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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비륵땅/ 김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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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점식 씨 김점식 씨

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산을 깎아 만든 논이 있었다. 그 논은 원체 박토라서 아무리 노력해도 작물이 잘 자라지 않았다. 애쓴 보람도 없이 너무 흉작이라 수확을 포기하고 갈아엎었다. 식량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던 그 시절, 곡식을 갈아엎는 일은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이었다.

하지만 갈아엎을 수 없는 땅이 있다. 돌도 아니고 흙도 아닌 비륵땅은 쟁기로도 갈 수가 없다. 삽 끝도 들어가지 않으니 곡괭이로 조금씩 파내야 한다. 이런 땅은 객토를 해야 한다. 객토란 산성화되었거나 질 나쁜 토양 위에, 다른 곳에서 양질의 흙을 가져다 넣어 땅의 힘을 상승시켜주는 작업이다.

내 삶의 땅이 바로 그런 비륵땅과 같았다. 혹독한 가난 속에 아버지는 내가 말을 배우기도 전에 원인 모를 병환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한국전쟁과 가난으로 점철된 시대에 살아남기도 힘들었던 때라, 나보다 다섯 살 위인 누님은 초등학교 입학도 못 했다. 다행히 나는 제 나이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 나는 누구나 살아가는 형편이 똑같은 줄만 알았다. 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우리 집이 몹시 가난하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내 옷에서는 가난이 뚝뚝 흘러내렸고 월사금을 제때 못 내는 때가 많았다. 참고서는 물론 없었고 방학 때면 혼자서 공부하도록 엮은 방학책 살 돈도 내지 못했다.

이런 가난한 환경 속에서 나는 물만 먹고도 쑥쑥 자라는 콩나물처럼 무럭무럭 자라서, 다른 아이들보다 키가 크고 힘도 셌다. 하지만 늘 기가 죽어있었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고 몹시 가난하기까지 하여 기댈 언덕이 없으니 그리되었다. 아이들은 이런 나를'가우'라고 놀렸다. 가우란, 인근 마을에 살고 있는 정신지체 장애자의 이름이었다.

내 나이 열세 살 되던 해, 형님이 원인 모를 무릎 통증으로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때부터 형님이 사용하던 지겟다리를 내 키에 맞춰 톱으로 잘라 짊어지고 하루에 두 차례씩 땔 나무를 하러 다녔다.

열여섯 살이 되던 어느 날, 지게를 짊어지고 가다가 학교 가는 동무를 만났다. 교복을 멋있게 차려입은 동무 앞에, 꾀죄죄한 옷차림으로 서 있는 내 처지가 참으로 처량하게 느껴졌다. 동무가 반갑게 말을 걸어왔지만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싱겁게 대답하고 헤어졌다. 이때 나는 평생을 이렇게 남을 부러워하면서 살아가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데 가슴 깊은 곳에서는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올라왔다.

그래도 당장 땔감으로 쓸 나무를 해 와야 할 처지인지라, 애써 심란한 마음을 가다듬고 이십 리쯤 되는 먼 산으로 갔다. 그곳은 워낙 산세가 험하여 어른들도 가기 꺼리는 삼박골이라고 하는 곳이다. 사방이 산으로 막혀 하늘밖에 안 보이고, 혼자 있으면 적막 속에 공포감이 느껴지는 곳이다. 그날따라 꿩과 산비둘기 우는소리가 유난히 구슬프게 들렸다. 그중에서 뻐꾹새의 피를 토하는 듯한 울음소리는 깊은 산골짝을 채우고도 넘쳐서 메아리가 되어 내 가슴속을 울렸다. 잡념을 떨쳐버리기 위해 평소보다 더 부지런히 땔감을 모았다. 덕분에 짧은 시간에 나무 한 짐이 다 되었다. 이제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높은 산을 오를 일이 걱정이었다. 집으로 가려면 꼬불꼬불 경사가 심한 높은 산 고개를 넘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곳은 산세가 험하고 가팔라서 맨몸으로도 올라가기가 힘들어서 '꼭두마리재'라고 불리는 곳이다.

시간이 넉넉하여 지붕처럼 생긴 너럭바위 아래 누워 잠시 쉬었다. 무심코 위를 쳐다보니 소나무 한 그루가 바위틈을 뚫고 나와 옆으로 자라고 있었다. 나는 그 나무를 보고 어떠한 어려움에 처해도 절망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위틈에서 자라는 나무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그중에서 사람만이 자신의 힘으로 어느 정도 환경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계모에게 천덕꾸러기 취급받던 친척 형님이 도시로 나가 크게 성공한 것을 보고 그렇게 믿었다. 그래서 나도 척박한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출을 결심했다.

무작정 상경

1970년 4월 22일 박정희 대통령의 제창으로 농촌 현대화를 위해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었다. 바로 그다음 날, 4월 23일 내 삶의 새로운 시작을 위해 무작정 상경했다. 부스럼 딱지처럼 덕지덕지 붙은 가난의 딱지를 떼어버리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농사일밖에 모르는 시골 무지렁이가 서울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우선 먹고 잠잘 곳이 급했던 터라 처음 시작한 일은 전기다리미 외판원이었다. 부지런함을 무기로 열심히 했다. 하지만 노력한 만큼 물건이 팔리지 않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가격조차 물어보는 사람이 없었다. 판매 실적이 좋지 않아 6개월 만에 결국 직장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당장 오고 갈 곳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처럼 나의 남루한 꿈은 도시의 뒷골목에서 사그라들어 갔다.

새로운 살길을 찾아 헤매던 중, 마침 석유풍로를 수리하러 다니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석유풍로 수리공은 몇 가지 간단한 공구와 심지만 있으면 되었다. 선택의 여지없이 그 일을 시작했다. 당시 나에게 창피하다거나 고생스럽다는 말은 사치였다. 끼니를 굶지 않고 밤에 잠자리를 구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평소에 석유풍로를 사용해보지도 않았던 사람이 고장 난 물건을 고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처음에는 수리하다가 잘못 만져서 오히려 더 큰 고장을 내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경험과 기술을 쌓아갔다.

그해 겨울은 평균 기온이 영하 10도였으며, 몇십 년 만의 강추위라고 했다. 한동안은 영하 15도를 넘는 날씨가 계속되기도 했다. 지금까지 많은 겨울을 겪어왔지만, 내 기억에는 그해 겨울보다 더 추웠던 때는 없었다. 하지만 날씨가 추운 날일수록 값비싼 석유난로를 고치려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더욱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물러설 곳 없는 나는 바위에 정(釘)을 대고 쇠망치로 쪼아가는 석수장이처럼 내일을 만들어갔다. 잠자는 시간을 줄이고 밥값도 교통비도 아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한 결과, 일 년 만에 전세방을 얻을 수가 있었다. 비록 단칸방이었지만 저택이라도 장만한 것처럼 기뻤다. 이젠 나도 서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치 양어깨에 날개라도 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여기서 용기를 얻어 더 열심히 일한 덕분에 내 나이 스물일곱 살 되던 해에, 방문판매 사업을 시작했다. 원체 적은 자본금으로 시작한 탓에 3개월 만에 어려움을 겪었다. 다행히 제품을 외상으로 공급해주는 업체를 만나 큰

고비를 넘겼다. 그때부터 차별화 전략의 일환으로 창의력과 실용성이 돋보이는 아이디어 상품을 취급했다. 그러자 판매 실력이 뛰어난 영업사원들이 찾아왔다. 덕분에 관련 업계에서 소문이 날 정도로 많은 매출을 올렸다.

1973년 석유파동으로 인하여 최악의 경제 불황 속에서 최고의 호황을 누렸다. 덕분에 사업을 시작한 지 2년 만에 대지 42평의 단독 주택을 마련했다. 고급 주택은 아니었으나 방이 다섯 개나 되는 그 집이 나에게는 궁궐처럼 느껴졌다. 집을 산 후 제일 먼저 문패를 만들어 대문 오른쪽 위에 붙이고 나서 가슴이 뭉클했다. 내 집을 가졌다는 사실이 꿈만 같아서 밤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등기 권리증을 몇 번씩 꺼내놓고 확인해 보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버스 종점에서 우리 집까지 몇 발자국이나 되는지 세어보기까지 했다.

이에 힘입어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남이 만들어 놓은 상품만 판매하는 것보다는 내가 직접 우수한 제품을 개발하여 보람과 가치를 함께 느끼고 싶었다. 그렇지만 기술도 경험도 없으니 아이디어로 승부를 걸었다.

처음 생산을 계획한 제품은 무선전축이었다. 녹음기 방문판매를 하면서 무선 마이크를 끼워 주었는데 소비자들의 반응이 좋아, 여기서 힌트를 얻었다. 그러나 기술도 경험도 없이 아이디어 하나만 가지고 제조업을 한다는 것은 커다란 모험이었다. 가장 어려운 것은 생산시설을 갖추는 일이었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다 갖추기란 무리였다. 차선책으로 내가 구상하고 있는 제품의 디자인과 기능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위탁 생산하기로 했다.

그 시절에는 라디오도 없는 가정이 많았다. 전축도 대부분 턴테이블에 LP 음반으로만 음악을 들어오다가, 8트랙 테이프를 사용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아직 스테레오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납품계약을 체결한 업체는 이런저런 핑계로 자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사업을 성공시키려면 서로 의견을 존중하고 뜻을 모아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시장을 내다보는 안목이 없고, 나는 생산기술이 없어 서로 자기주장이 옳다고 실랑이를 했다.

우여곡절 끝에 제품이 출고되었다. 그 당시 천일사 별표전축과 성우전자 독수리표(쉐이코)전축이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때였다. 한창 음향기기 붐이 확산되고 있던 때라 무선전축이 출고되면 대박이 날 줄 알았다. 하지만 브랜드 인지도가 낮고, 경험 부족으로 거래처 확보가 어려웠다. 설상가상으로 1977년 7월부터 정부에서 부가가치세법을 실시하여 시장 경기마저 얼어붙었다.

사업을 시작한 지 5년 만에 결국 사업을 접고, 32세 되던 해 변두리 재래시장에 그릇가게를 열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내가 가게를 보고 있으면 장사가 잘 안되었다. 아내가 있을 때는 물건을 사 가는데 나 혼자만 있으면 가격만 묻고 돌아갔다. 심지어는 가게 안을 빠끔히 들여다보고 그냥 가버리는 손님까지 있었다. 내가 아내보다 장사 경험도 더 많고 상품에 대한 설명도 잘하는데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온종일 좁은 공간에 있으려니 답답하고 감옥에 갇혀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견디기 힘들었다.

점포 장사는 단골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친절과 미소만으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좋은 물건을 싸게 판매해야 한다. 여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익을 중요하게 생각하면 손님이 멀어지고, 손님을 중요하게 생각하면 경영이 어려웠다. 이익을 적게 보고 많이 판매한다는 뜻으로 박리다매(薄利多賣)라는 말도 있지만, 오늘 손님이 내일 다시 온다는 보장도 없다. 또 언제까지 적자운영을 하면, 정상궤도에 오를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그러니 그런 전략을 쓰기도 쉽지 않았다.

장사는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신용을 파는 것이라는 말처럼, 신용을 쌓기 위해 좋은 품질만을 고집했다. 그렇지만 상품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소비자는 품질의 우수성을 몰라보고 무조건 가격만 따졌다. 반대로 가격이 싼 제품은 그만큼 품질이 낮아 소비자에게 신뢰를 얻을 수가 없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장사가 안되어 가전제품과 생활용품 등, 품목을 바꿔봤지만 현상 유지도 어려웠다. 이처럼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첫째 딸이 태어났다. 나도 아빠가 되었다는 사실이 꿈만 같고 만세라도 부르고 싶었다. 몸과 마음이 지치고 힘들 때는 딸아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던 어느 날,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나를 흔들었다. 하지만 마땅한 대책이 떠오르지 않아 사채를 얻어 녹음기 방문 판매사업을 다시 시작했다. 그마저 기대했던 만큼 장사가 잘되지 않았다.

여러 날을 고민한 끝에 생산업체를 찾아가서 특성이 있는 제품을 주문 생산하기로 했다. 다른 제품과 차별화하여 영업사원들이 판매에 자신감을 갖도록 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새로운 기능은 경음악에 맞춰 마이크로 노래를 부를 수 있고, LED 불빛이 소리의 진동에 따라 반짝반짝 빛을 발사하도록 했다. 여기에 에코 기능까지 추가하여 가라오케라고 판매했다.

판매를 시작하자마자 소비자들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그러자 다른 업체에서 근무하던 판매원들이 스스로 찾아들었다. 판매 실력이 뛰어난 외무 사원들 덕분에 2년 만에 다시 집을 장만했다. 버스 종점에서 가까운 거리에 작은 점포까지 있는 건물이었다. 내 실력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 남의 능력을 끌어다 목표를 달성 한 셈이다.

하지만 방문 판매업은 참으로 힘든 사업이었다. 외판원을 하겠다고 찾아온 사람들 대부분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한 청소년들이었다. 서울 지리에 익숙하지 않고 장사 경험도 없는 사람들에게 판매 교육을 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더욱이 외무 사원들 대부분이 자기가 하는 일을 천하고 부끄럽게 생각했다. 때문에 긍지가 없고 직업관이 희박하여 임시 일자리로 여겼다. 따라서 정착률도 낮았다. 판매 가격도 들쑥날쑥하여 소비자와 다투는 일이 잦고, 상품 대금을 떼이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내가 처음 배운 일이고, 적은 자본으로 할 수 있는 사업이라 마지못해 계속했다. 세월이 흐를수록 방문판매에 대한 소비자들의 신뢰가 떨어졌다. 판매원의 교육 관리도 힘들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는데 한계를 느껴 또다시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다시 쏘아 올린 꿈

1992년 내 나이 47세 되던 해에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위성인 우리 별 1호가 발사됐다. 나도 새 상품 개발에 대한 꿈을 쏘아 올리기 위해 준비했다. 당시 요구르트 제조기가 히트 상품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잘 팔린다는 유명 제약회사에서 생산된 제품 하나를 구입했다. 좀 더 보완해야 할 점이 무엇인지 꼼꼼히 살펴봤다.

기존 제품은 1,000미리 우유팩에 시약(종균)을 넣고 요구르트를 만들게 되어있었다. 우유팩 안쪽에는 얇은 비닐 코팅이 되어있는데 여기에 오랜 시간 열을 가하면 환경호르몬이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시약을 구하기도 어렵고 요구르트가 만들어지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것이 문제점으로 보였다.

그 무렵 외국에서 살다가 귀국한 사촌동생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마침 동생이 요구르트 제조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외국에서 생산된 그 제품은 여섯 개의 작은 유리병에 우유를 넣고 만들게 되어있었다. 유리병은 요구르트를 덜어 먹지 않고, 한 번에 먹기 좋을 만큼 크기로 되어있었다.

나는 무슨 일이든 한번 마음먹으면 즉시 실행에 옮기는 성격이라 곧바로 제품 개발에 들어갔다. 알루미늄 열판과 전자 IC 회로를 이용하여 온도 편차를 극소화하고 타이머와 멜로디 음, 램프 표시 기능을 내장했다. 또 차가운 우유가 유산균이 증식하기 좋은 온도로 높여지는 시간이 단축되도록 했다. 그 방법은 두 개의 열선을 이용하여 적정 온도까지 빨리 높여준 다음, 가열 열선 하나는 전원이 차단되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즉 전기밥솥이 밥이 다 된 다음 보온으로 바뀌는 것과 같은 원리다.

장사는 이익을 많이 남기는 것이 사업의 목표다. 하지만 제조업은 최고의 제품을 생산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존 제품의 단점을 보완하고 품질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곧 성공으로 가는 길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했다.

처음에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다가 뜻밖의 벽에 부딪혔다. 전기제품을 생산하려면 공장 등록증과 제조 허가를 받아야 했다. 그 첫 번째로 공장 설립과 제조 허가를 받기 위한 행정절차가 발목을 잡았다. 공장등록이 되어있는 건물에 생산시설을 갖추고 안전성을 인증받아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공장 설립에 대한 법정 설비와 관련 법령들이 제정된 지가 몇십 년 되는 것들이 많았다. 특히나 전자 전기산업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어 대부분이 제품을 생산하는데 필요 없는 시설들이었다. 그러나 국법이라는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그들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제품 생산하는데 필요도 없는 값비싼 기계들을 단순히 제조 허가를 받기 위해 설치해야만 했다.

이처럼 까다로운 행정절차를 걸쳐 공장등록과 1종 전기용품 제조업 허가를 받는데, 1년이 걸렸다. 사업자금의 대부분이 제품생산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에 사용되고 결국 빚더미에 올랐다.

그러나 기존 제품의 단점을 보완했으므로 상품을 출시만 하면 바로 대박이 나서 그동안 쌓인 빚을 쉽게 갚을 수 있게 될 줄로 믿었다. 그런데 시장 반응은 아주 싸늘했다. 소비자는 품질보다는 브랜드를 더 우선시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판로를 개척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친구 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KBS 2TV에서'TV 슈퍼마켓'이라는 프로가 방송되고 있으니 빨리 텔레비전을 켜보라는 것이었다. 서둘러 텔레비전을 켜보니 마침 아이디어 상품에 대한 방송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방송 출연을 원하는 업체는 신청하라는 자막이 흐르고 있었다.

마침 지인 중에서 PD를 잘 아는 분이 있어 별 어려움 없이 담당자를 만날 수 있었다. 담당 PD가 마침 잘 왔다고 하며 기다리고 있던 사람을 만난 것처럼 반겨주었다. 사실을 알고 보니 방송국 측에서는 새로운 상품을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누구나 접수만 하면 곧바로 방송을 해주고 있었는데 괜한 걱정을 했었다.

친구 부인의 전화 덕분에 1993년 1월 16일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하게 되었다. 방송이 나가자, 불과 몇 분 동안 주문 전화가 빗발쳐 100여 개의 상품이 팔렸다.

이때 마침 설 명절을 6일 앞두고 있었다. 한 참 주문배달이 바쁘던 때에 시내버스 운전기사로 근무하고 있는 고향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자기가 근무하고 있는 버스회사에서 설 명절 선물용으로 주문하려고 하니, 노조 사무실로 와서 상품설명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마침 경기도 원당에 주문배달이 있어 자동차 운전을 조카에게 하도록 하고 서대문구 문화촌에 있는 버스회사로 갔다.

상품설명회를 서둘러 마치고 물건 배달을 위해 경기도 원당으로 향했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폭설이 내렸다. 그렇다고 목적지를 가까이 두고 되돌아올 수는 없었다.

삼송리를 조금 지나서 갑자기'쿵'하는 소리와 함께 마주 오던 158번 시내버스와 정면충돌했다. 그 순간 운전하고 있는 조카가 걱정되었다. 다행히 몸은 다치지 않고 운전대 사이에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조카는 출고된 지 일 년도 안 된 자동차가 못 쓰게 되었다고 걱정했다. 하지만 나는 조카가 몸을 다치지 않은 것을 이 세상 모든 신들에게 감사했다.

사고가 난 장소는 허허벌판이었다. 당시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사고 수습을 위해 연락을 취할 수가 없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채소를 재배하는 비닐하우스에 불이 밝혀 있었다. 다행히 그곳에 전화가 있어 연락을 취할 수가 있었다.

텔레비전 방송 덕분에 광고의 위력을 실감했다. 방송이 나가고 3일이 지나자 주문 전화가 뚝, 끊어졌다. 매출 증대의 해법이 광고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오랜 궁리 끝에 각 신문사에 도움을 청하는 편지와 함께 요구르트 제조기를 하나씩 보내주었다. 고맙게도 10여 개의 신문에서'새 상품 소개' 난에 기사를 실어 주었다. 하지만 광고 효과는 별로 없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전국 발명품 전시관에도 전시했다. 마지막 수단으로 이벤트 행사장을 찾아다니며 최선을 다했지만 한 가닥 빛도 보이지 않았다.

희망에 들떴다가 절망을 맛봤고, 비상을 꿈꿨다가 추락을 경험했다. 재물과 사람, 건강까지 잃었다. 나의 무능이 초래한 결과이니, 내가 감내해야 할 고통과 아픔은 얼마든지 참고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가족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을 생각하면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지난날 온갖 고생과 어려움을 다 겪었지만, 삶이 이보다 더 비참할 수 있을까 싶었다.

세 번째 사업 실패로 실망감과 좌절감에 빠졌다. 부채의 규모가 컸지만, 주변 사람들로 인한 마음의 상처도 컸다. 당시 나는 건강까지 좋지 않아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의지할 곳이 없으니 내가 더 강해져야 했다. 상처는 오기가 되고 힘이 되었다. 사업은 실패했지만, 가정은 내가 지켜야 할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에 분연히 일어섰다.

내가 할 줄 아는 일이 장사밖에 없으니 또다시 방문판매를 하는 방법밖에 대안이 없었다. 지금까지 배우고 익혀서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내 형편에 맞는 아이템 찾는데 주력했다. 며칠을 고민한 끝에 세운상가에서 가라오케 반제품을 사다가 직접 조립하여 판매하기로 했다. 전기가 없는 유원지나 행사장에서도 오토바이 배터리를 이용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기존 가라오케보다 판매 가격이 싸고 사용이 편리하여 소비자들의 반응이 좋았다. 내가 직접 조립하여 판매하니 마진도 좋았다. 한 달에 20대만 판매해도 현상 유지가 가능했다.

그런데 판매 활동을 하는데 어려움이 컸다. 부피가 크고 중량이 무거운 제품이라 승용차가 없는 사람은 판매 활동을 할 수 없는 단점이 있었다. 자가용 승용차를 소유하고 있고, 방문판매 실력이 뛰어난 영업사원을 구하는 일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장사란, 도입기와 성장기, 성숙기와 포화기, 감퇴기를 먼저 파악한 다음 판매 전략을 세우는 것이 기본 상식이다. 이와 같은 이론을 바탕으로 볼 때, 1993년 당시 가라오케 붐이 한창 일어나고 있는 만큼, 성장기와 성숙기에 해당하는 최적의 시기라고 판단했다.

지난날 무선전축을 만들었던 경험을 살려서 무선전화기처럼 생긴 휴대용 가라오케를 생산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번쩍 떠올랐다. 그러나 생산시설을 갖추는 일과 사업자금을 조달할 방법이 없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종로 세운상가에서 자동차 전용 노래 반주기 생산업체 사장을 만나 내가 구상하고 있는 내용 설명했다. 그도 내 이야기를 듣고 아주 좋은 아이디어라고 했다. 하지만 장사에 경험이 없는 그는 판로를 걱정하여 직접 생산하기를 주저했다. 이때 나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판매는 내가 책임지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금형 제작비용까지 나에게 부담하라고 했다. 자기는 아무런 부담도 짊어지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나는 사업성이 높다고 믿고 모든 부담을 떠안기로 했다.

그는 아주 온순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와 대화를 할 때면 귀를 기울여야만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말을 했다. 목소리가 부드러울 뿐만 아니라 아주 천천히 말했다. 게다가 그는 누구와 마주 앉아있을 때도 수줍은 여인처럼 상대방과 시선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래서 믿음이 더 갔다.

나는 노련한 영업사원들을 끌어들여 판매 조직을 구성하고 제품이 출고되기만을 기다렸다. 계약을 체결했던 업체는 본래 노래 반주기를 생산하고 있던 터라 짧은 기간에 완제품 출시가 가능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가 나와의 약속을 지킬 수가 없다고 했다. 어느 돈 많은 사람이 총판 계약을 제의하여 오자 마음이 돌변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착하고 순하게 보였던 사람이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되어, 재차 또 재차 확인을 했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수많은 배신과 배반을 보아 왔지만, 내가 직접 이런 일을 당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핸드 가라오케 생산에 모든 희망을 걸고 있다가 배신을 당하고 나니 분노가 치밀었다. 사람이 어찌 저렇게 갑자기 변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어안이 벙벙했다. 어쩔 수 없이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차마 강제집행까지는 할 수가 없었다. 그도 나와 함께 망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의 소행을 생각하면 분노가 끓었지만, 그의 부인과 어린아이들이 고통을 겪게 될 생각을 해서 이를 악물고 참았다.

2천 원짜리의 기적

1994년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그해 내 삶의 다리도 무너졌다. 절망의 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가 될 것이라고 믿었던 핸드 가라오케 생산 계획마저 사업 파트너의 배신으로 무산됐다. 평생 갚을 수 없는 빚더미에 앉은 채 결국 사업을 접었다.

그때 내 나이 마흔아홉 살 되던 해였다. 내가 거주하고 있는 집을 팔아도 빚을 절반도 갚을 수 없었다. 이미 받아 써버린 곗돈과 매월 지불해야 할 이잣돈이 일반 직장인들 두 달 봉급에 가까운 금액이었다.

평소에 나를 아끼던 주변 사람들은 채권자들을 불러 모아 빚잔치를 해버리고,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라고 권했다. 하지만 나를 믿고 귀중한 돈을 빌려주었던 고마운 사람들을 차마 배신할 수가 없었다. 당장 원금은 갚지 못해도 매월 이자만이라도 밀리지 않고 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지난날 내가 편안하게 살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이 산다는 것이 죽는 일보다 더 힘들고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다. 뉴스에서 누가 자살했다고 하면, 마음대로 죽을 수 있는 사람은 그래도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 무렵 둘째 딸이 중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사업을 하는 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너무 무관심했던 것이 미안하여 졸업식에 참석했다. 모두들 선물과 꽃다발을 주고받으며 축제 분위기인데, 풀이 죽어있는 아내와 딸아이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먹먹했다. 온실 속에서 곱게 자란 화초처럼 저렇게 여리고 어린것을 위해서라도 이 역경을 이겨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한 힘으로 나를 일으켜 세웠다.

어떻게 하든지 딸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참고 견뎌야 한다는 새로운 각오를 하게 되니 창피할 것도 두려울 것도 없었다. 우선 창고에 남아있는 상품들을 자동차에 싣고 이벤트 행사장을 찾아 전국으로 돌아다녔다. 행사가 없는 날은 남의 상가 앞이나 노점에서 장사를 하며, 비상할 수 없는 허약한 날개를 한순간도 쉬지 않고 파닥거렸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 창고에 있던 재고상품도 모두 팔렸다. 이제 새로운 대책을 세워야 했다. 그런데 가지고 있는 돈이 고작 85만 원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적은 돈으로 할 수 있는 장사가 없었다. 더욱이 행인들의 눈길을 끌만 한 제품을 찾기란 건초더미 속에서 바늘 찾기 같았다. 당장 생계유지가 참으로 막막하던 그 무렵, 청동(靑銅) 장식품 판매하는 한 노인을 우연히 만났다.

제품의 크기는, 길이 10cm, 높이 5cm로, 60여 가지의 모양이 있었다. 본래는 연필깎이 용도로 중국에서 수입되는 상품인데 8백 원에 매입하여 2천 원에 판매하고 있었다. 요즘은 연필을 깎는 일이 별로 없으니 사 가는 사람이 없어 장식용으로 판매하고 있었다. 그 노인은 심심풀이로 사람들 구경하면서 용돈이나 벌기 위해 다닌다고 했다.

1995년 당시 우리나라는 경제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생활필수품도 잘 팔리지 않는 불경기에 이런 물건이 팔릴까 싶었다. 그렇지만 뾰족한 대책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청동 장식품 장사를 하기로 했다.

바로 그다음 날부터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남의 상가 앞에 좌판을 펼쳤다. 몇 시간이 지나도 거들떠보는 사람조차 없었다. 하루가 한 달처럼 느껴졌다. 점심때가 지나도 배고픈 줄도 몰랐다. 아무리 노력해도 노점에서 물건을 사 가는 사람은 하루에 한두 명밖에 안 되었다. 그나마 한 사람이 한두 개씩 사 가기 때문에 자릿세도 못 했다. 하지만 원체 장사 밑천이 적어서 취급 품목을 바꿀 수도 없었다. 청동 장식품으로 절망의 강을 건널 방법을 모색하는 길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매출을 증대시킬 방안을 찾기 위해 고민에 빠졌다. 며칠 동안 궁리한 끝에 다섯 개를 하나의 세트로 만들어서 1만 원씩에 판매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세트를 구성하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자동차나 비행기, 악기 모양으로 된 것은 같은 종류들끼리 쉽게 세트를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성격이 다른 것들은 세트 구성을 할 수가 없었다. 골똘히 생각한 끝에 극작가가 시나리오를 쓰듯이 이야기의 줄거리를 만들어서 세트를 구성해봤다.

예를 들자면 포장마차 뒤에는 대포를 놓고 그다음 호롱불을 놔두었다. 그렇게 하여 서부영화에서 포장마차 뒤에 대포를 달고 가는 것을 연상하게 하고, 또 밤이면 호롱불을 사용한다는 뜻으로 설명하면 될 것 같았다. 이처럼 퍼즐 조각을 맞추듯 하나하나 연결하여 이야기 줄거리를 만들고 각각 특징에 맞는 세트 이름을 붙였다.

이런 방법으로 열 가지의 세트를 구성했다. 아무리 하찮은 물건이라도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면 그 가치가 달라져 보이듯, 이렇게 뜻을 담아 해석을 곁들이면 매출 증가에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했다.

세트 구성이 완성된 다음, 진열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골똘히 생각해 봤다. 똑같은 상품이라도 어떻게 진열하느냐에 따라 매출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오랜 궁리 끝에 인테리어 가구공장에서 백색 바탕의 조립식 진열장을 주문 제작했다. 벽에는 거울을 붙이고 한 칸에 한 세트씩 양쪽으로 여덟 세트를 진열해놓으니 보석상 진열장처럼 아주 훌륭하게 보였다. 세트가 구성되지 않은 나머지들은 진열장 앞에 아무렇게나 흩어놓고, 골라가는 재미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이처럼 머리를 짜고 지혜를 모아 철저하게 준비했지만, 좌판 펼칠 장소를 구하는 일이 큰 벽으로 다가왔다. 장사가 좀 되는 장소는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 이미 붙박이처럼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떤 날은 좌판을 펼쳐 보지도 못하고 종일 헛고생만 하고 돌아올 때도 있었다. 그런 날은 무너지는 마음을 추스르기가 참으로 힘들었다.

어렵게 장소를 마련해도, 아이들 소꿉놀이 장난감처럼 자질구레한 것들을 상품이라고 펼쳐 놓고 있으려니 처량한 생각까지 들었다. 중형 아파트 한 채 값보다 더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상태에서 원가 천 원도 안 되는 상품을 취급한다는 것은 노적에 불 질러놓고 싸라기 줍는 격이었다. 가끔 자릿세도 못할 때도 있었지만 손해 보는 장사라도 해야지 가만히 있으면 병이 날 것 같아 더 바쁘게 일했다.

몹시 추운 어느 겨울날이었다. 물건이 팔리지 않아 자릿세도 못하고 왔는데 보일러가 고장 났다고 했다. 말 그대로 속수무책인 상황이었다. 나는 아내에게"이런 때일수록 건강을 잘 챙겨야 한다."라는 말밖에는 다른 할 말이 없었다. 당장 급하고 필요한 것이 돈인 줄 뻔히 알지만 서로 말을 아꼈다.

또 어느 날은 두 딸이 목욕탕을 가려고 했는데 돈이 없어서 가지 못했다고 했다. 그 당시에는 나에게 말을 하지 않아 그런 사실을 몰랐었다. 20여 년이 흐른 뒤에 둘째 딸이 추억담으로 얘기하여 뒤늦게 알았다. 그만큼 식구들 모두가 돈이 드는 일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삼가 했었다.

이처럼 생활이 어려워지자,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은 아내까지 발 벗고 나섰다. 그러나 아내도 처음 각오나 생각보다 견디기 힘들어했다. 대부분이 처음 장사를 시작하는 사람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건 사라는 말조차 꺼내기가 힘들다. 그런 줄 알지만 아내가 나서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적극 말리지 않았다.

당시 아내도 고혈압으로 인하여 편두통과 현기증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하지만 식구들 앞에서 아프다는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내가 너무 무능하여 건강도 좋지 않은 아내까지 길거리로 내모는 것만 같아 마음이 아팠다.

가급적 장사하기 편한 장소를 찾아서 아내에게 먼저 마련해주고, 나는 또 다른 곳에 자리를 잡았다. 문득문득 아내가 걱정되었지만,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종일 서로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특히 아내 나이 또래의 여인이 화려하게 차려입고 외출하는 모습을 볼 때면 고생하는 아내 생각이 떠올라 가슴이 미어졌다.

이렇게 아내까지 나섰지만 생활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더욱이 무더운 여름철이 다가오니 더 걱정이었다. 날씨가 맑은 날은 무쇠도 녹일 것 같은 뙤약볕이고, 장마가 계속되면 장사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뭔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그때 마침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부산 무역센터에서 공룡 전시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공룡 전시회는 청동 장식품이 딱 어울리는 아이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저할 것도 없이 큰 기대를 안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도착한 즉시 행사 관계자를 만나보니 기념품을 판매할 수 있는 모든 권리를 이미 다른 사람이 독점하고 있었다. 매장을 독점한 사람은 삼성동 코엑스에서 여러 차례의 전시회 관계로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처음 보는 사람처럼 안면을 싹 바꾸고 한 달 자릿세를 300만 원이나 달라고 했다. 당시 일반 회사원 평균월급이 100만 원이었던 때다. 책상 하나 놓을 정도의 작은 공간만 있으면 되는데 터무니없는 금액이었다.

그곳에서 꼭 장사를 하고 싶은데 나에게 그만한 목돈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사정사정하여 판매 이익금의 50%를 자릿세로 주기로 합의를 봤다. 나에게 주어진 장소는 전시장에서 가장 으슥하고 어두운 곳이었다. 그렇지만 불평할 처지가 아니었다. 서울로 되돌아가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옹색하게 자리 잡았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하면 관람객들을 후미진 곳까지 오도록 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오랜 궁리 끝에 진열장 벽면에 거울을 붙이고 양쪽에 100W 전구로 불을 켜두었다. 밝은 불빛이 거울에 반사되어 상품이 최대한 돋보이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세계 최초의 발명품 모조품 전시>라고 쓴 현수막을 걸어 놓았다.

전시회는 오전 열 시부터 오후 다섯 시까지 열렸는데 첫날부터 관람객이 물밀듯 몰려왔다. 진열장에 환하게 켜놓은 불빛과 현수막을 보고 사람들이 내가 있는 구석으로 모여들었다. 앙증맞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장식품이 연필깎이까지 달린 것을 보고 모두들 신기하게 생각했다. 많이 사 가는 사람은 다섯 세트에서 열 세트까지 사 가기도 했다. 이처럼 청동 장식품 하나하나가 희망이 되고 빛이 되어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다 사그라진 잿더미 속에서 작은 불씨 하나를 찾아낸 기쁨을 맛보았다. 벼랑 끝에서 지푸라기를 부여잡듯 청동 장식품에 희망을 걸었다. 허튼 희망이라도 가지고 있어야만 견딜 수 있기에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이렇게 우리 부부는 눈물과 땀방울로 희망의 무지개를 만들어 갔다.

어둠을 밝혀 준 냄비

진정한 가족애는 어려움 속에서 피어났다. 절망의 터널을 빠져나가기 위해, 온 가족이 한마음이 되었다. 함께 노력한 덕분으로 1년 동안 노점상을 하여 근근이 모은 돈이 800만 원이 되었다. 그것을 종잣돈으로 또다시 제조업에 도전했다. 도전과 모험으로 실패와 고통을 겪었지만, 고난과 역경으로부터 벗어 날 수 있는 길도 오직 도전과 모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금형 값도 안 되는 돈이었지만 경험과 신용을 자본으로 냄비를 만들기로 했다. 금형 제작에서부터 포장용 박스생산에 이르기까지 지난날 거래했던 업체들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1996년 당시는 경기침체로 대부분이 극심한 불황을 겪고 있을 때라, 아무리 친분이 있는 사이라도 도움을 주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모두들 내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평소 내가 너무 원칙만 따진다고' '장도칼 또는 탱자나무 가시'라고 불평하던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덕분에 생각보다 빠른 기간에 완제품을 출시할 수 있었다.

제품의 크기는 지름이 22cm로 아주 조그맣게 만들었다. 금형 제작비가 모자라 양쪽 손잡이는 만들지 못했다. 뚜껑에는 둥근 철사를 귀걸이처럼 끼워서 손잡이를 대신했다. 원체 적은 돈으로 옹색하게 만든 제품이라 고급 주방용품들 틈에서 판매될 수 있을까 싶었다.

못난 자식 선보이러 가는 심정으로 경기도 부천시에 있는 쇼핑센터에서 판매를 시작했다. 야외용 가스버너에 불을 켜놓고 고구마를 직접 구워 시식시키는 방법을 응용했다. '물과 기름이 없이도 생선을 구울 수 있고, 높이가 일반 냄비의 절반밖에 안 되므로, 뚜껑의 복사열로 음식이 빨리 익을 뿐만 아니라, 생선이 맛있게 구워진다.'고 설명했다.

판매를 시작하자마자'요술 냄비가 나왔다.'며,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절실함이 기적을 일으킨다더니 마침내 꿈같은 현실이 펼쳐졌다. 주야로 생산해도 주문량을 다 맞추지 못했다. 새벽부터 시작하여 숨 가쁜 하루 일을 마치고 나면, 돈이 인쇄소의 폐지처럼 쌓였다. 큰 종이 상자에 수북이 쌓여 있는 돈을 보고, 딸아이가 하는 말이"아빠 우리 돈 세는 기계를 사야겠어요."라고 하여 우리는 모두 함께 웃었다.

일할 때는 물건이 팔려나가는 즐거움에 피곤한 줄 모르다가, 일과가 끝나면 식구들 모두 녹초가 되어 손발 씻는 것도 귀찮았다. 삶의 벼랑 끝으로 내몰리게 했던 그 돈을 세어볼 기운이 없었다. 큰 종이 상자에 차곡차곡 쌓인 돈을 방 한쪽 구석에 미루어 놓고 그대로 잠이 들 때가 많았다. 어느 날은 거래처 은행 지점장이 선물을 잔뜩 들고 찾아와서 은행 직원을 매일 우리 공장으로 보내 입금하는 일을 도와주겠다고 했다.

바로 그다음 해 1997년은 IMF 외환 위기로 수많은 기업이 문을 닫았다. 그로 인하여 갑자기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노점상이라도 해보겠다고 찾아왔다. 사무실로 찾아온 사람들 중에는 장사 경험이 전혀 없거나 물건값이 부족한 이도 있었다. 이처럼 사정이 딱한 사람들에게는 지난날 나도 힘들었던 때를 생각하여 상품을 외상으로 주었다. 또 많은 량을 주문한 사람보다는 적은 량을 가져가는 상인들부터 주었다. 그러자 규모가 큰 거래처들이 불평했다. 대부분 소규모 노점상이라 더러는 물품대금을 갚지 않고 사라지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실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노점상이라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고 생각하니 큰 보람을 느꼈다.

갑자기 직장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다가, 뜻밖에 장사가 잘되어 자신감을 얻은 이들은 고맙다고 음료수나 고기를 사서 검정 비닐봉지에 담아 가지고 와서 주고 가기도 했다.

여기에 힘입어 일 년 후에는 삼단 바닥 냄비를 개발했다. 계속하여 12종류의 주방용품을 생산하게 되었고, 2년 동안 45만 개가 팔렸다. 똑같이 내린 비에도 떨어지는 꽃이 있고 다시 피어나는 꽃이 있듯이 온 나라가 불황 속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나는 최대의 호황을 누렸다.

덕분에 나는 평생 갚지 못할 줄 알았던 그 많은 빚을, 1년 만에 모두 다 갚고 상가건물도 장만했다. 그리고 1998년 9월에는 발명 진흥회의 추천으로 이태리 밀라노에서 열리는'마제프 가정용품 국제 박람회'에도 출품했다. 외국어에 서툴러 걱정했는데, 마침 이태리에서 성악을 공부하고 있던 조카(이질) 내외가 상품설명을 도와주었다. 덕분에 전시회 기간 내내 외국 바이어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아주 좋은 실적을 올리고 귀국했다.

지금까지 나는 비륵땅 같은 삶의 땅을 바꿀 수 없으니 내가 바뀌고 연장을 바꾸려고 노력했다. 연장도 내 손에 맞지 않으면 나만의 방식으로 만들었다. 땅의 성질에 적합한 새로운 연장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실패도 하고 상처가 덧나기도 했지만 보람도 있었다.

처음에는 곡괭이로도 팔 수 없는 비륵땅인 줄 알았는데 큰 돌 몇 개를 파고 나니 작은 돌멩이들이 나오고 기름진 흙도 조금씩 섞여 있었다. 이때 자갈밭은 모래밭 같고 모래밭은 옥토처럼 느껴졌다.

가난이 죽음보다 더 무서워 모험을 했고, 바닥에서 비상할 수 없으니 갈아엎었다. 내 삶의 땅이 햇볕도 받고, 바람도 잘 통하고, 물도 잘 흐르게 한 후, 희망의 씨를 뿌릴 수만 있다면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 과정에서 나와 만났던 사람들 중에는 흙 속에 숨겨진 바윗돌처럼 나를 속이고 더욱 힘들게 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돌밭에 섞인 흙처럼 힘을 보태주는 소수의 사람들이 길을 열어주었다.

농촌에서는 가을이 되면 수확의 결과에 상관없이 다음 해의 풍작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땅을 갈아엎는다. 겨울철에 잡초와 해충들이 얼어 죽게 하는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묵은 땅은 갈아엎어야 위아래 흙이 서로 바뀌어서 땅의 질이 높아진다.

이와 같이 살아간다는 건 삶의 땅을 개간하고 갈아엎는 연속이라 생각한다. 삶의 땅이 아무리 기름지고 풍요로워도 수시로 갈아엎어 주지 않으면 땅의 힘이 유지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묵히고 방치해두면 잡초가 무성하고 돌처럼 굳어진다. 굳은 땅에 물이 고일 수는 있어도 새로운 싹이 움트기는 어렵다. 설령 싹을 틔웠더라도 무성하게 자라지는 못한다. 그래서 박토뿐만 아니라 옥토도 가끔 뒤집고 갈아엎어야 한다. 그래도 안 되는 비륵땅은 객토 작업을 해야 한다.

농사꾼의 가을처럼 인생의 완성은 노년에 결정된다. 객토 작업은 멈출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요즘 시민대학과 문화센터에서 내 삶의 마지막 객토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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