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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에] 필리버스터가 아니라 무제한 토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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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일 경희대 교수

노동일 경희대 교수 노동일 경희대 교수


국회선진화법 일환으로 만들어
의제와 무관한 발언 허용 안 돼
다음 회기 때 첫 번째 안건 표결
제대로 된 무제한 토론 봤으면

모두가 필리버스터라고 한다. 언론은 물론 심지어 국회의장과 의원들도 마찬가지다. 자유한국당이 199개 법안에 대해 필리버스터를 신청한 결과 국회가 마비되었다고 말한다. 국민들이 이를 필리버스터라고 아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틀렸다. 자유한국당이 신청한 것은 필리버스터가 아니라 무제한 토론이다. 두 가지는 전혀 다르다. 필리버스터와 달리 무제한 토론은 긍정적인 제도이다. 무제한 토론의 내용을 잘 알지 못하거나 본질을 외면한 채 필리버스터라고 부르는 것이 좋은 제도를 활용하지 못하는 이유일 수 있다.

필리버스터(Filibuster)는 미국 상원의 독특한 의사 진행 모습이다. 하원에서는 엄격한 발언 시간 제한이 있지만 상원의원의 발언 시간은 원칙적으로 무제한이다. 한 의원이 단상에서 발언을 계속하는 경우 재적 5분의 3 이상의 동의가 없이는 중단시킬 수 없다. 동화책, 요리책, 헌법전 낭독 등 의제와 관련 없는 발언도 무한정 허용된다. 그 결과 의원의 발언 중 회의가 지연되는 '의사진행방해'가 된 것이다. '해적'을 뜻하는 단어가 어원이라는 말처럼 회기를 넘겨 특정 의안을 폐기시키려는 게 필리버스터의 목적이다.

무제한 토론은 다르다. 관행적으로 인정된 필리버스터와 달리 국회선진화법 일환으로 우리 국회법 제106조의 2에 명확히 규정된 제도이다. 한 사람에 의한 단상 점거 발언인 필리버스터와 달리 무제한 토론은 재적 3분의 1 이상의 동의가 있어야 하고, 의원들이 발언을 이어간다. 의제와 무관한 발언이 허용되지 않는 점도 다르다. 필리버스터는 시간을 끌어 회기를 넘기면 해당 의안이 폐기돼 버린다. 회기불계속의 원칙 때문이다. 반면 회기계속의 원칙이 적용되는 우리 국회에서는 회기가 끝나도 해당 의안이 폐기되지 않는다. 회기 종료 후 다음 회기 첫 번째 안건으로, 무제한 토론 종결 즉시 해당 안건을 표결해야 한다.

필리버스터는 '의사진행방해'를 통한 법안 폐기에 목적이 있는 반면 우리는 말 그대로 쟁점 사안에 대한 '무제한 토론'을 하도록 설계된 것이다. 무제한 토론은 본질적으로 "쟁점 안건의 심의 과정에서 물리적 충돌을 방지하고 안건이 대화와 타협을 통하여 심의되도록 하려는 것"이다. 국회선진화법 개정 이유이다.

문제는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회가 무제한 토론 제도를 정쟁 수단으로만 이용하는 데 있다. 2016년 더불어민주당은 이른바 '테러방지법'에 대한 무제한 반대 토론을 실시한 바 있다. 2월 23일부터 3월 2일까지 총 38명 의원이 192시간 27분 동안 발언을 이어나갔다. 세계 최장 필리버스터 기록이라지만 그런 기록은 의미가 없다. 여야의 '토론'이 아닌 야당의 일방적 연설로 그쳤기 때문이다. 여당과 야당의 의견이 함께 표출될 때만이 국민이 진실을 알 수 있다. 무제한 토론 취지를 전혀 살리지 못한 반쪽짜리로 그친 것이다.

현재 문제는 선거법과 공수처법이다. 문희상 국회의장과 여당은 정기국회 마지막 날인 10일까지 법안 상정을 마치겠다고 한다. 한국당이 무제한 토론을 신청하더라도 정기국회 후 바로 임시회를 소집, 법안을 처리하려는 것이다.

문 의장과 여야 모두에게 호소하고 싶다. 제대로 된 무제한 토론을 한번 해 보라고. 한국당은 연동형 비례대표제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좌파 독재 체제를 공고히 하려는 것이라 주장한다. 민주당과 일부 야당은 국회와 검찰 개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법안이라고 한다. 최종적으로 본회의 표결에 부쳐질 법안 내용도 아직 확실치 않거니와 솔직히 국민들은 진영을 갈라 싸우는 각 당의 주장에 동조할 뿐 그 내용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대화와 타협을 위해' 국회의원들 스스로 도입한 제도가 무제한 토론이다.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된 치열한 토론을 통해 진실이 무엇인지 국민들이 판단할 수 있게 해주길 바란다.

엄청난 성능의 최신 스마트폰을 가지고도 전화기 정도로만 사용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의외로 많다. 사용설명서를 한 번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거나 사용법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국회가 그런 사람들을 그대로 닮았다. 무제한 토론이라는 스마트폰급 제도가 있음에도 여전히 돌멩이 싸움 수준의 방법으로 문제를 풀려고 한다. 지금이라도 무제한 토론 사용설명서를 제대로 읽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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