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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창] 10월 26일에 대한 단상, 박정희와 이토 히로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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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환 계명대학 교수(일본학전공, 국경연구소장)

박정희, 이토 히로부미 매일신문 DB 박정희, 이토 히로부미 매일신문 DB
이성환 계명대학 교수(일본학전공, 국경연구소장) 이성환 계명대학 교수(일본학전공, 국경연구소장)

10월 26일은 공교롭게도 70년의 시차를 두고 한국과 일본의 근현대사를 상징할 두 인물이 암살당한 날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 62세 때, 일본 초대 총리를 역임하고 한국 통감으로 있던 이토 히로부미는 1909년 68세 때였다. 두 사람은 160㎝ 정도의 단신이었으며, 장례식은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최초의 국장으로 치러졌다. 총을 맞은 직후 박정희는 "나는 괜찮아"라는 외마디를 남겼고, 이토 히로부미는 "누가 쏘았나"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두 사람이 마지막 남긴 말의 맥락을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긴 여운으로 남았다. 그들의 업적은 한국과 일본에서 더 큰 영향을 남겼다.

박정희와 이토 히로부미의 삶에는 닮은 구석이 많다. 두 사람은 지독히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성장 과정은 끊임없는 성취욕으로 점철되어 있다. 박정희는 사범학교 졸업 후 발령받은 교사 생활을 그만두고,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거치며 위를 향해 달렸다. 해방 후에는 남로당에 가입을 하고, 군에서 퇴출당하고, 다시 군으로 돌아가는 등 순조롭지 않았다. 첫째 부인과는 제대로 된 결혼 생활을 하지 못했으며, 둘째 부인과의 결혼 후에도 여성 편력이 회자되기도 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가난을 못 이겨 아버지가 최하급 무사 집안의 양자로 입적하면서 신분이 바뀌었다. 어릴 때는 나무칼을 차고 동경하던 무사 흉내를 내면서 노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고 한다. 일본 우익의 정신적 지주인 요시다 쇼인의 문하에서 공부를 했으나, 공부보다 중재 능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21세 때 양이(洋夷)를 위해 영국 공사관에 불을 지르고 천황 옹호를 위한 암살 사건에도 가담한다. 이듬해 영어사전 하나에 의지해 영국 유학을 결행하여 근대문명에 눈을 뜬다. 약 반년간의 유학 경험을 바탕으로 영어를 할 줄 아는 신지식인으로 메이지 신정부에 참여했다. 첫째 부인과는 몇 번의 만남도 없이 이혼을 하고, 둘째 부인과 결혼을 했으나 여성 편력이 심했다고 한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두 사람은 업적 지향적이고 권력욕도 강했다. 박정희는 한국 역사상 가장 긴 18년간 장기 집권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27세 때 효고현 지사를 시작으로 일본 역사상 유일하게 총리를 4번 역임했다. 헌법과 내각제도는 그가 만들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국가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평가받는다. 한국의 경제성장은 박정희 정권에서 시작되었다. 그가 '조국 근대화의 기수'로 불리는 이유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근대 일본을 만든 사나이'라는 별칭답게 일본의 근대화를 이끌었다. 박정희는 일본의 경험에서 국가 발전의 영감을 얻었고, 이토 히로부미는 영국 유학을 통해 근대국가 일본을 착상했다. 일본이 동양의 영국을 지향했고, 한국의 경제발전이 일본 따라가기를 한 배경이다. 이토 히로부미 총리가 일으킨 청일전쟁의 배상금은 일본 산업화에 박차를 가했고, 베트남전쟁의 참전 대가는 한국 경제성장의 견인력이 되었다. 국가 발전에 전쟁의 이용도 불사하는 점도 닮았다고 할까. 물론 다른 점도 많다.

박정희를 암살한 김재규는 거사에 가담한 부하에게 "좋아, 자유민주의를 위하여"라는 말을 남기고 권총을 받아 갔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에게 총격을 가한 후 "꼬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외쳤다. 두 사람의 어린 시절은 비교적 유복했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사건 후 엄청난 고초를 당하며 4개월, 7개월 만에 각각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그 후 한국은 이토 히로부미를 극복하고 안중근 의사가 꿈꾸던 독립국가가 되었고, 박정희의 기반 위에 김재규가 '그리던' 민주화를 이루었다. 박정희와 김재규, 이토 히로부미와 안중근은 서로 생사를 가른 대척점에 있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역사적 평가에서는 모두 '조국을 위해서'라는 점으로 수렴되는 부분이 있는 듯하다. 위인(爲人)에 대한 평가는 시간이 걸리고, 위인(偉人)들에게는 시대 소명이 있는 것 같다.

이 글은 위 인물들을 칭송, 비난하고 평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박정희와 이토 히로부미의 사망일이 같고 죽음의 모습이 비슷하기에 그들의 궤적을 더듬다가 발견한 행적을 열거한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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