 새마을 조기청소하다

학교 생산관련(=새마을) 업무를 맡고, 자료업무를 관리하다 보니까 자연히 앰프를 관리하여야 하고, 조기청소 하는 것도 관리하여야 했다. 모포초등학교 각 마을애향단을 구성하였다.

내가 어렸을 때, 아니 초등학교 고학년이었을 때 보이스카트나 걸 스카우트도 있었다. 그러나 가난한 집 아이로 분류되면서 아예 그런 단체에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 왜냐하면 입단비, 단복비, 그리고 잡지구독비 등 돈이 들기 때문이었다. 어린 심정으로 상당히 사회적 배신감을 느꼈다. 모두가 돈이 관련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아예 시골아이라 돈을 내지 못할 것으로 낙점이 찍힌 것이었다. 나도 사회에 봉사할 수도 있었는데….

내가 초등학교 다녔을 때는 성인들이 문맹자가 많아서 '문맹자교육'에도 동원되었다. 학교를 파하고 나면 소 흑판을 둘러매고 동사(洞舍)에 갖다 두고, 야간에 유리 깔때기에 시커먼 연기가 나는 램프를 켜고, 동사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동네 어른들께서 모이셔서 내가 쓴 가로에 ㅏ, ㅑ 순으로 적고, 세로에 ㄱ, ㄴ 순으로 적어서 우리 한글을 가르쳤다. 발간된 한글초보 책자를 통하여 문맹자교육을 한 기억이 난다. 'ㄱ에 ㅏ하면 가하고, 가에 ㄱ하면 각하고'등 이렇게 가르친 기억이 난다.

그러나 모포초등학교에서 애향단에는 그 마을 최고학년 중에 대표를 뽑고, 아침에 학교를 오려면 모아서 새마을노래도 부르고, 반드시 모여서 줄을 서서 오도록 하였다. 왜냐하면 단체로 다니면 차조심도 되고, 단체로 협동심도 발휘하게 된다는 취지이기도 하다.

애향단은 마을대표가 있어서 남학생이 한 줄로 먼저 서서 따라오고, 다음이 여학생이 한 줄로 서서 따라온다. 하교를 할 때는 마치는 시간이 달라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어떤 마을에서는 멀리가기에 저학년이 빨리 하교하지 않고, 놀면서 기다리다가 고학년과 같이 아침에 오듯이 함께 행동하는 마을도 있기도 하였다.

아침 5시 반에 일어나면 먼저 학교에 가서 조용한 바닷가를 깨우는 일을 하였다. "새마을노래"를 켜고, 신세기 체조인"국민체조"음반을 찾아 켜 놓고 내 담당마을인 대진리로 가야 하므로 모포 2리 칠전을 거쳐 바닷가로 뛰어 간다. 운이 좋은 날은 바닷가에서 한치 한 마리라도 주울 때 있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좋은 밥반찬이 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봉사활동도 되고 불로소득도 된다. 이것이 일거양득이 아니랴.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푸른 동산 만들어 알뜰살뜰 다듬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서로서로 도와서 땀 흘려서 일하고 소득 증대 힘써서 부자 마을 만드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우리 모두 굳세게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워서 새 조국을 만드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이 '새마을노래'가 힘이 되고 의지가 되며, 이 노래로 인하여 마을에 활기가 띠는 것처럼 느꼈다. 각 마을마다 고학년 대표를 두어, 아침청소를 마치고 아침체조를 하고 나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서 아침밥을 먹고 등교하기 위하여 모이게 되어 있다. 각 마을 대표자가 새마을 기를 들고 기다리면 모아서 학교로 함께 온다.

나는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 와서 아침을 먹으면, 그 아침밥이 바로 보약이었다. 학교 근처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 일을 눈·비 오는 날을 제외하고서는 거의 매일 진행하였다. 처음에는 습관이 되지 않아서 어려움도 겪었지만 중요한 것은 반복적으로 지속적으로 하다 보니까 오히려 일찍 일어나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하였다. 물론 방학 때도 이러한 새마을 조기청소를 계속 지도하니까, 이제는 저학년까지 제 키보다 큰 비를 들고 자기 마을청소를 하겠다니 이 운동이야 말로 밑바닥으로부터,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짜 "애향청소년단"이 된 것이었다.

이러한 진풍경은 시골학교가 아니면 볼 수 없는 그런 장면일 것이다. 처음에는 내자가 오해도 하였다. 왜 새벽같이 일어나서 학교를 가고, 남이 잠을 잘 시간에 노래를 틀어서 잠을 깨우는가와 새벽 동네까지 마을청소 한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차츰 습관이 되고, 한치도 주워 오게 되니까 즐거워하였다. 국가의 정책도 그러하거니와 무슨 일이든지 억지로 하면 하기 싫어지고 하지도 못하고 만다. 그러나 스스로 찾아서 즐거이 할 때는 말려도 안 되고 말릴수록 더 하려는 것이 인간의 심리다.

모포초등학교 새마을조기청소는 그 후로도 지속적으로 학생들에 의해서 만들어져 갔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행동일까? 물론 처음에는 학교에서 강제성이 있었지만 조금 지나서 자율적으로 행동하게 되니까 이것이 바로 습관이요, 행동으로 굳어지는 일거양득이 아니겠는가라고 반문하게 되었다.

새마을정신은 스스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어려서부터도 적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에 누적된 봉사활동은 그 사회를 빛나게 만들 수도 있고, 그 역할이 확대되면 그 마을에서 빛이 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었을 때 '문맹자교육의 기수'를 한 기억에서 일찍부터 봉사활동에 대한 이미지가 오버 랩 되어서 천상 교사가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모포초등학교에 근무하면서 참 많은 업무를 접하고, 교사이기 전에 조직 속에서 작은 열매를 맺어 주는 매개자 역할을 스스로 찾아나서 준 것 뿐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어서다.

33. 혼식검사하다

오늘도 나의 어린 날 얘기부터 먼저 하여야겠다. 우리 집에는 형님이 많았었다. 점심밥을 큰 대소쿠리에 퍼 놓아서 저마다 숟가락을 들고 그 소쿠리 보리밥 위에 금을 그어 놓고 먹어야 했다. 형님들은 내 금 밑으로 파고 들어와서 다 먹어 버리고 내가 먹으려고 하면 밑이 푹푹 꺼져서 먹을 밥이 항상 부족하였다. 그나마 날이 가물지 않아서 보리밥이라도 먹을 수 있었지, 한해(旱害)가 심하면 조, 무, 감자, 고구마 밥으로, 저녁에는 아예 산나물 죽으로, 희멀건 물로 된 죽을 먹어야 했기 때문에 허기진 배를 채울 길이 없었다.

날이 가물어 심할 땐 쌀 한 톨이라고는 구경 못하는 농촌의 현실이었다. 그래서 노란 좁쌀로 밥한 것이 전부 일 때, 조밥 위에 10% 쌀이 아버지 밥그릇에만 얹히고 우리들 밥그릇에는 항상 노란 조밥뿐이었다. 정말 어려서도 흰 쌀밥을 먹는 것이 그렇게 소원이었던 시절이었다.

점심이 아예 없었던 적이 많았다. 우리 집에는 어머니께서 무명베, 삼베, 명주를 고루고루 직접 짜셨다. 학교 갔다 돌아오면 마당 한가운데 불을 피워 놓고 '베 맨다.'고 하였는데, 다시 말하면 씨줄의 실에다가 풀을 먹인다는 것이다. 풀을 쑤기 위해서는 풀매를 완전히 갈리지 않은 찌꺼기 쌀들을 모아서, 먹고 버린 달걀 빈 껍질에 달걀밥을 하는 것이었다. 배 매는 불 속에 계란밥을 2∼3개 구워놓았다가 나에게 먹이곤 하였다. 이것도 점심을 대신하는 지혜이었다. 나의 초등학교 시절인 1957∼1963년, 이 시대가 정말 배고픈 시대이었는가 보다.

1974년에 "영양 많은 잡곡혼식 건강 주고 나라 부강", "너와 나의 혼식으로 국력증강 찾아온다.", "풍년에 쌀 아껴 식량자급 이룩하자." 등 식량 소비절약운동 표어가 등장했다. 아울러 더 멋있는 표어도 있다. "살림위해 분식하고 건강위해 혼식하자." 이러한 표어가 수백 장씩 인쇄되어 벽마다, 교실마다, 가정마다, 보이는 곳곳 마을마다 붙여서 홍보활동을 한 적이 있다.

이것도 국가시책이다. 국가시책은 초등학교로 부터인 것처럼 모든 초등학교를 통하여 가장 많이 시행되었다. 물론 중·고·대학에서도 하였겠지만, 정부시책이 잘 먹혀들지 않았는지 대통령께서 초등학교 경력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특히 초등학교를 기준으로 삼지 않았나 생각된다.

지금도 흰쌀밥만 해서 먹지는 않는다. 스스로 숙달이 되어서 내자도 반드시 잡곡을 섞어서 혼식을 해서 먹는다. 1970년대에는 학교에서 혼식검사라는 것을 하여 매일 표시를 하고, 누가표를 만들고 장학지도시 확인하게 하였다.

4학년 우리 반 아이 51명이 있다.

"모포초등학교 개인별 혼식 조사표"라는 양식의 표가 배부되었다. 처음에는 학생들 도시락을 매일 조사 하려니 매우 귀찮았다. 그래도 정부시책이라고 하니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일단 표를 걸어 두고 30%이상이면 ○표, 10%정도면 △표, 잡곡이 하나도 섞이지 않았다면 ×표 등으로 구분 표시하여 누가표를 기록하여 두는 것이다.

수업을 하다가 무슨 음식 먹는 소리가 자꾸만 들렸다. 판서를 하다가 재빠르게 돌아보니 L군이었다. 딱 걸렸다.

"L군! 지금 수업시간에 무엇하고 있습니까?"

"…."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저 우물거리던 입이 꽉 닫혀 버리고 함구하고 있었다.

"L군! 왜 그러느냐?"

다가갔다. 책상 서랍 속으로 손이 들어가 있고, 꼼지락 거렸다.

"아니 L군! 이게 뭐고?"

교실의 아이들이 까르르 웃었다. 이제야 반장이 한마디 한다.

"쌤요! L은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이제 아침 먹는가 보네요."

또, 학동들이 까르르 웃었다.

"뭐라고! 아침이라고? 아침이 어디 있나?"

아이들이 일제히 '미역귀다리'라고 한다.

"아니, 다른 아이들은 혼식을 확인하여야 하는데, L군은 아침밥을 먹지 못했으니까, 배가 고파서 미역귀다리를 먹고 있지 아니한가! 참 세상이 고르지 못하다.

그런대도 혼식검사는 계속해야만 하였다. 그러면 왜 정부에서는 혼식하여야 하는가를 정부시책으로 삼았는가? 새마을정신으로 농촌을 부흥시키려면 국민 개개인이 잘 살아야 한다. 대통령께서는 옛날에 논 한마지기에 벼 한 가마를 생산하던 것을 통일벼를 만들고 나서 최고 17가마를 생산하였다니 이 또한 대단한 부자로 만들어 주려는데 일조하지 않았는가. 또 그뿐이랴. 술, 막걸리를 빚을 때 쌀로 술 못 만들게 까지도 하였다. 옥수수 술, 좁쌀 술 등 여러 가지 기술연구로 쌀을 증산하고, 쌀을 아껴 국민들 스스로 절약정신과 내핍생활이 몸에 배이도록 철저히 시행하였다. 국가정책인 혼식검사를 하고, 그만큼 쌀의 중요성과 국민의 건강을 알도록 한 것일 것이다. 초등학교 교사를 하길 잘 선택했다고 생각하였다.

분식하고 혼식해서 잘 살아 보자고 국민들에게 강요한 것을 굳이 아무도 싫어하지 않았다. "살림위해 분식하고 건강위해 혼식하자."이러한 표어는 신문을 통하여 응모 받아 국민정신 계도에 한 몫 하였다고 생각해보면 그 깊은 뜻을 알고도 남을 일이다. 바쁜 국정 속에서도 국민 개개인이 잘 살아 보라는 깊은 뜻이 담긴 것을 말이다.

매일 도시락 뚜껑을 열고, 여러 가지 반찬 냄새를 모두 맡아 가면서 열심히 도시락 혼식검사를 한 교사로서 책무를 다한 것이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잘 살 수 있게 된 원동력이 아니었는가 싶다.

34. 파리잡기하다

어렸을 때는 웬만하면 한 집마다 소를 키우는 것이 관례이었다. 이 소를 키우면 자연스레 파리, 모기, 쉬파리 등이 생기게 마련이었다. 손님으로 가면 집집마다 파리채가 있었고, 심심찮게 파리를 잡아 댄다. 여기서도 딱! 저기서도 딱, 파리 잡는 소리가 요란했었다. 일손이 바빠서 사실상 파리 잡을 어른도 별로 없었다. 파리는 자연 발생적으로 사람과 공동생활을 하게 된다. 밥상에도 자주 내려앉고, 심지어 밥그릇에도 붙어 버린다. 고기라도 구우면 더욱 파리가 기성을 부리기도 한다.

나의 초교시절에서도 파리를 잡아 오라는 특명이 있어서, 이러한 정책이 실시되었다.

첫째, 파리를 잡으려면 파리보다 빨라야 일단 잡을 수 있다. 맨손으로는 안 잡히고, 그래도 파리채가 있어야 90%이상을 잡을 수 있다.

둘째, 파리는 도구로 잡을 수도 있다. 도구는 기름종이를 천장에 매어다는 방법이 있고, 또 유리항아리 속에 물을 넣어서 파리를 유혹하여 잡는 것도 있다. 어렸을 때는 작은 성냥갑이라도 하루에 두 통을 잡기에는 힘이 들었다. 어머니나 누이들에게 부탁하여 잡아서 채워가는 것이었다.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도 그랬지만, 작은 성냥갑에 파리를 잡아오라는 숙제가 간혹 있었다. 그러나 중․고등학교 시절에서는 잘 이행되지 못하였다. 즉 잘 잡아오지 못하였다.

파리와 사람의 관계는 어떠할까? 파리의 발생원은 주택가의 쓰레기 처리장(집파리), 산과 들의 쓰레기통(검정파리·금파리·쉬파리), 해변의 어물 건조장(금파리), 양돈과 양계장 및 퇴비장(애기집파리·큰집파리·붉은종아리큰집파리), 목장의 축사와 배설물(검정집파리·제주등줄집파리·침파리) 등이다. 그 밖의 발생원으로는 산과 들에서 죽은 동물시체와 배설물, 야외 재래식 변소에서 쉬파리·검정파리·금파리가 발생한다.

집파리는 장티푸스·콜레라·아메바성 이질·세균성 이질 등의 병원체를 몸에 난 털과 발에 묻혀 전파시키기도 하고, 병원체와 함께 먹은 것을 토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병원균이 직접 전파된다. 집 밖에서 활동하는 파리로 가끔 집안에 침입하는 검정금파리는 소아마비바이러스를 옮기고, 아프리카의 체체파리는 열대수면병의 병원체인 트리파노소마를 매개한다. 검정집파리는 가축의 눈언저리와 입, 상처 등을 맴돌면서 병을 옮겨 승저증을 일으켜 큰 피해를 준다. 또한 농작물에 세균성 병을 옮기기도 하고 진딧물을 몸에 난 털이나 다리에 붙여 성한 작물에 전파시킨다.

간혹 중국 영화를 보면 젓가락으로 파리를 잡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그것은 그만큼 빠르다는 것으로 검객을 돋보이려는 수작일 것이다.

1970년대 시골에서는 파리가 많았다. 귀찮을 정도로 파리가 많았다. 일부 집에서는 모기장으로 쓰던 것을 계속 방문에 걸어 두기도 하였다. 학생 1인당 작은 성냥 통에 두 갑씩 잡아서 제출하라는 것이다. 실적을 사진으로 찍어서 교육청에 보고하는 것이었다. 정책이 하도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이 드는 시대이었다. 시골 가정집에 가보면 파리 잡는 기계가 웬만하면 한 개씩 있었다. 하루 종일 잡아서는 그냥 버리면 또 살아남기 때문에 깡그리 태워 없애 버렸다.

파리 잡는 기계방식이 재미나다. 유리그릇처럼 생긴 파르스름한 통에 안으로 오그라진 그곳에 물을 붓고 바닥에 밥풀을 헤쳐 놓아두면 밥을 빨아 먹으려고 날아들다가 그만 물에 빠져 날개가 파닥이면서 제 스스로 물에 빠져 잡히는 원리이다. 식당에서는 파리 잡는 기름종이가 주렁주렁 매달리던 시대이었다. 물론 제일 흔한 것이 파리 잡는 파리채다.

집파리와 아기집파리는 대다수 화장실과 주방을 오가며 생활하는 특성으로 인하여 전염병 매개의 이동과 정신적인 불결감, 시각적 불쾌감을 높이고 있다. 특히 파리는 각종 전염병의 기계적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파리는 사람의 음식물 이외에도 분뇨, 침, 콧물, 고름 등을 섭취하는 습성이 있으며, 반고체성 먹이를 먹을 때 먹이의 임시저장 역할을 하는 소낭의 내용물을 토해내는 습성이 있다.

이러한 파리의 족속이 우리를 귀찮게 하고 있으니 '정부시책으로 파리를 대대적으로 잡아라.'는 공문까지 오는 것이 아닌가. 시골의 가정환경이 이러 할진데 어찌 이를 잡지 않으랴. 잡으면 그만큼 각종 질병을 예방할 수 있고 아예 시각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불쾌감도 덜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을 정부에서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각 가정마다 어른들이 시간을 내어 잡을 수도 있지만, 초등학교 학생들이 파리채로, 기름종이로, 파리 잡는 기계로 여러 가지 수단으로 파리를 박멸하자는 국민운동에 동원되기도 한 것이다.

파리를 작은 성냥 통에 각 2통씩 잡아왔으니 우리 반에서만도 100여 통이나 된다. 한 통에 200여 마리로 환산하면 2만 마리나 잡았다는 결과다. 이것을 전국적으로 초등학교만 해도 대단한 효과가 발생한 것이다. 꼭 잡지 않아도 파리를 박멸하는 국민운동으로 벌인 것이 새마을정신에 꼭 부합되는 일이기도 하다. 그만큼 환경에서 좋아지고, 국가시책에 부응하여 단합된 국민행동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상하게도 제출된 성냥갑이 보통 갑보다 무거웠다. 그래서 열어 보니까 윗부분에만 파리가 있었고 밑에는 모래알을 넣어서 갑을 채워 제출된 것이었다. 생각보다 파리잡기가 귀찮고, 힘이 드니까 잔꾀를 부린 것일 게다. 혼자 씁쓰레한 결과에 웃고 말았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성냥 통에 출석번호를 써서 제출하라고 하니까 바로 들통이 났다.

학교 전체로 모두 모아서 파리를 화장하기 전에 사진을 찍었다. 화장 즉 불에 태우는 것이다. 하물며 이런 사진 찍어서 교육청에 보고하는 시대이었다.

35. 쥐꼬리 모으다

또 교육청에서 공문이 왔다. 이제는 학생들 각 가정을 통하여 쥐잡기를 실시하여 잡은 쥐의 꼬리를 끊어서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배부된 '쥐잡기의 날'포스터를 배부하여 경각심을 깨우치고 정부시책의 홍보가 되도록 하라는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까지 철저히 교사들을 활용하는지 정말 대단하였다. "쥐 잡는 날"은 전국적으로 같은 날짜로 정해서 한꺼번에 쥐가 발붙일 곳이 없도록 통일한다고 이를 지키기 위해 대단한 당부가 있었다.

쥐의 특성을 알고 쥐약을 놓는 방법도 상당한 이론이 있다. 물론 쥐를 잡는데 약이 필요하고, 쥐약은 위험하기 때문에 쥐약 배포는 면사무소를 통하여 성인들에게 배부되었고, 학생들에게는 잡은 쥐들의 꼬리를 끊어 오게 하는 것이다. 집집마다 표어와 포스터를 붙이고 전국이 같은 날짜에 공동으로 쥐를 잡게 정신적으로 홍보를 하는 것이었다. 쥐 잡는 날 하루 전에는 학교에서 표어작성과 포스터그리기를 하여 시상도 하였다.

쥐잡기가 정부주도로 시작된 것은 1950년대 중반부터라지만 군사작전을 방불케 해 조직적 거국적으로 시행된 것은 박대통령 시절이었고, 보건위생보다 식량자급 목적이었다. 1970년대 초 통계로 우리나라의 쥐를 1억 마리로 쳤을 때 쥐들이 축내는 양곡이 연간 32만t에 달했다. 1970년 1월 26일 시작된 제1차 쥐잡기 사업에서 "4,300만 마리를 잡아 106만 6천 석의 양곡손실 방지효과를 올렸다."는 것은 대통령에게 보고된 내용을 그대로 믿는다면 가히 놀랄 만한 효과다. 각 도별로 마릿수까지 할당 지시했던 그 시절이다.

전국 쥐 잡는 날로 정하고 그 이튿날에는 쥐꼬리를 두 개 이상을 가져 오는 날이다. 문제는 쥐가 잡히지 않은 아이들은 걱정이 태산이다. 쥐꼬리를 두 개 이상 제출하여야 하는데 쥐는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오징어 꼬리를 적당하게 거슬려서 흡사 쥐꼬리같이 만들어 제출한 학생도 있었다.

전 국토에 쥐도 참 많았다. 사람 먹을 쌀도 없는데 쥐가 축내는 식량이 정부가 발표한 통계로 정확이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아무튼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쥐는 쌀만 축내는 것이 아니라, 문이나 창틀 가구를 이빨로 갉아 구멍도 내놓고, 전염병도 옮기고, 전기 줄도 이빨로 갉아 누전되어 심하면 화재까지 불러오는 등 한마디로 아주 없어져야 할 존재였다. 그때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 쥐가 많았다. 부엌이 하수구와 바로 연결되어 있어 하수구에 사는 모든 쥐들이 집 부엌은 다 한 번씩 와보는 것 같았다. 식은 밥과 반찬이 들어있는 부엌의 찬장은 하도 쥐가 여기저기를 갉아놓는 바람에 흉한 모습으로 변했고 찬장 뒤에는 항상 쥐똥이 수북했다. 밤에 천정에서 우당탕탕 뛰는 것은 기본이고 밤새 방문이나 창살을 바각바각 이빨로 갉는 바람에 그 소음에 잠에서 깬 적이 한두 번 아니었다.

어떤 용감한 쥐는 방에까지 들어와 책상 밑에 쌓아둔 책 뒤나 장롱 밑에 아지트(?)를 꾸며놓고 살기까지 했다. 새까만 쥐똥이 수북이 쌓은 곳을 발견하고 쥐똥을 치우는데도 화가 났다. 그때 쥐를 잡는 방법은 쥐약, 쥐틀이 대종을 이루었다. 쥐약은 쥐잡기에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쥐약을 개가 먹거나, 쥐약 먹고 죽은 쥐를 개가 먹어 애꿎은 개가 희생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사람도 자살도구로 쥐약을 사용하여 신문에 쥐약 먹고 자살한 기사가 심심찮게 나왔다. 어디 그뿐인가? 쥐약을 먹은 쥐가 괴로워 이리저리 헤매다가 마당 한가운데에서도 죽고, 부엌에서도 죽고, 어디 보이지 않는 곳에 기어 들어가 죽기도 하는 바람에 쥐약을 놓는 것은 죽은 쥐를 찾아야 하는 애로사항이 뒤따랐다.

'찰카닥'하는 소리와 함께'찌익~'하는 쥐의 비명소리가 들리면 유유히 방문열고, 부엌 한쪽에서 버둥대는 쥐를 연탄집게로 한방에 내리쳐 즉사시키는 방법으로 많은 쥐를 잡았다. 어처구니가 없다. 하기는 이런 식으로라도 했어야 학교에 쥐꼬리를 제출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도시에서 살아도 일반 주택에서나 오래된 아파트에서는 쥐가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요즘은 누가 쥐를 잡아 꼬리를 제출할 것인가? 정부시책도 그렇지만 이제 옛날처럼 시행할 사람도 없다. 그때는 그런 정책을 싫다하지 않고 국민 모두가 함께 뜻을 모았던 것이다. 이러한 것이 오늘날 삶의 바탕이 된 것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36. 재필에서 도깨비 만나다

고학년 담임이라 오후 수업이 있었다. 시골 초등학교 근무는 작은 일이라도 출장을 다녀와야 한다. 출장지는 면소재지 장기이었다. 금오까지 2km를 걸어가야 한다. 그날따라 날씨도 우중충한데, 시골 논밭 사이로, 도랑가 언덕길을 따라 걸어가야 한다. 오늘 출장은 반드시 필요하였다. 학계리 재필을 넘어 걸어가다가 깜짝 놀랐다. 제 스스로 가만있다가 길가로 사람이 걸어가니까 제를 잡으러 오는 줄 알고 스스로 놀라서 우중충한 창공을 날아오르는 장끼 한 마리가 "꿔~엉 꿩!"제 이름을 말하니까, 덩달아 따라 다니던 까투리와 꺼병이까지 놀라 함께 퍼덕이면서 날아오른다.

누가 그랬던가? 장끼를 잡는 방법은 아주 쉽다고 한다. 입고 다니는 잠방이를 벗어 돌 넣어 감싸들고 다니다가 장끼가 놀라 하늘가를 날아오를 때 힘껏 던져서 장끼를 꼼짝 못하게 잡는다고 한다. 그것이 생각처럼 어디 쉬울까 의문을 품고 있는데, 어느새 금오까지 도착하자말자 포항-감포 시외버스가 도착하였다. 금오에서 장기까지는 마치 골뱅이 속을 돌듯이 뱅글뱅글 돌아서 감돌아 산속으로 올라가야한다. 노후 된 버스도 사람을 태우고 올라가기가 힘이 드는가 보다. 연신 기어를 바꾼다. 그리곤 길길~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오후 시간은 자꾸 흘러가는데 겨우 출장지인 장기에 내렸다. 빠른 시간에 출장 업무를 모두 마치고 다시 고개를 넘어 모포로 가야 하는데, 이게 어찌 되려나? 막차가 떨어지면 난감했다. 왔던 길로 가려면 예서 금오까지 걷고도 학계리 재필을 걸어서 칠전까지 가야 하는데 오늘은 급기야 우중충한 날씨에 비가 되고 만다. 급히 서둘러 일을 마쳤다. 용케도 포항으로 가는 마지막 버스에 몸을 싣고 금오로 향했다.

여름 해라지만 비오는 날이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버스 안에서도 벌써 어둑한데 금오에서 언덕길 도랑 길, 논 사이 길을 어떻게 혼자 걸어가야 하나 하는 생각만이 머리를 꽉 매우고 있었다. 벌써 버스 차창을 때리는 빗소리가 들린다. 복잡한 머릿속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행동이 자동필름처럼 돌아가는데 어느새 금오에 버스가 닿았다. 역시 이 시간에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은 나 혼자 뿐이었다.

무거운 가방을 둘러매고 우산도 없이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그사이에 빗줄기는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오전, 오후 내내 수업하다가 그것도 2km 도보로 왔다가, 다시 2km를 걸어가야 하다니.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렇게 나를 걷게 하다니? 몸이 솜뭉치가 되면서 피곤이 엄습한다.

한참을 걸으니 비가 잦아진다. 그저 희끔한 달빛이 길을 비쳐 주고 길 가운데 뾰족한 돌들이 뒤숭숭 올라 있는 비포장 길, 시골길을 하염없이 걷고, 또 그저 걷고만 있었다. 불현듯 생각이 났다. 재필을 지나면 자연목욕탕인 거랑이 있고 그 거랑 옆으로 나무가 무성히 자라고 있다. 그래도 칠전 마을 불빛이 조그맣게 깜빡거리고 있다. 저 멀리 칠전 끝 동네에 솔숲이 보이고 군데군데 무덤이 보인다. 이러한 곳을 지나려면 한적한 그런 길인데 어떻게 통과를 해야 하는지가 궁금하였다. 오늘같이 이슬비가 내리고 희끔한 달빛만이 겨우 길을 밝혀 주는 이 시간에 말이다. 나도 시골출신이라서 이런 날씨에 길을 걸어보긴 했지만 오늘처럼 혼자가 아니었다. 그래도 그때는 곁에 동행자가 있었지만 오늘은 나 혼자다. 어쩐지 어시시하다.

그러는 사이 재필을 지나 인적이 끊인 언덕길로 올랐다. 어깨에 가방은 무게를 더했다. 고개를 들어 대진리 쪽으로 바라보는데, 시커먼 숲과 검은 거랑물 위에 도깨비불이 춤을 추고 있었다. 처음에는 섬뜩했지만, 속으로는 아무리 도깨비불이 춤을 추지만'내가 간다'는 자신감으로 막 뛰고 또 뛰었다. 큰 목소리로 아는 노래를 모두 냅다 불러댔다.

도깨비불은 밤에 습지 위로 어른거리는 신비한 빛이라고 한다. 즉, 다가가면 항상 잡히지 않는다. 전설 속에서는 불길한 대상으로 나타나며, 때로는 저승에 들어가는 것을 거절당한 사람의 영혼이 떠다니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이 현상은 메탄가스나 죽은 식물이 분해되면서 생기는 가스가 자연발생적으로 연소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으로 생각된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으로 과학적 근거를 들어 설명하여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현실은 그것이 아니다. 우선 눈앞에 어른거리는 저 불빛! 특히 한 뭉치의 횃불처럼 나타났다가 작은 불이 먼저 진행해 가면서 작은 불덩어리를 흘리고서 잽싸게 지나간다. 다시 어디쯤엔가 나타나서 그러한 보임을 지속으로 연출한다. 벌써 마음은 급하고, 바짓가랑이는 후줄근히 빗물에 젖어서 걷는데 거치적거렸다. 물론 과학적으로는 도저히 겁이 나는 그런 형상의 동물이 나타날 수 없는 것이며, 무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도 선생으로서 교육으로도 잘 알고 또 그렇게 믿고 있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반대편 저 거랑 둑으로 확 나타났다가 작은 불을 흘리면서 유유히 불춤을 추는 광경을 어찌할 것인가? 물론 내 어렸을 때 외딴집에 살아서 저녁에 늦게 놀다가 내려오면 집 뒤, 언덕에 도깨비불들이 춤추는 것을 보고 자랐지만, 현실은 지금이 문제다. 이 길을 빨리 통과해야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곁을 지나니 이제는 저 멀리서 도깨비불이 유영하고 있다. 마치 도깨비불이 '나 여기 있으니 잡아봐라!'하는 것 같다. 아니면 '나 여기 있으니 같이 놀자!'하는 것 같다.

밤에, 그것도 비 내리는 희뿌연 달빛아래 도깨비불이 춤추고 있는 검은 거랑 물과 무성히 자란 거랑 가에 키 큰 풀 곁을 빨리 지나야만 했다. 그러면 무덤 앞을 지나면서 칠전교회 첨탑이 보인다. 이제 안심이 되는 것이다.

"휴우!"

길게 한숨을 내어 쉬고 집에 도착하니 내자가 보고 한마디 한다.

"옷이 와 그렁교?

"비가 오니 그렇습니다."

"비 온다고 이래 옷 버려 오다니 참?"

"비오면 옷에 흙이 묻습니다."

말은 그래도 나는 속으로 금방 지나 온 길로 인해 오금이 저리고, 마음이 콩닥콩닥하여 말할 힘조차 없었다. 과연 얼마나 빠른 속도로 뛰었으면 바지 뒷부분까지 온통 흙탕물이 튀었을까?

누가 뭐라고 했는가? 그냥 그 길로 혼자 오면서 마음의 도깨비불과 스스로 싸운 것뿐이었다. 비 오는 날의 도깨비불과 씨름을 하다니. 20세기 과학을 배웠으면서도 이런 현실에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하기는 듣는 얘기로 밤새도록 도깨비와 싸움하고 이튿날 그 자리에 가보니 사람 피 묻은 몽당 비 한 자루 뿐이었다고 한다.

시골에 근무하면서 세상의 온갖 경험을 다 해보는 것이다. 지금도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에 그 길을 걸으면 나를 맞이하는 도깨비가 나타날까? 학계리 재필을 지나서 강구테에 나타나는 그 거랑물이 흐르고 저 만치 비 내리는 언덕에 솔숲이 보이는 그곳에 도깨비불 유영을 아직도 잊어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그 옛날에 선생 했다.'는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37. 나도 운동화를 신고 싶어요

어렸을 때 집에서는 짚신을 신었다. 그것도 어려서부터 짚신 삼는 법을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셨다. 2∼3일간 먼 거리를 가려면 짚신을 많이 삼아서 봇짐에 매달고 가다가 닳으면 버리고 새로 꺼내 신고 갔다. 일찍부터 짚신 신는 것이 일상화가 되었다.

초등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검정고무신을 사 주셨다. 그 검정고무신은 꼭 학교 오갈 때만 신었다. 집에서는 반드시 짚신이다. 그러나 비가 오면 꼼짝 못하니까 아버지께서는 나무인 나막신을 만들어 주셨다. 아버지는 반농 반목수를 하셨다. 목수 즉 농사철에는 농사짓고, 비가 오거나 추운 겨울에는 동네에 집을 지으셨다. 목수이셨기에 나무로 만드시는 것은 곧잘 만드셨다. 지게, 대바구니, 짚공예품도 곧잘 만드셨다. 밧줄 엮기, 가마니 짜기, 새끼 꼬기 등도 하셨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그 때도 잘 사는 집에서는 운동화를 신었고, 안 그러면 새하얀 고무신에 파란 테가 있는 백고무신도 신었다. 그런데 나는 검정고무신도 마음껏 못 신어 보았다.

"선상님 요! L2가 장기 장(4, 9일)에 갔다 왔어요."

"장기 장에 무엇 하러 갔는데, 왜?"

"그런데 예. 아이 구 말씀 해드려야 하나, 우짜~꼬?"

"그래. 무슨 말인데, 해 보아라."

"그런데 예. 뭘 훔쳐 왔데 예."

"뭘? 뭘 훔쳤데."

"운동화요…."

그러자 반장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고, 장기 장에 누구누구 갔다고 하나?"

"여럿이 갔답니다. L1도 갔고, K도 그리고 우리 반 아이들만 간 것이 아니고, 저학년들도 몇 명이 같이 갔답니다."

"응. 알았다."

아! 이것이 또 문제이었다. 어릴 때 물론 좋은 운동화를 신고 싶겠지. 이를 어째, 조용히 L1, L2, K 등을 불러냈다.

"그래 몇 켤레를 가져 왔나?"

L1은 한 켤레, L2는 두 켤레, K는 한 켤레라고 한다.

"갖고 싶었겠지. 어릴 때부터 그러면 안 된다. 다음 장날에 주인에게 갔다 드려라. 잘못을 빌고, 꼭 그렇게 하여라."

"예에."

"옳지. 그래야 착한 어린이지."

바쁜 업무로 잊어버리고 있었다. 수업과 수업준비, 업무 등에 정신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내 얘기로 돌아가 보자. 아버지께서 불국사 장날(4, 9일)에 검정고무신을 사 오신다고 동구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고무신을 보고 싶어서 기다려도, 기다려도 아버지께서는 일찍 오시지 않으셨다. 집에 돌아와서 기다려도 오시지 않으셨다. 기다리다가 지쳐서 잠이 들었다. 그날따라 아버지께서 늦게 오셨던 모양이다.

아버지께서 검정고무신을 사다가 내 머리 맡에 갖다 두셨다. 이튿날 아침에 검정고무신을 보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다섯 살이 많은 계형께서 나를 보고 웃으신다.

"왜 웃으시는 데요?"

"임마! 네 신발 봐라. 왼쪽 두 짝이잖아."

"아. 그러네. 아버지 왜 왼쪽 두 짝이지요?"

"응, 그래 왼쪽 두 짝 맞다. 아이가 발에 신으면 되지. 그것도 시간이 없어서 못살 뻔 했는데, 흔틀 고무신전이라 제 짝 찾기가 어려웠고, 모양만 반듯하면 되지, 괜찮다. 신어 봐라."

"예? 예."

아무 말도 못하고 나는 검정고무신 왼쪽 두 짝을 신었다.

"봐라. 신으면 왼쪽 두 짝인지 모르잖아. 이제 되었지?"

정말 신으면 모른다. 나는 왼쪽 두 짝 고무신도 좋았다. 짚신만 신다가 살갗이 매끄러운 고무에 닿으니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단지 벗으면 왼쪽 두 짝이 되지만.

그렇게 학교에서는 바쁜 일정에도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선상님 요. 다른 애들은 모두 주인에게 돌려주었는데, L2는 한 켤레만 갖다 주었어요."

L2를 불렀다.

"왜 너는 모두 갖다 주지 않았나?"

"…."

"정말 말을 안 듣는 구나. 너! 그러면 안 되지."

"…."

"다음 장날에 꼭 갖다 드려라."

"예…."

그런데 대답이 영 시원하지 않았다. 끝까지 반납되지 않았다. 정말 끈질기게 말을 안 들었다. 정말 대단한 아이였다. 나는 검댕고무신 왼쪽 두 짝도 반갑고 고마운 신발이었는데 말이다.

그러나 나는 못내 그 아이에게 미안했다. 새 운동화 한 켤레라도 내가 사 주었으면 지금도 미안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저 그 아이가 신고 싶었던 운동화와 나의 왼쪽 두 짝 검댕고무신이 오브랩 된다.

지나고 나니 후회가 되었다. 담임 선생님이 운동화 한 켤레 선물이라도 하였더라면 좋았을 텐데…. 모포초등학교 그 선생이 말이다.

38. 모포에는 밥이 없어

나는 고등학교 때 4일간을 굶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이었다. 어머니께서 신경통으로 거동을 못하시니까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이 모두 큰형님 집으로 들어갔다. 나도 덩달아 큰형님 집으로 가서 함께 살게 되었다. 내가 고등학교 다니는 것이 큰형님과 큰 형수님은 무척 못 마땅해 하였다. 본래 따로 살다가 합가하니 서로가 불편했다. 1Km정도 떨어진 전에 살던 집 사랑채에서 램프를 켜고서 밤새 공부하였다. 밥은 큰형님 집으로, 공부와 잠은 전에 살던 집 사랑채에서 이렇게 다니니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짧은 시간이라도 공부를 더 해야 하는데 오르내리려니 불편했다. 아예 큰형님 집에 가지 않기로 하였다. 4일간을 굶었다. 큰형님 집에 가지 않자 낮에 어머니께서 와 보시고 쌀자루와 풍로를 갖다 놓았다. 직접 밥해 먹으라는 것이었다. 그날 이후부터 나는 따로 혼자 살았다.

판서를 하고 있는데, 그때 책상 서랍소리가 달그락달그락 났다.

"누가 필기하지 않고 무엇 하느냐?"

"…."

다시 판서를 하는데 또 달그락 거린다.

"누구지! 이 소리 내는 사람이 누구지?"

하면서 고개를 획 돌리자 L1이 손을 서랍 속으로 넣었다. L1에게 다가갔다. L1이 꼼짝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L1! 무엇하지?"

입이 불룩하였다. 무엇을 씹다가 나에게 들키자 그대로 멈춰 있었다. 책상 서랍 속을 들여다보았다. 서랍 속에 책과 공책은 없고 온통 바다 해조류가 가득 담겨 있었다.

"이게 무엇이고?"

"미역귀다리 인데요."

역시 L1이 말을 못하자, 반장이 대신 대답하였다.

"미역귀다리를 수업시간에 먹으면 되나?"

"…."

"미역귀다리는 쉬는 시간에 먹고, 서랍 속에 이것을 넣다니 대단 해?"

"…."

아무 말이 없다. 그리고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아! 정말 밥이 없었구나. 밥이 없으니 배가 고프고, 그래서 미역귀다리라도 먹는구나. 아이 구! L1 가엾어라. 이를 어째!

1973년 여름! 그 긴 세월에서 또 못 볼 것을 보고 말았다. 정말 그 당시는 어려운 살림살이를 하는 분들이 많이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어린이가 밥이 없어서 미역귀다리를 먹는 시절이었다.

하기는 나도 어렸을 때 5년간 가뭄이 들어 조밥과 고구마 밥으로 연명하고, 나중에는 무밥까지 해 먹었다. 조밥과 고구마 밥은 식어도 맛이 좋은데, 무밥은 식으면 물이 생겨서 된장을 넣고 비벼 먹어도 좋지 않았다. 저녁에는 나물죽을 먹는데 보리쌀도 없어서 그저 시퍼런 산나물로 연명하였다. 그 때는 제대로 먹은 것이 없어서 그랬는지 돌아서면 배가 고팠다. 어쩔 수 없어서 소를 먹이러 가면 소는 도랑에 몰아넣고, 나는 방죽에서 꼼밥을 비벼 먹기도 하였다. 그리고 배가 고파서 삥기도 비벼서 바람에 날리고 한 움큼씩 먹었다. 그러다 견디지 못하면 감자서리도 하고, 밀서리도 하였다.

정말 가난은 국가도 어쩌지 못하는 시대였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에 4·19 의거가 있었고, 5학년 때에 5·16군사혁명이 일어났다. 우리가 초등학교 때는 매일 데모가 있었다. 제일 맛있는 서리는 단감서리였다. 단감은 서당 훈장집 단감이 좋았다. 그래서 곧잘 배가 고프면 서당집 울타리에서 단감을 몰래 따 먹었다. 배고픈 시절에 태어나서 옳게 먹지도, 입지도, 신지도 못한 세대이었다. 농촌에서 자라난 사람들이다. 배고픈 사연이 많았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교대 후배는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는데 점심시간이면 도시락이 없어서 수도에 물을 틀어 놓고 배가 부르도록 먹고서는 양지바른 자갈 선에서 졸다가 그만 오후 수업시간에 늦게 들어가서 뺨맞은 이야기를 하였다. 그 때 맞는 것은 안 아픈데, 배가 고파 서러워서 울었다고 한다.

아! 정말 배고픈 사정을 아는 자 누구인가? 그것은 배가 고파 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51명 중에 점심 굶는 아이들이 거개다. 용의검사와 함께 소지품검사를 하면 남학생 50%가 호주머니에 미역귀다리, 그것도 날 것을 가지고 다니면서 시간 나는 대로 씹고, 씹고 또 씹는다. 오늘날 급식을 하는 시대로 맞아 많은 도움이 되지 싶다. 그런데 모포초교에서 5학년이 되자, 빵 급식이 무료로 되었다.

내가 1957년에 초등학교 다닐 때는 우유를 끓여서 한 컵씩 받아먹었다. 그런데 낭랑하고 단 우유를 먹지 못해 자갈선에다 모두 쏟아 버리자 학교 선생님이 아예 우유가루를 도시락 채 주셨다. 그러나 이 우유는 모아서 장에다 내다 팔자 우유를 그대로 주지 않게 되었다. 5학년 때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고서는 옥수수가루를 주었다. 이 또한 가루를 아이들에게 먹이지 않고 장에다 파는 것을 알고서는 이제 6학년 때는 옥수수 가래떡을 방앗간에서 만들어 아예 선생님이 보는 앞에서 먹고 가게 하였다. 아이들에게 배고픈 것을 앞으로 어떻게 해결하려나, 서울특별시에서는 무상급식에 대하여 선거까지 한다니 세월이 많이도 변했다.

나중 얘기지만, 네 번째 학교에서는 일부부담 급식을 하였는데 정말 효과가 좋았다. 문교부지정 자활급식 연구학교이었다. 1학년 아이들이 입학할 때는 집에서 옳게 먹지 못하다가 6개월 동안 학교급식을 먹으면 생기가 돌고 아이들이 달라졌다.

아이들이 밥이 없어요. 세계경제 대국 10위에 드는 나라가 아이들 급식을 충분히 해주어서 건강한 학생이 되고, 공부 잘하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다시는'밥이 없어요.'라는 말이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39. 합동 수학여행가다

교무회의가 열렸다. 6학년이 수학여행을 가야 하는데, 학생 수가 적어서 이번에는 5·6학년이 함께 간다고 하였다. 아직 우리 반은 5학년인데 어떻게 수학여행을 함께 가야한다고 할까 처음에는 망설여졌다. 문제는 분명 있었다. 기차를 타 본 학생은 강원도에서 전학 온 K군 1명뿐이었다. 내년에 6학년이 되어도 학생 수가 적으면 진행할 수가 없다. 또 지도교사도 혼자서는 엄두도 못 낼 판이다. 교감선생님께서 따라 가셔도 운영이 어려울 것이다.

교무회의에서 5·6학년 합동 수학여행단을 운영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먼저 교육청에 승인신청을 내어야 하였다. 일정을 정하고, 기차를 예약하여야 했다. 5·6학년 학부형 댁으로 방문하여 수학여행 참가를 독려하여야 했다.

일정이 잡히고, 예산을 세워서 학부형회의를 소집하였다. 예산 정한 것을 등사하여 나누어 드리고 회의에 부쳤다. 수학여행도 공부의 연장이고, 이번에는 5·6학년이 동시에 간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당일 참석 학부형으로서는 대단히 만족해 하셨다. 이제까지 수학여행하면 얼마의 돈을 내라고 하고 바로 시행하였는데, 이렇게 자료를 만들고 학부형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대다수 찬성하여 주셨다. 정말 고마우셨다. 90여%가 찬성을 하여 주셨으니 나머지 10%는 교사의 몫이었다. 시간이 나는 대로 학부형댁을 계속 방문하였다. 우리 반은 51명 중에 47명이 찬성하고 돈까지 내어 주셨다. 4명은 정말 어려워하였다. 나머지 4명에게는 내가 돈을 내고 100% 참석을 목표로 삼았다.

수학여행에서 제일 어려움은 아직도 도시를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아이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도시의 교통신호도 이해하여야 하고, 또 기차를 장시간 타면 차멀미와 한 번도 집을 떠나서 혼자 잠을 자본 아이들이 없는지라 이것이 걱정이었다.

준비물로 기차멀미를 없애기 위해 노래책 복사와 도시에서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특색 있는 색깔의 개별 모자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노래책은 내가 직접 등사하여 50여 페이지를 만들었고, 모자는 눈에 잘 띄는 노란색에다 "모포"라는 글자를 넣었다.

모포에서 전세 시내버스를 타고 포항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경주를 경유하여 대구에 가서 학생과학관에서 최신 과학실험 수업과 자기 얼굴이 TV에 바로 나오는 등 과학기자재 구경이 하고, 대구 달성공원, 신문사, 방송국 등을 견학 하고, 대구역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경주 고적지로 출발하는 것이다. 경주에서 1박하면서 혼자 잠자는 것을 체험하고 시내버스를 이용하여 경주 불국사를 구경하고, 박물관을 거쳐 다시 기차로 포항역에 도착하여 포항에서 대기 중인 버스로 학교로 돌아오는 여정이었다.

과연 90명을 데리고 무사히 귀교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모포초교 5·6학년 수학여행단이 모포에서 전세 시내버스를 타고 출발하는 날이 다가왔다. 버스 2대에 나누어 타고 포항역을 향해 출발하였다. 자기 동네에 버스를 타고 가니까 이것부터 신기해하였다. 포항-대구 기차를 타기 위해 포항역에서 개찰을 하였다. 선두에 선배 선생님이신 6학년 담임 선생님, 나는 끝에서 인원을 점검하며 뒷문에서 승차하였다. 드디어 기차가 출발하였다. 터널 속으로 들어갔다. 모두가 환호성을 질렀다. 희한한 기차를 처음 탔는데, 그것도 굴속으로, 컴컴한 굴속으로 들어가니 놀라서 고함을 치는 아이도 있었다.

기차는 단체 칸이고 맨 끝 칸이다. 자리를 정돈하고 노래책을 내어서 합창을 하였다. 경주에서 기차를 회차 하여 건천을 지나고, 영천을 지나고, 하양을 지나서 드디어 대구역에 도착하였다. 기차멀미를 없애려고 계속 노래를 부르도록 하였다.

경상북도 도청 옆에 있는 학생과학관에 들렀다. 문제가 일어났다. 잔돈을 많이 바꿔가서 타보고, 만져보고, 느껴보고 하느라 도대체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11층 학생과학관을 제일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서 노란모자 쓴 학생들은 무조건 가자고 당겨내었다. 모자에 "모포"자를 보고서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목포에서 왔느냐고 묻기도 하였다. 사람들이 한글도 모르느냐? 모포를 왜 자꾸 목포라고 하지? 겨우 인원점검을 하고 달성공원으로 가야 하는데 시내버스를 타야 했다. 시내버스를 타려면 신호등을 건너야 한다. 학교에서 아무리 이론을 가르쳐도 이 아이들이 도시에 오니까 파란불에 건너라고 하는데도 못 건넜다. 문제는 차 소리 등 도시소음 때문에 아이들이 당황하였다. 90여 명을 다 건네고 나니 온 몸에 땀이 후줄근히 났다. 도대체 신호등이 아이들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파란불에 건너라면 빨간 불인데도 건너려고 하고 일대 혼란이 왔다. 파란 불일 때 가운데에서 고함을 치고 손짓을 하고 우여곡절 끝에 모두 건넜다.

달성공원에서는 '구경을 마치고 반드시 입구 큰 대문에서 기다린다.'는 주의를 주었는데도 호랑이 있는 곳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정말 호랑이인가? 가짜인가? 쓸데없는 의문에도 빠지기도 하였다. 신문사, 방송국에서는 일렬로 따라 가니까 그래도 안전하였다.

대구역에서 오후에 기차를 다시 탔다. 기차를 타기까지 혼이 나갔다. 시내버스 태우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는 지금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겨우겨우 인원을 확인하고 기차에 몸을 실었다. 이제는 경주까지 가서 내리면 되는 것이었다. 물론 기차멀미 때문에 다시 노래 책을 내어서 노래를 시작했다. 포항에서 대구 올 때 10번을 노래했는데, 이제 목이 아프다. 이 노래를 시켜야 기차 멀미를 하지 않는다. 다행히 노래책 때문에 차멀미를 잊어버리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경주역에 도착하니 늦은 저녁이었다. 이제 배가 고프다. 경주는 그래도 덜 혼란스러운 도시였다. 예약된 안동여관에 들러 저녁을 먹고 주의사항을 한 후 각자 방으로 돌려보내고 겨우 쉬었다. 수학여행은 어렵고 힘 드는 긴 여정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벌써 부지런한 아이들은 아침밥도 먹기 전에 군것질하기에 바빴다. 또 시내버스를 타고 경주 불국사를 향했다. 내 고향을 지난다. 불국사 기차역 밑이 내 고향마을이다. 시내버스 타기는 또 곤욕이었다. 우리만 타는 것이 아니라 관광객과 함께 타야 하기 때문이었다. 요즈음 같았으면 아예 전세 관광버스를 대절하여 다녔으면 좋겠는데 수학여행 경비를 절약하려고 이런 고생을 자행하였다.

천년고찰 불국사에 들러 자하문을 보고 범영루를 지나 석가탑, 다보탑, 대웅전을 보고, 사리탑을 지나 극락전을 나오니 불국사 전경이 나온다. 그곳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박물관에 들렀다.

국립경주박물관! 이는 종합교육관이다. 박물관에서 제일 먼저 성덕대왕 신종인 일명 에밀레종이다. 별관에 치미를 설명하고 박이차돈의 순교비와 금관은 잊어버리지 못할 것이다. 박물관에서 경주역까지는 걸어갔다. 조금 일찍 와서 경주역에서 대기하다가 예약된 기차에 몸을 실었다. 포항역에 어떻게 도착했는지 모르게 빨리 왔다.

포항에서는 전세 낸 버스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에 타니 모두가 파김치가 되었다. 1박 2일 만에 너무 많은 것을 경험하였으니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늦게 어둠이 내려서야 모포초등학교에 도착하였다.

"모두들 수고하였습니다. 내일은 쉬고, 모레 봅시다. 안녕!"

1박 2일 수학여행이 끝났다. 아무 사고 없이 모포초등학교에 잘 도착하였고, 집으로 모두 돌아갔다. 아픈 사람도 없이 무사하였다. 이것이 제일 좋은 결과다. 1974년 모포초등학교 5·6학년 합동수학여행단이 안전하게 해체되었다.

40. 미리 가르친 영어와 한자

초등학교 교사로서만이 아닌 다른 욕심이 동하였다. 처음 선생을 하러 왔던 초임지 모포초교에서 그것도 4, 5, 6학년 3년간을 내리닫이 담임을 하여서 어느 정도 기초공부의 길을 닦아주었다고 생각하니 다음 교육도 걱정이 앞섰다.

중학교를 가는 학생은 76% 정도이다.(남자 23/27명, 여자 15/23명 입학.) 결국 14명(남자 4명, 여자 8명)은 중학교 입학이 그 당년도에 하지 못했다. 이를 어째! 내가 1962년에 초교 6학년 때이었다. 당시 중학교 입학이 시골에서는 쉽지 않았다. 나의 동기 160명 중에 고작 20여 명인 12.5%만이 중학교에 입학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중학교에 가지 못한 것으로 나를 포함해서 140여 명이나 되었다.

내가 중학교를 가려면 입학원서를 써야 하는데 수험료가 83원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1961년, 군사혁명)에 화폐개혁을 해서 830환이었던 것이다. 1~3반 학생을 모두 모아 놓고 1반 담임 선생님께서 설명을 하셨다. 원서를 접수하려면 이래저래 추가 돈이 들므로 150원씩 준비하여 오라고 했다. 제출할 돈이 졸업사진 2장에 150원, 중학교 원서대 150원 합해서 300원을 가지고 오라고 하였다. 나는 300원을 아버지로부터 받지 못했다. 겨우 150원을 어머니께서 마련하여 주셨다. 집에서도 중학교를 가지 못하도록 방해만 하니까 포기하고 졸업사진 값으로 150원을 내고 말았다(지금 생각해보니 졸업사진이 무어대수라고 그때 중학교 원서를 내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랬으면 중학교를 당년도에 갔을 텐데…. 나도 참 착한 위인이었나 보다.).

그런데 그것이 참 묘했다. 우리 반 담임 선생님이 없으셨다. 당시는 초교 교사도 하시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2학년 여선생님이 시집을 가서 사표를 내신 모양이었다. 나는 6학년 3반이었는데, 우리 담임선생님이 2학년을 가르치러 가시고 3반은 남·여학생이고, 1반은 남학생, 2반은 여학생으로 우리 3반 남·여학생을 1, 2반에 합반하여 말만 3반이지 남학생은 1반에, 여학생은 2반에 가게 되어 우리는 개밥에 도토리가 되었다. 중학교 입학을 하든 말든 아무도 신경을 써 주는 담임 선생님이 없게 되었다. 그 후 아버지의 뜻에 따라 그냥 초등학교 졸업하고 서당에 다니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3반 반장(전교 어린이회 부회장도 겸함)이었는데 중학교에 가지 못했다는 것을 3반 담임 선생님이 졸업식 날에서야 중학교 입학원서를 내지 않은 것을 아시고서는 나를 나무라셨다.

"원서 내어야 할 때 못낸 것은 어쩔 수 없었어요."

"그러면 나라도 찾아 올 것이지. 시험이라도 한번 쳐 봤어야지. 장학금도 있었고, 그러면 공부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걸 몰라? 아이고 답답해. 전교 부회장이고, 반장인 네가 중학교도 못가고? 아이고 내가…!"

"마아, 그래 됐습니더. 아부지도 안 된다고 하고, 돈도 없었고요."

"…그래."

나는 중학교를 제 때에 가지 못하였고, 2년 뒤에 우겨서 다시 신식공부를 하였다. 이런 사연을 경험했기 때문에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학생들 집집마다 저녁에 시간을 내어 찾아다녀 보았다. 그 당시 사실 중학교 입학을 권유해 보았지만 사정이 딱해서 기어이 내가 처음 가르친 아이들이 14명이나 중학교를 가지 못했다. 정말 가슴 아픈 일이었다. 난 더욱 "영어"와 "한자"를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게 사실인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어떻게 해서라도 잘 살아가야 할 텐데. 영어도 한자도 모르면 어떻게? 6학년 겨울방학을 시작하기 전에 또 기어이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한자와 영어를 초보라도 가르쳐 주자. 정규 수업시간을 마치고 나서 영어기초와 한자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한자는 자전을 구하고, 독학할 수 있도록 부수부터 배우고, 한자 찾는 법을 가르쳤다. 그 후로는 개인이 얼마든지 혼자서도 배울 수 있고, 하고자 하는 노력만 있으면 배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부수는 한자자전 찾기를 배우고 나면 한자쓰기 필순을 가르치고서 기초를 준비하여 주었다.

다음은 영어다. 영어도 알파벳을 인쇄체, 필기체 대·소문자를 가르치고, 영어 낱말을 배우면서 발음기호를 마스터하게 하였다. 기초영어 책자를 선택하여 낱말을 상당한 수준까지 배우고 기초문장까지 가르쳤다. 이 두 가지 방법은 독학을 하였기에 매우 익숙한 것이기도 하다. 누가 그랬던가? 아이들에게 고기를 잡아주지 말고, 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라고.

정말 그랬다. 1976년 2월 모포초등학교 제9회 졸업 때까지 많지 않은 날에도 나의 첫 제자들이 한자와 영어에 상당한 실력이 쌓아가게 되었다. 특히 영어에 자신을 느낀 제자들 몇은 아예 우리 집 서재에서 밤늦게까지 공부를 요청하여 다른 학교로 인사이동하기 전날까지 계속 가르친 기억이 난다.

아득하고 머∼언 날의 기억들이다. 이제야 겨우 작은 한 조각의 기억을 더듬어 이 글을 남긴다. 물론 나의 뇌리 속에서는 초임지에서 가르친 제자들이 불현듯 다시 되살아나곤 한다. 이제 44여 년이나 흐른 오늘에 와서 한자와 영어기초를 가르치던 그날의 열정이 나의 젊음을 대신 해 주는지 지금도 궁금할 뿐이다.

41. 금반지 받다

1973년 5월 1일자로 발령 받아 제자 쉰 명을 가르치고 나도 많이 배우고 이제야 그 결과로 모포초등학교 제9회 졸업식 날을 맞이하였다. 처음에는 울고 싶은 심정으로 이 아이들 쉰 명을 맡았다. 실력은 말이 아니었고, 업무는 많았고, 교육환경은 열악하였고, 학부형 살림살이도 풍족하지 못해서 이래저래 어려움뿐인 나의 초임지 모포초등학교였다.

2년 동안 교육대학에서 배운 것을 바닷가 시골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는 것에 한편으로는 긍지와 자신감으로 다가선 교단이었다. 교생실습 할 때 지도교사로부터 많은 지도조언을 받았지만 이렇게까지 선생으로서 수업 외적인 잡무가 많을 수 있나 할 정도로 너무 많았다. '잡무를 줄인다.'는 공문까지 와서 또 접수하고 회람하고, 잡무를 만들어 주는 교육현장, 지금도 잡무에 시달리고 있을 초등학교 교사들에게 머리 숙여진다.

교장 선생님은 교장 선생님대로 이것, 저것을 지시하시고, 교감선생님은 교감 선생님대로, 주임선생님은 주임선생님대로 일을 많이 주셨다. 웬 그런 잡무가 많은지 모를 일이다. 어느 선생님은 그랬다. 이 잡무만 없으면, 학생들에게 뛰어난 실력을 가지도록 가르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 하셨다.

모포초등학교 제9회 영광된 졸업식 날이 다가왔다.

사전에 애국가와 졸업식 노래를 가르쳤다. 애국가는 4절까지 하여야 했다. 물론 졸업식 노래는 참 새로웠다.

(1절)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 하며 우리는 언니 뒤를 따르렵니다.

(2절)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부지런히 더 배우고 얼른 자라서 새 나라의 새 일꾼이 되겠습니다.

(3절)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우리나라 짊어지고 나갈 우리들 냇물이 바다에서 서로 만나듯 우리들도 이다음에 다시 만나세.

1절은 재학생이 부르고, 2절은 졸업생들이 부른다. 3절은 재학생, 졸업생의 합창으로 우렁찬 그날의 노래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이제는 송사와 답사가 있다. 당일은 임석관이 오고 육성회 회장님이하 지역의 여러 내빈이 오시므로 상을 수상하는 순서대로 리허설을 하였다. 은박지에다"축", "졸업"등의 글자들을 크게 만들어 붙이고, 아래에 반딧불이 달린 개똥벌레 두 마리도 붙여서 졸업식장을 준비하였다.

모포초등학교 제9회 졸업식 전날이었다. 내가 6학년으로 담임한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하필 졸업식 날 출장을 가라고 하니 이 또한 무슨 해괴한 일인가 말이다. 3년간 담임을 하고도 마지막 정리를 해야 하는 날에 그렇게 되었다. 출장명령이 났으니 어쩔 수 없이 졸업식장에 참석하지 못하고 첫차로 출장을 떠나고 말았다. 안코 없는 찐빵이었다. 이 무슨 해괴한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내가 업무를 많이 맡았을 뿐 아니라 교원인사 업무이었기에 직접가지 않고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학급수가 많았으면 그런 일도 없을 것이다. 하늘도 무심하지 않았는지 그날따라 오후에는 비가 오기 시작하였다.

물론 졸업식은 잘 진행하여 끝났을 것이다. 막차를 타고 진흙이 달라붙는 땅고개를 돌아내려 와서 어두컴컴한 학교를 들어서는데 졸업식장에는 아직도 학부형회 회장님과 학부모 몇 분이 집에 가시지 않으시고 행운이 따르지 않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마침 제가 출장이라서 죄송합니다."

"이 선생님, 오시기만을 학수고대하고 기다렸습니다."

졸업 식장은 아직 그대로 정리하지도 않았고, 우리학교 선생님과 학부형께서 일부 앉아서 음식을 드시고 계셨다.

"잠깐 자리에 앉아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이 선생님이 이번 9회 졸업생들의 담임 선생님이셨는데, 하필 오늘이 출장이라서 졸업식을 함께 하지 못하셨기에 늦었으나마 이 자리에서 잠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자리에 앉았다.

"오늘 제9회 졸업생들에게는 이 선생님을 만난 것이 정말 행운이었습니다. 앞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의 조그만 성의를 모았습니다."

나는 쑥스럽게 앞으로 나갔다.

"그 동안 수고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긴 3년 동안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더 계시지 않고 인사이동이 나셨다면서요. 한편으로는 많이 섭섭합니다. 우리들 작은 성의로 준비한 것입니다."

박수와 함께 나는 얼떨떨한 김에 작은 통을 하나 받았다. 열었다. 황금반지이었다.

"제가 이러한 것을 받을 수 있습니까?"

"아니에요. 부족하지만, 고맙습니다. 인사말씀을 부탁드립니다."

"그저 황송할 뿐입니다. 저는 아무 것도 모르면서 3년간 같은 반을 맡아서 가르쳤을 뿐입니다. 이런 과분한 것을 주시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감사합니다. 어디에 가나 이 모포초등학교는 잊어버리지 못할 것입니다. 특히 제9회 졸업생들은 정말, 정말 잊지 못할 것이며, 학부형님들도 더욱 잊지 못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냥 '교육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로 시작하여 밤이나 낮이나 교육에 매진한 결과일 뿐이다. 교육은 무엇을 얻기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은 A를 A′로 만드는 것이다. 즉 몰랐던 것을 알게 하는 변화가 교육이다. 설령 그것이 작은 앎이라도 변화를 주었다는 것이 있다면 바로 교육을 한 것일 게다.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물론 문교부에서 지정된 교육과정을 마스터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고 지식만을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알게 모르게 변화를 느끼게 교육하는 것이 교사의 사명이다. 물론 잡무는 그 부대적인 업무일 뿐이다. 조직 속에서 튀려는 것 보다는 함께 어울려 공생하는 교육의 터전을 마련하는 것이 교사의 진정한 직분일 것이다.

주마등같이 지나가지만 1973년 5월 3일! '우리 선생님'이라는 제목의 글짓기와 한 학년이 지나고 '우리 선생님'의 글짓기의 결과는 판이하였다.

'우리 선생님 얼굴은 무섭게 생겼지만 우리를 잘 가르쳐 주셨다. 우리 선생님은 정말 많은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려고 노력하셨다. 월요일에는 무서운 선생님이셨고, 금요일 오후만 되시면 옛날 얘기도 해주시고 참 고마우셨다. 우리 선생님 음성은 알아주어야 한다. 아무리 뒷좌석에 앉아 있어서도 똑똑하게 잘 들리었다. 정말 고마운 선생님이셨다.'

내 스스로 써 놓고 보아도 낯이 간지러웠다. 황금 3돈짜리 링이지만 나에게는 3톤의 황금보다도 학부형님들의 깊으신 그 뜻을 잊지 않으려는 마음이었다. 반지 안쪽에는'증 모포초교 9회'라고 씌어 있었다.

모포초등학교 제9회 졸업생, 학부형님 여러분! 참으로 감사하고도 감사합니다.

42. 파도소리, 풍금소리

그렇게 나는 생애 최초 초등학교 선생을 3년 동안 한 곳에서 같은 학년을 그대로 데리고 올라가서 졸업시켰다. 장단점이 분명 있을 것이다. 장점으로는 지속적으로 3년 동안 가르쳐서 기초실력을 쌓도록 지원하여 주었다는 것에 한 표이다. 한편으로는 초등학교 어린 학생들이 같은 선생아래 3년간이나 지속적으로 배웠다는 것에 지겨움과 싫증을 유발한 것이 분명 단점일 것이다.

다음 학교로 전근 가서 그곳에서도 교육하였고, 나중에는 고향으로 돌아 와서 역시 바닷가 1년과 고향 곁에서 2년 등 선생 노릇을 하였다. 이런 저런 사연으로 교직 8년(7년 11개월 25일)을 마지막으로 그 직을 떠나 전문대학 행정직 7급으로 자리를 옮겼다. 교육자에서 교육행정가로서 그 직을 마쳤다.

그렇게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 컴퓨터가 나오고 SNS가 발전하여서 못 다하고 두고 온 교육현장이 늘 그리웠다. 파도소리, 풍금소리도 잊고 34년이 흐른 후에도 느닷없이 인터넷 카페에서 초임학교 제자들과 소통하게 되었다. 매년 스승의 날에 전화나 꽃다발, 작은 선물로 나의 기억을 되살려 주었다.

교육현장에서 아이들에게는 풍금으로 동요나 명곡을 쳐 주었을 때 가장 흥미로워 하였다. 심지어 저마다 신이 나서 책상바닥을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함께 즐거워하였다. 그 곡조 그 곡명은 잊히어가지만 그렇게들 좋아하던 그 모습은 이리도 어우러져 함께 보고 싶은지 그것이 인지상정이 아니겠는가.

문득 어느 날 스마트폰 벨소리가 나고 쉬이 익히 들은 초임지 여학생 부반장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선생님 나미에요.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바삐 살다보니 전화도 못 드려 송구합니다. 이번 주 금요일 저녁에 시간이 나시는 지요"

"그래. 무슨 일인가? 시간이야 내면 되지."

"예. 그날 저녁에 우리 동기생들이 십시일반으로 바다고기도 잡고, 밥도 하고, 반주도 준비하였으니 꼭 내려오시기 바랍니다."

"그러지. 몇 시까지 가면 되겠나?"

"꼭 정한 시간은 없습니다만 저녁 8시 전후면 되고요, 장소는 모포축항 불 밝혀 둔 곳으로 오십시오."

"그러마. 초청하여 주어서 고맙데 이."

그리 약속한 날짜와 시간은 더디 가는 듯 빨리 흘러 그날이 왔다. 나는 운전을 하지 못하여 장거리이지만 내자가 차를 몰았다. 게다가 큰 처제까지 대동하고 고속도로를 경유하여 경주 교차로를 빠져서 감포로 향하였다. 감포 가는 길도 요즘은 무척 발전하였다. 토함산 중허리로 터널이 생기고서는 곧장 감포로 지나친다. 물론 감포초등학교도 그 예전에 딱 1년을 근무한 적이 있기에 내자도 지난날 추억이 있는 곳이다. 그곳도 우회도로가 생겨서 바로 오류리 고아라 해수욕장을 거쳐 연동, 두원, 계원, 양포에 도착하여 오른쪽으로 영암(신창)을 돌아 수양산의 오르막을 오르면 모포 항구다.

대구에서 야행으로 파도소리 들으려고, 예전 풍금소리 들으려고 수양산 고개를 올라 내려간다. 축항에서는 아니나 다를까 제자 서른 여명이 포장치고 백열전등을 대낮같이 밝혀서 음식을 풍성하게 마련하여 두었다. 차에서 내린 나는 벌써 지난날 젊은 선생이 아닌 노구를 가진 선생으로 나타나기가 불안하였다. 주름은 늘었고, 머리카락은 희어지고 깐깐했던 나의 몰골에서 민망하고 미안하였다.

"선생님! 먼 길 오시느라 수고 하셨심데이."

"그래 마카 오랜만이구나! 모두가 반가워!"

그렇게 우리들은 40년이 너머 만났다. 파도소리가 철썩~ 철썩 들리는 모포축항 방파제에서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만났다. 용문, 종석, 경수, 찬식, 몽구, 길원, 종래, 광조, 성수, 나미, 경숙, 상자, 은경. 그리고 오천초교로 전학 갔던 영옥까지 어렸을 때 얼굴들이 오롯이 보였다. 뿐만 아니고 남학생은 부인, 여학생은 남편, 시간이 허락된 자녀들까지 온통 함께 모여서 박수로 나를 환영하여 주었다.

무어라 깊은 고마움을 표시하여야 하는데 주고받는 인사가 파도소리보다 더 크게 우리들 이야기가 마치 풍금소리에 묻히듯 소란스러운 즐거운 장소가 되었다. 차려진 음식이 너무 소담하고 고마웠다. 저네들이 직접 바다에서 잡고 음식을 장만하였으며, 쌀을 추렴하여 밥까지 준비하였다. 적은 금액이라도 모아서 술도 사고 연회를 위해 필요한 것은 모두 준비하였다.

대구에서 내려오느라 시장도 하였는데 제자들의 극진한 준비로 인하여 마음만 받아도 절로 배부를 듯하였다. 한 잔의 술을 받아 건배를 하였다.

"오늘 모포초등학교 제9회 졸업생들의 발전과 건강을 위하여!"

"… 위하여!"

그렇게 우리들 자축연은 파도소리 들리는 축항에서 밤을 밝혀 주는 등대의 불빛을 안주 삼아 직접 들려오지 않은 풍금소리를 요즘은 스마트폰에서 선곡하여 합창을 해댔다. 그렇게 소란스럽게 떠들어도 아무도 소란스럽고 시끄럽다고 항의가 들어오지 않는 모포축항에서 모였다.

파도소리, 풍금소리는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나의 생애 첫 직장, 첫 추수확인 하러 내려 온 것이 대성황이었다. 누구는 해외 선장도 되었으며, 누구는 장사를 크게 하여 부자가 되었고, 누구는 돈 벌어 금의환향하여 벌써 노후를 준비한다고 하였다. 누구는 읍장 부인이 되었고, 누구는 부녀회장이 되었으며, 어촌계를 관리하고, 회사 경영자가 되기도 하였다. 모두 모두 승승장구하니 모포초등학교 제9회 졸업생들의 앞날이 훤히 보였다.

덩달아 2년 동안 모포 주민으로 살았던 내자도 그날따라 나의 제자들이 좋아 하였다. 우린 그런 작은 우리들만의 연회를 만들어 소통하고 사랑하고 아껴주는 사람들이 되었다.

지금도 들린다. 파도소리, 풍금소리가 나의 귀를 열어 즐거움을 준다.

● 프롤로그

파도소리는 내 인생에서 최초의 직장이 있었던 곳이요, 자연스레 들려주던 자장가인 동시에 삶의 채찍이었다. 3년이란 짧은 기간에 쉰 여명의 제자들을 그곳에서 풍금소리로 들려주었기에 인생에서 더 많은 즐거움을 얻었다. 그 풍금소리는 교육을 행동으로 행하는 소리이었으며 바로 교육으로 표현하였다.

나는 교육자라는 좋은 일터를 사연이 있어서 두고 왔지만 지나고 보니 그렇게 좋은 직장은 아무데도 없었다. 그곳에는 사랑하는 고사리 같은 초등학교 제자들이 얽히고설킨 애환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더 나의 마음을 조바심 나게 한 것이다.

나는 풍금소리를 좋아한다. 교사도 사람인지라 일과를 마치고 조용하게 내일 교육 준비를 하던 차면 저절로 풍금의 건반에서 흰 건반 검은 건반을 골라 짚어가면서 동요의 음률을 듣노라면 그렇게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근심도 걱정도 어려움도 실패했던 일도 성공했던 일도 모두가 묻히어 노래 한곡의 음률로 바뀌어 나를 안정시켜 주었다.

근무 하던 시절 그렇게 깨달았다. 쉼 없는 파도소리를 모아서 그 원동력으로 풍금소리를 만들어 내었다. 이미 익힌 명곡들은 건반을 두드림으로 소리가 발생하여 하얀 도화지에 비롯되듯 제자들의 마음에다 풍금소리를 담아주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달빛 섞인 풍금소리를 잊지 못하도록 추억을 만들어 주었다. 늘 그렇게 내가 좋아 하던 명곡들을 연주하여 주어서 자연치유가 되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첫 제자들과 나와 나이 차이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나의 파도소리에 풍금소리를 섞어 전해 준 그 고마움은 몰라도 스스로 즐거우면 되었던 것이다. 그랬다. 지난날을 돌아보니 파도소리를 잘 버물어서 달빛 섞인 풍금소리로 전한 것이 내 생애 중 가장 잘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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