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진의 대구이야기] (30)대구6연대반란사건

입력 2006-07-24 08:25:42 수정 2006-07-24 08:25:42

창설 멤버 하재팔부터 '좌익'

1948년말과 49년초에 벌어진 세 차례의 '대구6연대반란사건'은 군내부의 사건이어서 대구시민사회에 미친 직접적인 파장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초급장교와 하사관 다수가 비명에 갔을 뿐 아니라, 반란주동자들이 대부분 대구출신이어서 그 가족들의 속앓이는 컸다.

제 1차 반란은 48년 11월2일 당시 대명동에 주둔해 있던 6연대 내의 좌익혐의자인 곽종진 특무상사가 자신을 연행하러온 헌병대의 조장필 소위를 권총으로 사살하면서 시작되었다. 조 소위가 쓰러지자 곽 상사와 한통속이던 이정택 상사가 '궐기'를 선동했고, 이에 동조하지 않은 하사관 10여명을 사살하면서 확대되었다. 이들은 진압하려온 헌병장교와 사병 등 6명을 사살하고, 칠곡군 동명지서를 습격한 뒤 팔공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다.

제 2차는 '여순반군'진압작전에 참전했다가 원대복귀 하던 6연대 소속 2개 중대(380명)병력 가운데 좌익성향인 이상백 상사를 비롯한 28명의 하사관과 14명의 병사들이 숙군이 두려워, 이해 12월6일 오후 성당못 근처에서 장교 9명을 사살하고 역시 팔공산으로 들어간 사건이다. 제 3차는 이듬해인 49년 1월30일 포항에 주둔하고 있던 6연대 소속 제 4중대내의 좌익사병 일부가 곽종진 상사 등의 지령을 받고, 백달현 소위와 하사관 1명을 사살한 뒤, 중대원들을 선동하다가 여의치 않자 탈주한 사건이다.

1946년 2월18일 대구 중동에서 창설된 6연대는 태생부터 반란의 숙명을 지닌 연대였다. 연대창설의 산파역은 학병소위 출신인 대구사람 하재팔(河在八)이었다. 좌익성향이 강했던 그는 해방직후 대구에서 사설단체인 '국군준비대'를 조직, 참모장을 하면서 좌익청년들을 규합했었다. 미군정이 불법단체로 몰자, 육사의 전신인 군사영어학교에 1기로 들어가 수료, 육군 참위(參尉.소위)가 되어 정식으로 6연대창설에 나선 인물이다.

6연대의 연대장은 초대에 김영환 참위, 2대가 최남근 부위(崔楠根 副尉. 중위), 3대가 김종석 정위(金鍾碩 正尉. 대위), 4대가 심언봉 부위, 5대가 다시 최남근 부위였다. 이중 초대와 4대의 재임기간은 통 털어 3개월에 불과했고, 김 정위와 최 부위가 2년 반 동안 번갈아 맡아왔다. 이 두 최고 지휘관이 좌익사상에 젖는 바람에 6연대의 기풍 역시 좌익일색이었다. 이들이 부임하기 전에도 하재팔의 영향을 받은 표무원, 곽종진, 이정택, 이상백 등 좌익성향의 하사관들이 연대의 정훈조직을 틀어쥐고 있었다.

신문에 처음 대원모집광고를 낼 때의 입대자격은 다소 까다로웠으나 응모숫자가 기대에 못 미치자, 신체건강한자, 소학졸업자, 사상건전자로 극히 단순화시켰다. 즉 연령제한과 전과유무, 좌익단체가입불가조건 등을 슬그머니 없앴던 것이다. 이 바람에 평소 친일경찰 및 관리들의 재 등용에 불만을 품었던 청년들은 물론, 폭력배, 10.1사건 이후 쫓기던 청년들까지 피신처를 삼아 다수 몰려들었다.

이들은 김. 최 연대장의 비호를 받다가 새 연대장 부임 후 '제주4.3사건'과 '여순사건' 끝에 숙군의 칼날이 자신들을 향해 조여 오자 서둘러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 무렵 군내의 남로당 군사책은 포항출신 이재복(李在福)목사였다. 김. 최 두 연대장도 이재복의 지령을 따르는 처지였으며, 6연대의 반란도 그 영향으로 결행된 것이었다. 이들 세 사람은 그 뒤 체포되어 모두 총살형을 받았다. 일본육사출신인 김종석도 아까운 인재였지만 특히 만군출신인 최남근은 군 경력은 물론 인격, 통솔력, 호방한 인간미 등으로 군 후배들의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다. 그도 나중 책임을 통감하고 결연히 죽음을 맞고 말았지만 그 역시 광폭한 시대의 희생자였다. 반란주동자들은 대구의 가족들에게 '연좌죄'란 멍에만 남긴 채 대부분 토벌되었고, '반란연대'가 된 6연대는 49년 4월 22연대로 흡수, 해체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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