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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폭풍이 일어난 날 /이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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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실 씨 이정실 씨

▶ 포성이 들리던 날

1950년 경인년(庚寅年) 유월 마지막 일요일 새벽, 햇살이 얇은 창호지 문틈을 뚫고 나의 눈을 부시게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어 늦잠을 자는 것은 아니었다. 인정이 많고 다정하며 부지런한 봉서 어머니는 일요일마다 어둑어둑한 새벽녘부터 안방은 물론 문지방, 대청, 부엌, 마당, 장독대 등 집안 구석구석을 빈틈없이 대청소한다. 이날도 그런 대청소를 하다가 봉서와 내가 잠자고 있는 방의 툇마루를 털고 닦으면서

"일어나라. 일어나라∼. 어서∼! 해가 동천에 훤하게 떴다"

고 큰소리로 다정스럽게 말하다가 연달아

"방문을 활짝 열고 맑은 공기로 바꿔라"

"꼬리 꼬리하고 퀴퀴한 총각냄새가 나지 않도록 해라"

고 한다. 그 소리를 듣고 잠자리에서 눈을 비비면서 일어나 앉았다가 봉서 어머니의 청소가 끝난 뒤에 잠자던 방을 봉서와 함께 청소했다.

나는 지난해 상경해 서울성북구돈암동 전차종점부근에 살고 있는 우리 집과 친분이 두터운 집에서 두 살 연하인 그 집 외동아들 봉서와 함께 한 방에서 기거하고 있는 고등학생이었다. 그런 인연으로 봉서 부모는 나의 후견인이 되어 있었다.


그날은 고향에서 하숙비와 잡비 등을 보냈다는 편지에 적힌 인편을 한국은행 사택에서 만나기로 약속된 날이다. 평소에는 우체국으로 보내던 것을 이번 달은 인편으로 보낸 것이다. 돈암동 전차종점에서 전차를 타고 종로 4가 전차정거장에 내렸다가 서울역으로 가는 전차를 갈아탔다. 서울역 전차정거장에서 용산구후암동에 있는 그 당시 국방부 앞을 거쳐 한국은행 사택에 갔다. 만나기로 약속해 둔 편지에 적힌 인편은 상경을 늦추어 허탕만 쳤다.

돌아올 때도 갈 때처럼 국방부 앞을 지나왔다. 갈 때는 정문을 출입하는 사람들이 많아 분주했다. 올 때는 갈 때와는 달리 정문 옆 출입구 한쪽에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어 출입자를 제한하고 있었다. 또 갈 때는 정문 안쪽 기관총 사격대에 근무병이 없었는데 올 때는 완전무장한 두 병사가 앉아 있어 으스스했다. 그들은 언제라도 명령만 떨어지면 기관총을 사격할 태세도 갖추고 있었다.

국방부 앞을 지날 때는 정오가 막 지났고 올 때는 오후 1시쯤이었다. 불과 1시간도 안 된 사이에 국방부 주변의 모습은 달라도 엄청나게 달랐다. 그곳 주변에는 녹음이 우거진 한 그루의 노송이 있었다. 그 노송 밑은 그늘져 있어 바람을 쐬러 온 주민들이 여럿 있었다. 그중에는 삼팔선에서 일어난 이번의 국군과 인민군 충돌은 보통 때와는 달리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고 소곤거리는 이도 있었다. 그 소리를 듣고 봉서 집으로 돌아왔다.

봉서 집에 기거하고 있는 방은 한낮이 되니 통풍이 신통치 않아 무더웠다. 이웃에 사는 두 급우 준병과 종록을 만나 시원한 바람이 부는 그늘진 곳에 갔다. 그곳에서 낮에 본 국방부 분위기와 그 지역 주민들이 소곤거리는 말을 들은 대로 말해 주었다. 인민군은 평소에도 남북의 경계인 남쪽 송악산 삼팔선에서 심심찮게 공격했다. 그때마다 국군은 수복하느라 가벼운 충돌이 있었다. 그들은 그 정도 충돌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그들과 함께 서울 북쪽 경계인 미아리 고개로 오르는 대로에 연결된 돈암동 전차종점 길 건너편에 살고 있는 또 다른 급우 기환이를 만나러 갔다. 그 당시는 큰길에도 횡단로 표시가 없어 누구나 자유로이 길을 건너게 되어있다. 그런 것을 그때는 육군 헌병의 수신호에 의해 건넜다.

저녁노을이 지자 외출이나 휴가 중인 군인을 실은 군용트럭을 비롯해 민간트럭, 시외버스 등 각종 차량들이 헌병의 수신호에 의해 미아리 고개로 쏜살 같이 달리고 있었다. 한편, 그 고개에서 내려오고 있는 차량 속에는 부상한 장병들이 신음하는 고통소리로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시민들은 너나할 것 없이 또다시 인민군이 공격한 이번 삼팔선의 충돌을 끝으로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다음 날 월요일, 종로구혜화동 로터리 동쪽에 있는 동성고등학교 운동장 조회 때 단상에 올라선 교장선생님은 국군이 외출이나 휴가를 간 일요일 틈을 타서 인민군이 남침을 하고 있다. 국군은 실지를 곧 회복할 것이다. 별도지시가 있을 때까지 학교는 정상 수업한다. 추호도 동요하지 말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서는 인민군은 이제까지 알고 있던 국군과의 충돌보다 더한 대대적인 남침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교장선생님 말씀과는 달리 단축수업을 했다. 하교 때 학교 앞 전찻길 인도에는 간밤에 인민군에게 침공당한 경기도동두천지역에서 미아리 고개를 넘어 종로 쪽 인도로 걸어가고 있는 농민들이 띄엄띄엄 줄을 잇고 있었다. 그들은 시내에서 볼 수 없는 달구지를 몰고 있었다. 어떤 농민은 맨발로 핫바지의 아랫도리를 걷은 채 농기구와 봇짐을 지게에 지고 있었다.

언뜻 생각나는 것은 '수도 서울도 안심할 수 있겠는가?'

설마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으리라 생각됐다.

그날이 지난 다음 날도 학교는 단축수업을 했다. 귀가한 대낮부터 봉서 집 동네는 포탄이 터지는 소리인지, 떨어지는 소리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쿠쿵∼쿵, 쿠쿵∼쿵'거리는 가느다란 소리가 미아리 고개 너머 먼 하늘에서 심심찮게 들렸다. 그 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가깝고 크게 들리고 있어 몹시 불안했다. 한편, 라디오에서는 국군이 경기도의정부를 탈환했다는 대통령 담화를 뉴스 시간마다 방송하고 있었다. 의정부가 인민군 수중에 들어갔다는 보도를 들은 적이 없어 그 담화는 알쏭달쏭했다.

▶ 대피하러가던 날

여느 때보다 좀 일찍이 퇴근한 봉서 아버지는 정세가 신통치 않음을 지레짐작한 것인지 저녁을 빨리 끝내도록 했다. 그의 아들 봉서와 며칠 전 경북의성에서 다니러 온 나보다 한 살 연상인 봉서의 큰집 형, 주방 일을 맡고 있는 예쁘장한 아가씨, 나 등 네 명에게 남산기슭의 용산구용산동에 있는 어느 집에 있다가 총소리가 멎으면 돌아오라고 하면서 서둘러 떠나도록 했다. 봉서 부모 내외는 집을 지킨다고 했다. 용산동으로 가게 된 우리는 하루나 이틀 지나면 돌아올 것이라 예상하고 간단한 단봇짐을 꾸리고 봉서를 따랐다. 나는 이번 기회에 잠시 고향에 다녀올 생각을 했다.

우선 우리 일행은 종로로 가기 위해 돈암동 전차종점으로 갔다. 저녁노을이 질 무렵 밖에 되지 않았는데 떠나는 전차가 없고 도착하는 전차도 없었다. 차도에는 군인이 승차한 차량만 왕래하고 인도에는 전투복을 입은 군인이 통행인을 통제하고 있어 길거리는 썰렁했다.

전찻길을 따라 종로 4가로 가려던 방향을 바꿔 둘러가기로 했다. 꼬불꼬불한 언덕이 많은 서울 성곽 외부의 성북구안암동과 동대문구창신동 비탈길을 따라 동대문 전차종점에 도착했다. 보통 때 같으면 서울역행 전차가 한참 다니는 번잡한 시간대인데 그날따라 마지막 전차가 막 떠났을 때 도착했다.

어쩔 수 없이 종로구장사동과 관수동 청계천 쪽을 거쳐 수표교로 향해 걸었다. 청계천 천변 길을 걸을 때는 밤바람을 쐬러 길가에 평상을 내 놓고 앉아 부채질을 하는 주민이 많았다. 그들은 단봇짐을 지고 있는 우리들에게 국군과 인민군 충돌에 대하여 물었다. 나는 미아리 고개 너머로 포탄이 떨어질 것 같은 요란한 폭음소리가 들려 하루나 이틀 동안 대피하러 가는 중이라 했다. 그때는 의정부를 탈환했다고 시간마다 방송하던 대통령 담화의 녹음방송은 30분마다 하고 있었다. 길가에 나와 평상에 앉아 있는 주민들은 라디오 방송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탐탁찮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수표교를 건너 중구을지로와 명동, 충무로, 남대문로를 거쳐 서울역 앞 광장에 왔을 때는 봉서 집에서 떠날 때처럼 잠시 고향에 다녀오리라는 생각이 들어 봉서와 헤어지려고 했다. 그러나 생각대로 될까? 하는 의구심으로 흥분됐다. 그것은 돈암동 전차종점에서 전차가 두절됐고 동대문 전차종점에서 막차를 놓쳤기 때문이다.

서울역 앞 광장에서 열차표를 구입하기 위해 매표소로 갈 때는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뛰다시피 걸었다. 그랬는데도 예고 없이 변경한 마지막 열차를 놓치고 말았다. 매표소에서 헤어지려던 봉서를 다시 따랐다. 국방부를 거쳐 간 용산고등학교까지의 도로변은 불빛이 비치고 있어 걷기에는 불편한 점이 없었다. 용산고등학교를 지났을 때부터는 꼬불꼬불하고 언덕진 남산기슭의 좁은 골목길을 걸었다. 달도 없고 불빛도 비치지 않는 캄캄한 골목길을 무디어진 걸음으로 봉서 뒤를 따르느라 어떻게 걸은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피란하러 간 집에 도착해 안내된 방에서 곤하게 잠든 자정이 지났을 무렵, 벼락 치는 굉음소리가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들렸다. 그 소리가 날 때마다 위쪽 눈까풀과 아래 쪽 눈까풀이 저절로 떨어졌다 붙었다. 그와 함께 천장에는 불빛이 환하게 번쩍거리다가 순식간에 캄캄해졌다. 그 정도로 의식을 잃고 깊이 잠들었는데도 인민군은 벌써 이곳까지 점령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죽음이 코앞에 닥쳐 온 것 같이 무섭고 두려웠다. 그런데도 깊은 잠에 못 이겨 그 생각은 그때뿐 세상모르게 잠에만 폭 빠졌다.

▶ 점령당한 소식

자정이 지난 깊은 밤, 골목길에서 큰소리로 횡설수설하듯 짓거리는 노파의 목소리에 잠이 깼다.

"내 아들이 살아왔다. 내 아들이 돌아왔다"

고 하며 미친 듯이 말하며 걷다가 걸음을 멈추고 한바탕 지껄였다. 자정 때 아들을 찾으러 서대문 형무소(교도소)에 갔다. 인민군 탱크가 잠겨 있는 대문을 닥치는 대로 부수는 것을 지켜보다가 남보다 맨 먼저 감방으로 들어가 아들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풀려난 아들은 누구나 잘 살게 하는 공산주의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을 위해 투쟁한 '테러리스트'였다고 자랑하면서 곧 '혁명가'로 추대될 것이라고 했다.

고향에서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 어느 월요일, 운동장 조회시간에 교단에 올라선 좌익계로 소문난 J주번선생의 훈화가 생각났다. 그 선생은 주훈과 실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알아들을 수도 없는 어떤 이론을, 입에 거품을 물면서 거침없는 달변으로 연설을 했다. 중학교 1학년인 어린 나는 마이크 잡음이 심해 무슨 소리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힘찬 목소리로 뭉쳐서 붉은 피를 흘릴 수 있을 때까지 '투쟁'하자는 말만 어렴풋이 들렸다. 주번선생의 투쟁과 노파의 테러리스트는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공통점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무시무시한 폭력이 수반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어 날이 새면 반드시 인민군 점령지역을 벗어나 천 리나 되는 내 고향 경북포항을 걸어서라도 가리라 다짐했다.

노파가 지껄이던 말 가운데는 한강철교와 인도교가 폭파됐다는 내용도 있었다. 폭파된 순간에 한강인도교를 걸어가던 수많은 시민은 강에 떨어져 죽고 폭파가 끝난 뒤에 걸어가던 시민도 앞이 보이지 않아 수없이 죽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난 나는 피란한 집에서 깊은 잠에 빠졌을 때 들리던 굉음은 국군이 후퇴하면서 예고 없이 한강철교와 인도교를 폭파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노파의 말이 끝나고 자리를 뜨자 간밤에 집을 지키겠다던 봉서 부모님이 궁금해졌다. 봉서의 성화로 총소리가 멎었으니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때 남산기슭에는 앞이 보일까, 말까 할 정도로 어두운 적막이 흐르고 있는 새벽이다. 통행인이 없는 새벽, 인민군 점령지역이 된 남산기슭의 골목길을 걷는 마음은 깊은 산속의 울창한 숲 속을 걷는 것보다 더한 지옥과 같은 곳에서 칼날 위를 걷는 것 같았다.

용산고등학교 앞 네거리에 왔을 때는 날이 밝기 시작했다. 통행인이 어쩌다가 있었다. 네거리 한가운데는 하늘을 향해 두 다리를 뻗고 벌렁 드러누운 채 입가에는 붉은 피를 흘린 자국이 있는 검정색 신사복차림의 시체가 있었다. 그 시체 앞가슴에 붓글씨로 무슨 글이 씌어 있는 흰 천으로 된 어깨띠는 붉은 피로 물들어져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피 흘린 시체라 무서워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벌벌 떨렸다.

국방부 앞을 지나 서울역 앞으로 가는 모퉁이를 돌기 전, 주택가 맞은 쪽 남산기슭의 야트막한 언덕 위에는 소총에 실탄을 장전한 이십여 명의 국군이 웃옷을 벗은 채 될 대로 되라는 듯 맥없이 앉아 있었다. 식검(式劍)을 길게 빼들고 사방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는 웃옷을 벗은 장교는 부하들이 잠시라도 편안하게 휴식하도록 망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곳을 지나 서울역 앞 광장이 보이는 모퉁이를 돌았다. 그러나 서울 역사(驛舍)는 보이지 않는 곳이다. 앞서 가던 통행인 무리가 앞을 보면서 뒷걸음으로 비실비실 거리며 되돌아오고 있었다. 겁에 질린 누군가 서울 역사에는 상당히 많은 인민군과 마차가 있다고 했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사실을 노파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우리는 그 소식이 새롭지 않아 그들을 해치고 서울역 광장 못 미친 대로변 상가의 인도로 걸어가서 서울 역사를 바라봤다. 역사 밖으로 전등 불빛이 보여 인민군과 마차가 분명히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런 인기척은 듣지 못했다.

남대문시장의 중간 정도쯤 되는 남대문로에 이르렀을 때는 쏜살같이 달리던 국군 스리쿼터가 인도 쪽에 급히 정거했다. 무장한 이십여 명의 헌병이 내리더니 부리나케 시장 속으로 사라졌다. 그것을 보니 서울 장안의 거리는 시민과 함께 인민군과 국군이 뒤죽박죽된 것 같았다.

남대문시장을 지나 그 시장 가까이에는 신세계백화점이 있다. 그 백화점은 그 당시 동화(東和)백화점이었다. 동화백화점에서 충무로로 건너가는 길에는 간밤에 피란 갔던 통행인의 왕래가 극심해 난장판이었다. 그 길 한가운데는 무전기를 들고 호루라기를 불면서 수신호를 하고 있는 순경(경찰관)이 있었다. 그는 통행인에게 인민군은 이곳까지 진입했다. 어서 안전지대로 대피하라는 말을 하면서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다. 내가 동화백화점 앞 인도에서 충무로로 건너가려다가 그 순경의 제지로 멈칫하던 순간, '타당, 타당'하는 총소리가 한차례 들렸다. 그 순간, 무의식적으로 재빨리 동화백화점 정문 쪽 외부의 네모난 굵은 기둥에 기대어 섰다. 내 뒤로 여러 명의 통행인이 줄을 서 듯 벽 쪽 쇼윈도에 붙어 섰다.

총소리는 바로 멎었다. 교통정리를 하던 순경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중상을 입은 중학생으로 보이는 학생이 피를 줄줄 흘리면서 그의 아버지 등에 업혀서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그 밖에 몇 사람의 사상자가 났는지 눈여겨보지 않아 알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니 총을 발사한 곳이 확인됐다. 남산에 진주한 인민군 탱크에서 한국은행(화폐금융박물관) 쪽을 향해 교통정리를 하던 순경에게 발사한 기관포 소리였다. 그때 인민군의 잔인성을 보고 더 이상 걸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 달라진 길거리

한낮이 가까워지자 한강로에는 수많은 인민군 탱크가 한강인도교를 향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질서 있게 늘어서 있었다. 그 행렬은 한강인도교가 폭파되어 도강하지 못하고 있었다. 남산기슭의 피란한 집에서 똑똑히 내려다 보였다. 탱크마다 인공기(북한기)가 꽂혀 있었다. 또 인민군 병사가 탱크 뚜껑을 얼어놓고 드나들고 있었다. 그런데도 붉은 천이나 인공기를 들고 그들을 환영하는 시민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며칠만이라도 아니 하루만이라도 시민이 서울을 벗어나 안전지대로 대피할 수 있도록 한강인도교 폭파를 늦추고 국군이 서울 장안을 지켜주었으면 나는 고향엘 쉽게 내려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생각이 들어 지난 밤, 걸은 것이 너무나 어굴하고 한심했다.

"에∼라! 모르겠다. 나의 운명…"

될 대로 되라가 되어 버렸다.

내 아들이 살아왔다고 지껄이던 노파가 골목길에 다시 나타났다.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세상이 됐으니 거리로 나와 인민군을 환영하라며 지나갔다. 노파의 말에 귀가 쏠려 창문을 열고 밖을 보니 한강로에 행렬해 있던 탱크는 보이지 않고 아침에 볼 수 없었던 붉은 천이 집집마다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인민군을 환영하러 골목에 나온 주민은 한 사람도 없어 노파의 말은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도 봉서는 부모님이 걱정되어 집으로 돌아갈 것을 새벽처럼 재차 재촉했다. 나는 우리 같은 젊은이들이 안전할지 의심스러워 좀 더 두고 관망하려고 했다. 그러던 중, 봉서의 성화로 '에∼라!' 모르겠다. 죽지 않으면 산다. 한방에 잤던 셋은 '이판사판이다'하고 골목길에 나왔다. 그때 주방 일을 맡은 아가씨도 옆방에서 뒤따라 나왔다.

용산고등학교 앞 네거리에는 새벽에 걸었을 때와는 달리 피란 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봇짐을 진 통행인이 엄청나게 많았다. 그들은 네거리에서 새벽에 내가 본 시체를 알지 못한 듯 무심히 걷고 있었다. 나는 그 네거리에 이르기 전부터 한참 지났을 때까지 그 시체를 생각하느라 무섭고 불안했다.

서울역 광장이 보이는 모퉁이를 돌 때는 새벽에 봤던 언덕 위에서 허탈하게 쉬고 있던 이십여 명의 국군이 아롱거렸다. 그들은 인민군 추격에 일부는 전사하고 남은 병사는 포로가 됐거나 처음부터 싸우다가 전원 장렬히 전사됐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민군에게 노출되기 전 뿔뿔이 흩어져 숨어 버렸을 것이라 상상했다.

남대문과 남대문시장 입구 쪽 사이에는 도로를 겸한 자그마한 노상광장이 있었다. 그 광장에는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것을 '남조선해방'이라 하고 찬양하는 연설장이 생겼다.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된 지 오년도 채 되지 않는 지금에 와서 또다시 해방이 됐다는 것은 무슨 뚱딴지와 같은 말인가? 당치 않는 소리로 들렸다. 오년 전 나는 초등학생이었다. 해방이 됐다고 동네 어른들을 따라 총칼 없는 거리를 태극기를 흔들고 '얼씨구절씨구 좋다'고 춤을 추면서 기뻐했다. 지금은 그런 점은 조금도 보이지 않고 무섭고 두려운 적막만이 흐르는 음침한 분위기가 되어 있어 그때와는 딴판이었다. 그냥 지나치려 했는데 누군가 손가락으로 연설장으로 유인하고 있어 본체만체하면 반동분자로 연행될 것 같아 참석했다.

연설자는 광장에 모인 백 명 안팎의 군중들로부터 뺑 둘러싼 가운데 있었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화장기라고는 하나도 없고 눈초리는 아주 매섭게 생긴 서른 미만으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입고 있는 치마저고리는 언제 세탁한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때가 꼬지지 배여 있는 허름한 차림이었다. 허리까지 내려온 머리카락은 빗질을 하지 않은 생긴 대로 흐트러진 산발(散髮)이었다. 그런 모습을 한 그녀는 발을 광대처럼 좌우전후로 오가고 있었다. 그때마다 머리카락이 펄럭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여자 귀신이 복수심에서 산발한 채 캄캄한 깊은 밤중, 골목에 휙 나타난 모습과 하나도 다를 바 없었다. 내 곁에 있는 지지하는 극렬분자는, 그녀는 서대문 형무소에 갇혔다가 새벽에 풀려난 투쟁심이 강한 여성동무라고 했다.

그 당시 남북한을 자유로이 왕래하던 삼팔선을 북한이 일방적으로 단절했다. 그 이전에 인권탄압에 견디지 못한 수십 만 북한주민들이 월남(탈북)해 용산동 해방촌, 만리동 뒷산 일대. 서울역전 도동(남대문로 5가)등 여러 곳에 파란 와서 판잣집을 짓고 난민생활을 하고 있는 세칭 '삼팔따라지' 동네가 생겼다. 나는 그녀가 그런 현실을 알고 있는지 의구심이 생겼다.

그녀의 연설은 남조선해방을 위해 지하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감방생활을 하게 된 강인성만 자랑하는 내용이었다. 그런 내용을 반복하다가 치켜 올린 오른 손을 쳐다보면서

"함께 뭉쳐서 투쟁하자~!"

는 소리를 질렀다. 그와 동시에 몇몇 극렬분자도 그녀처럼 오른손을 힘차게 치켜 올리면서 "옳소~!"라고 동조했다. 군중들도 그에 따르면서 박수를 쳤다. 나는 '투쟁'이란 말이 귀에 거슬려 평화스러운 기대는 물 건너 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그녀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

를 선창하자 군중들도 함께 합창했다. 또

"김일성 장군 만세~!"

를 선창해도 따랐다. 마이크가 없는 연설장 맨 뒤편에서 들은 나는 흉내만 내다가 감시가 소홀해진 틈이 생겨 강연장을 빠져나왔다.

▶ 명동과 충무로 거리

남대문시장을 지나 동화백화점 정문 앞 도로로 갔다. 아침에 그 도로에서 교통정리를 하던 교통순경이 남산에 진주한 인민군 탱크에서 발사한 기관포 사격에 희생된 시체는 어디로 치웠는지 보이지 않고 시민들만 웅성거렸다.

길 건너 충무로 서울중앙우체국 옆길을 거쳐 명동으로 갔다. 명동과 충무로 길거리는 서울에서도 가장 번잡하다. 평소에도 통행인이 많아 몸을 비빌 정도로 북적거린다. 그런데도 길 폭이 좁아 인도와 찻길의 구별이 없다. 간밤에 엉겁결에 단봇짐을 메고 대피하러 집을 나왔던 시민들은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총소리가 잠잠해 지자 서둘러 되돌아가고 있어 여느 때보다도 통행인이 더 많았다.

거리 한가운데는 전투모와 야전용 군복에 나무 잎을 소복하게 꽂은 완전무장한 인민군대열이 이십여 명씩 일정한 간격을 두고 두 줄 종대로 질서 있게 행군하고 있었다. 그들은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소련)의 장총인 소련장총과 인민군따발총 총구 끝에 총검을 끼고 앞에총을 하고 있었다. 또 앞만 보고 행군하는 그들의 상체는 부동자세고 눈은 빛이 날 정도로 초롱초롱했다. 이처럼 완벽하게 훈련된 인민군 병사의 위엄은 칼날 같이 날이 선 듯 했다. 가까이에서 인민군을 처음 본 나는 국군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훈련된 것 같고 무장한 장비도 우수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인민군이 나와 반대쪽에서 행군했다. 소련장총은 총신이 길다. 인민군이 내 옆을 마주치면서 지날 때마다 나는 통행인 틈에 떠밀려 총신 끝에 낀 칼날에 찔릴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명동과 충무로 상가건물에는 외벽마다 북한의 대남선전용 벽보가 붙어 있었다. 벽의 규모가 여러 종류라 붙어있는 인쇄된 선전물도 여러 규모였다. 나는 통행인 틈에서 걸음을 재촉하는 데만 정신을 몰두하느라 벽보를 유심히 볼 수 없었다. 그러나 한 발짝씩 걸을 때마다 똑같은 내용의 선전물이 밀집된 건물 벽에 부착되어 있어 곁눈질만 해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벽보 상단에는 인공기와 소련 국기가 똑같은 크기로 나란히 부착되어 있었다. 또 인공기 밑에는 김일성 사진, 소련 국기 밑에는 스탈린 사진이 부착되어 있었다. 그 아래에는 남조선해방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맨 끝 하단에는 민족반역자로 지목한 십 명의 명단이 열거되어 있었다. 첫째는 대통령이다. 그 밖에는 미군정 때 치안을 담당했던 인사, 정부수립 후 질서유지에 공헌한 인사 등이었다. 그들은 '인민의 이름'으로 처단해야 하고 그들을 제외한 모든 인민은 남조선해방 전선에 동참해 줄 것과 김일성 장군은 위대한 우리의 영도자라고 자랑했다.

종이로 된 선전물이 대부분이었으나 그 당시 명동국립극장(국립예술극장) 같은 대형건물에는 극장 프로 간판 규격의 크기로 된 대형도 있었다. 그런 큰 선전물은 천으로 되어 있었다. 인민군은 삼팔선에서 침략한지 삼일 남짓 되고 서울을 점령한지는 한나절 밖에 되지 않았다. 그 당시는 활판으로 인쇄할 때라 4색도로 제작된 인물사진은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인쇄해 두었을 것이다.

그 선전물은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새벽에 부착한 것으로 들어났다. 그렇게 단정하게 된 것은 어느 누구도 부착하는 장면을 봤다는 소문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 벽보는 북한이 먼저 남침을 시작한 확실한 증거로 확인됐다.

▶ 종로 거리

간밤에 피란했던 남산기슭의 용산동 집에서 종로구장사동까지는 어저께 돈암동에서 용산동으로 피란 갈 때와 정반대로 걸었다. 장사동부터는 동대문 쪽으로 가지 않고 질러가기 위해 종로 4가 네거리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 네거리도 명동과 충무로처럼 통행인이 북적거리는 번화한 지역이다. 그런 지역이 그날따라 너무나 한산하고 고요했다. 훈풍이 부는 유월 마지막 주의 청명한 대낮인데도 통행인이 뜸해 음침하고 서늘한 숲 속에 어두움이 닥쳐온 것처럼 적막만이 흐르고 있었다. 왜 그런 가 했더니 지난 새벽에 미아리 고개를 넘어 종로로 진격해 오던 인민군이 창경원(창경궁)에서 국군과의 전투를 했다. 그 전투를 거쳐 동대문경찰서(혜화경찰서)에서 순경과도 전투를 했다. 그 전투로 경찰서는 시커먼 흉물처럼 탔고 길 건너 맞은편 서울전매서(종로금은쥬얼리) 지하실도 까맣게 타버렸다. 이런 두 흉물을 본 나는 여태껏 인민군은 서울을 무혈로 점령했다는 인식을 달리 했다.

초기에는 순경들이 인민군과 교전해 상당한 사상자를 낸 전과를 올렸다. 그 후 인민군 후속부대가 대거 도착했다. 전투할 병력과 장비가 부족한 순경들은 길 건너 전매서 지하실로 이동했다. 그러자 인민군은 전매서 지하실을 향해 집중 사격했다. 순경도 굽히지 않고 대항했다. 화가 난 인민군은 지하실 출입구, 비상구, 환기통 등에 기름을 뿌리고 가연성이 있는 물질을 쳐 넣은 다음, 불을 질러 순경은 전원 희생됐다. 그런 말을 한 피란 가지 안 했던 그곳 주민들은 공포의 불안으로 간밤은 한잠도 자지 못하고 겁에 질려 꼼짝할 수 없었다고 한다.

동대문경찰서를 지나 돈암동 쪽 창경원 네거리에 이르렀을 때, 혼자서 히죽거리거나 히히거리는 마흔 안쪽으로 보이는 여성이 있었다. 한복차림을 하고 있는 그녀의 맵시는 남루하고 엉성했다. 답답해서 고쟁이를 벗어 버린 채 네거리의 모퉁이를 재빠르게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또 '느릿느릿' 걷기도 했다. 옷고름이 풀릴 듯 말 듯 하고 저고리의 앞섶이 벌렁 벌어져 한쪽 젖통이 덜렁거렸다. 그녀가 그런 행동을 하게 된 것은 지난 새벽에 창경원 맞은쪽 서울대학교부속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창경원에서 국군과 인민군이 전투하는 총소리에 놀라 뛰쳐나오다가 미쳐버렸다는 풍문만 들렸다.

서울대학교부속병원 북쪽 끝자락에 있는 영안실 상공에는 시커먼 연기가 바람이 불지 않아 흩어지지 않고 하늘을 가로막으면서 뭉게뭉게 떠 있었다. 그 연기는 오뚝이 모양으로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 무리를 하얀 색으로 바꾸어 놓으면 여름철의 뭉게구름으로 착각할 수 있을 정도였다.

누군가 그 연기에서 품어낸 냄새는 병원에 입원했던 사망자를 비롯해 살아있는 환자 또는 간밤에 창경원과 동대문경찰서 전투에서 희생된 전사자, 부상자 등을 그 영안실 뜰에서 몽땅 태운 송장냄새라고 했다.

창경원 정문인 홍화문(弘化門) 앞뜰에 들어서자 국군 스리쿼터가 세 대 정차해 있었다. 그 차는 타이어가 펑크 났거나 엔진 등이 손상되어 가동하기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중 매표소 쪽 스리쿼터 운전석 아래 땅바닥에는 군인 발목 한 개가 야전용 군화를 신은 채 떨어져 있었다. 그 발목을 본 순간, 내 발목이 떨어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불안했다.

그 부상병은 걷지 못해 포로가 됐다가 이곳 영안실 뜰에서 산채로 화장됐을 것이다. 또 창경원을 지나 혜화동로터리 쪽 서울여자의과대학부속병원(명륜 아남아파트)은 인적을 볼 수 없었다. 그곳 환자도 서울대병원 영안실 뜰에서 화장됐을 것 같아 인민군의 포악한 야만성에 몸서리쳤다. 나는 다행히 화장하는 장면이 지난 다음에 그 지역을 걸었기에 무섭기는 하지만 정신은 멀쩡했다.

드디어 돈암동 봉서 집에 도착했다. 간밤에 집을 지키겠다던 봉서 부모도 돈암동 전차종점 부근에서 따발총, 소련장총과 포탄 소리가 나드니 자정이 가까워 질 무렵부터 포탄이 지붕 위로 떨어질 것 같아, 무서워서 남산의 동쪽 기슭인 장충단공원 숲 속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돌아온 즉시 대문 옆 기둥에 붉은 천을 매달아 놓고 계셨다.

▶ 뒤바뀐 세상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다음 날부터 모든 직장은 올 스톱되고 학교는 언제 개교한다는 예고도 없이 자동 휴교됐다. 고향에 가려던 생각은 한강인도교가 폭파되어 강을 건널 수 없어 무모하게 되었고 생활비를 보냈다는 인편은 상경을 늦추어 만나지 못해 용돈마저 떨어지게 됐다. 그런 처지에 있는 나를 봉서 집에서는 봉서와 똑같이 대해 주어 다행이었다.

물가는 폭등하면서 싸전은 문을 닫았다. 매달 봉급을 수령하고 말쯤 양식을 마련하는 봉서 집에서는 월말이 가까워졌으니 비축해 둔 양식이 거의 동이 난 것 같았다. 또 봉서 집에서는 인사차 다니러 왔던 봉서 큰 집 형이 꼼짝할 수 없게 되어 식구는 평소보다 한 명 늘어났다. 그런 형편이 되어 있는 봉서 집에서는 점심은 굶고 아침저녁만 두세 숟가락 정도의 쌀이 들은 멀건 죽 한 대접으로 지냈다.

시청과 구청, 동사무소(주민 센터)는 인민위원회, 경찰서와 파출소(지구대)는 내무서로 바뀌었다. KBS 라디오 방송은 김일성 장군의 노래와 찬양, 충성, 그리고 인민군은 남조선해방을 위해 서울을 점령한 것은 정당하다고 방송했다.

미쳐 피란 가지 못한 고위직정부요원, 사회적지도자, 저명한 인사 중 일부는 연행되어 강제로 북한의 남침을 지지하는 성명을 육성으로 발표케 했다. 돈암동 인민위원에서는 그 방송을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대형 확성기로 내보내고 있어 할 일 없는 나는 봉서 집에서 하루 종일 싫증나도록 들었다.

중단 됐던 전차가 운행된 다음 날은 돈암동 전차종점에서 종로 쪽으로 갔다. 그곳에 간 것은 혹시 고향으로 갈 수 있는 루트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때만 해도 시민들은 집 밖을 드나들기를 꺼리고 있어 전차 속은 텅 비어 있었다. 종로구원남동 네거리에서 통행인이 많을 것으로 예측된 동대문을 향해 걸었다. 비스듬하게 경사진 길에는 서둘러 내 쪽으로 내려오고 있는 청소년이 있었다. 그들은 인민군과 좌익계청년들이 합동으로 젊은 통행인을 동원한다면서 서둘러 숨을 곳을 찾고 있었다. 나도 동원될 까봐 겁이 났다. 방향을 돌려 충신시장에 들어갔다.

그 시장은 텅 비어 있어 선들하고 으슥했다. 또 불쾌한 화약 냄새가 났다. 그 냄새는 시장창고에서 인민재판을 하고 총살한 탄약 냄새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되자 총살 장면이 떠올라 더욱 무서워져 얼른 봉서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지난 달 없는 캄캄한 밤, 봉서와 나는 아무런 영문도 모르고 빈민들이 밀집해 있는 꼬불꼬불한 창신동 언덕진 골목길을 봉서 어머니를 따라 어떤 싸전을 찾아갔다. 있는 자는 없는 자를 위해 내놔라 하고 있어 골목은 어수선 했다. 찾아간 싸전 주인은 봉서 어머니의 귓속말을 듣고서는 입을 손바닥으로 막고 "쉿∼!"하면서 봉서와 나를 점방 안으로 불러 들였다.

잠시 후 인적이 없는 틈을 타서 우리 일행에게 숨겨 놓은 쌀을 대두로 한 말 남짓씩 쌀자루에 담아주었다. 그 쌀자루를 어깨에 메고 되돌아오는 길에 내놔라 뒤지고 다니는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숨찬 걸음으로 헐레벌떡거리면서 봉서 집으로 걸어왔다.

그날이 지난 후의 양식은 봉서 어머니가 주방 일을 맡은 아가씨와 함께 경기도광주에 가서 머리에 이고 날랐다. 돈암동 전차종점에서 동대문 전차종점까지는 전차로, 그곳에서 뚝섬까지는 기동차를 이용했다. 그 다음은 폭파된 광진교 가까이에 있는 광나루 나루터로 걸었다. 그 나루터에서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그곳부터 광주까지 걸어가서 각자 대두로 두 말 정도의 쌀과 야채 등을 머리에 이고 돌아왔다. 이른 새벽, 집을 떠나 밤늦게 돌아온 어려움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할 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는 봉서, 그의 큰집 형과 나 등을 동행하지 않는 것은 도중에 좌익계단체에 동원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 인민위원회 회의

7월 초순 어느 날, 각 세대마다 한 명씩 돈암동 인민위원회 회의에 참석하라는 통지가 왔다. 봉서 아버지는 어느 누구를 지명하지 않고 있어 불참할 것 같았다. 반동분자 집이라는 낙인이 찍힐 것 같아 내가 회의 도중에 참석했다. 회의는 인민위원회 마당에서 몇 인민위원이 번갈아가면서 북한의 남조선해방은 당연하다는 연설만 했다.

지지자가 박수를 치면서 "옳소∼!"라 하면 동원된 참석자는 덩 달았다. 그렇게 하면 회의내용에 대한 이견이 있을 수 없게 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회의한 모든 결의는 그렇게 한다는 것에 실망했다. 마지막 연설은 초등학교 3∼4학년 정도의 어린이가 했다. 원고 없이 달변으로 말한 그 연설은 막힌 점이 없어 신통했다. 그 연설의 마지막에는 '모든 애국청년은 인민의용군에 지원해 참전하자'고 했다. 그것은 어린이를 동원한 얄팍한 수작이라 생각됐다.

연설을 들으니 금년 8월15일까지 남조선을 해방시킨다던 전선이 심각해진 것 같았다. 어린이는 연단을 내려오면서 자진해서 인민의용군에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에 따라 인민의용군에 지원하겠다고 연단 쪽으로 나가고 있는 청중은 7∼8명이었다. 그중 3명은 멈칫거리다가 지원했다.

나보다 한두 살 위로 보이는 누군가 다가와서

"동무는 인민의용군에 지원할 뜻이 없는가?"

라는 투로 말을 걸었다. 갑자기 질의를 받은 것이라 멈칫하다가 좀 시간을 두고 생각한 다음에 집에서 동의를 얻겠다고 응답했다.

"동무는 아직 교양이 부족하다"

"교양이 풍부해지면 스스로 지원하게 될 것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다른 청소년에게 접근했다.

의용군에 입대하겠다고 지원한 7∼8명 중 멈칫거리다가 지원한 3명만 별도로 분류하고 있어 정식 지원한 것이고 다른 일부는 각본에 의해 형식적으로 지원한 것이라 생각됐다. 멈칫거리다가 지원한 3명은 아무런 연고 없이 지방에서 상경한 하숙생일 것이다. 끼니를 해결하지 못해 인민의용군에 입대해 굶주림을 모면하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봉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나는 것은 나에게 다가와서 말한 '교양이 풍부해지면…?'이란 뜻에 의문이 생겼다. 그것은 인민의용군 지원을 강요하기 위한 강제성을 수준 높인 얄팍한 용어일 것이라 생각됐다.

인민군이 남침을 시작한 초기와는 달리 국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게 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인민군은 국군과의 전투에서 연전연승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침략자 편에 지원해 동족을 상대하여 싸우는 것은 어떠한 경우도 용납할 수 없다고 단정했다. 더구나 아무리 부강한 국가라도 인권을 무시하는 일당체제는 국민이 주권을 가진 민주주의국가라 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나는 인민의용군에 지원하라는 권유를 거절했다는 것을 봉서 부모님께 말했다. 봉서 부모는 '좋다. 나쁘다'는 말은 없고 앞으로는 어떤 회의에도 참석하지 말라고만 하셨다. 그 말씀은 내가 판단한 것을 잘했다는 격려를 조심해서 말한 것 같았다.

인민위원회에서는 직장인은 소속 직장에 복귀하라고 독려했다. 경성전기주식회사(한국전력공사) 본사 행정직 사원인 삼십대 후반의 봉서 아버지는 직장에 복귀했다. 덩달아 나도 등교해 봤다. 선생님과 사무직원은 없고 본교생은 뜸했다. 낯선 청년과 학생이 들랑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좌익운동을 하는 것 같았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날 새벽, 종교철학을 강의한 정진구 신부님이 학교에서 인민군에게 연행되어 교문 앞 혜화동로터리 한가운데 분수대에서 총살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 시신도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날, 서울대병원 영안실 뜰에서 화장되었으리라 가상해보니 몸서리쳐 서둘러 봉서 집으로 돌아왔다

돈암동 인민위원회와 성북내무서는 집집마다 라디오 성능을 조사했다. 성능이 4구 이상은 인민위원회나 내무서에 보관토록 했다. 성능이 4구 이상은 남한방송을 들을 수 있다. 그것을 제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봉서 집 라디오 성능은 4구다. 발각되어 반동으로 낙인이 찍히게 될지라도 3구라고 신고했다. 봉서 부모는 그렇게 신고하고 몰래 남한방송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 폭격된 용산역 동원

7월 10일쯤, 유엔군 제트전투기가 수시로 북녘 하늘을 비행하고 있었다. 그 전투기는 처음으로 개발한 최신무기다. 귀가 쨍하도록 쌕쌕거리는 굉음은 천둥치는 소리와 비슷했다. 그 소리를 듣고 소리 나는 하늘을 쳐다보려는 눈 깜작할 사이, 그 전투기는 북녘 하늘의 창공을 뚫고 사라져 버리고 비행했던 하얀 줄무늬 흔적만 서서히 퍼지고 있었다. 그런 초음속으로 비행하는 목적은 알 수 없었으나 혹시 북한의 인민군 후속 병력과 군수품 수송 등을 차단하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으로 봐서 유엔군이 6⦁25전쟁에 참전하고 있다는 것이 확실히 확인됐다. 앞으로 어떠한 수난을 겪더라도 살아남기만 하면 인민군 점령지역을 벗어 날 수 있을 것이라는 한 가닥의 희망이 솟아났다.

그런 날이 며칠 연속되다가 여러 편대의 유엔군 폭격기가 서울 상공을 회전하면서 어떤 지역을 집중적으로 폭격했다. 창공에서 떨어뜨린 수많은 폭탄은 말똥처럼 뚝뚝 떨어지면서 '콰∼쾅쾅'거리는 맹렬한 폭음소리를 내는 순간부터 하늘을 검은 연기로 시커멓게 물들게 했다. 그 위치는 용산역과 그 주변인 것 같았다. 자세한 위치를 몰랐던 것은 내가 있는 돈암동과 폭격한 위치가 너무나 멀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은 더 많은 유엔군 폭격기가 그 지역을 재차 폭격했다. 연달아 이틀 동안 폭격이 끝난 저녁노을이 들 무렵, 돈암동인민위원회에서는 폭격당한 곳에 구명과 소화 작업을 할 인력을 각 세대마다 한 명씩 동원했다. 그 경우는 지난 번 인민위원회 회의에 참석하라는 성격과 다르고 고향으로 갈 수 있는 소식을 들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어 봉서 집 몫으로 내가 자원했다. 거주지역마다 동원된 수많은 시민들과 함께 인솔되어 도착한 목적지는 돈암동에서 예상한 대로 용산역과 그 주변이었다.

유엔군 폭격기는 용산역과 그 주변에 있는 기관고(機關庫), 조폐공사(造幣公社) 등을 폭격했다. 배치된 장소는 화염에 싸여 있는 조폐공사 창고였다. 그 창고에는 화폐제작용 특수종이가 불타고 있거나 연기만 무럭무럭 나고 있었다. 용산역 기관차 급수탑에서 여성들이 날라다 준 양동이에 담긴 물을, 타고 있는 종이 더미를 향해 정신없이 던졌다.

이틀 동안 폭격당한 불은 양동이에 담긴 물을 쉴 틈 없이 던지고 던져도 꺼지지 않고 더 활활 탔다. 불씨가 잡히면 활활 타던 종이 더미가 내 몸을 향해 머리 위로 확 덮쳤다. 그때는 이리 비키고 저리 피하면서 불을 껐다. 그런데도 앞뒤와 좌우에서 꺼졌던 불이 되살아나 순식간에 불바다를 이룬 적도 있었다. 불길은 새벽녘에 겨우 잡혔다. 그래도 종이 더미를 휘저으면 불이 되살아나기도 했다. 그런 곳을 깊숙이 들어가 불을 끄던 중 날라다 준 양동이가 보이지 않아 창고 밖으로 나와 보니 아무도 없고 날은 훤하게 밝았다.

집으로 오려던 순간, 몸이 웅크려지면서 전율이 일어났다. 밤새도록 소화 작업을 했던 가까이에는 불에 타서 살갗이라고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하얀 해골과 뼈만 쌓아 둔 무더기가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악!, 억!"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오면서 몸서리쳐졌다. 해골은 모두 두 눈알이 빠진 채 전쟁을 원망하고 비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원망과 비관은 구천에 가서도 풀리지 않으리라 생각됐다.

유엔군 폭격기가 용산역 영내의 기관고와 이웃에 있는 조폐공사 등을 폭격한 원인이 들어났다. 인민군과 인민위원회는 점령한 지역의 각종 시설을 활용했다. 그중 용산역 영내 기관고에는 많은 기관차가 있다. 한강철교가 폭파되어 철교 이용은 불가능하지만 북한에 있는 상비병이나 군수물자 등을 서울까지라도 수송하려는 것을 유엔군은 단절시키려고 기관고를 폭파한 것 같았다. 또 북한에서는 인민위원회, 민족애국청년단. 여성동맹 등 좌익계단체와 공공기관 운영, 시민들이 남조선해방에 대한 협조 등을 위해 한국은행 화폐를 마구 발행하고 남발했다. 그로 인해 물가는 폭등하고 화폐가치는 떨어지며 민심은 흉흉해졌다. 유엔군은 더 이상 화폐를 발행하지 못하도록 조폐공사를 폭격한 것 같았다.

▶ 연행과 탈출

친하게 지낸 고향 친구의 집을 찾아가면 한 끼라도 푸짐하게 음식 대접을 받으리라 생각했다. 작은 누나와 절친한 친구의 결혼한 언니는 나를 만나면 친동생처럼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그 집은 서대문구충정로에 있고 생활이 넉넉하다. 양식은 농촌에서 철마다 조달되고 있어 사서 먹지 않는 가정이다. 돈암동에서 그 집까지 왕복하려면 한나절은 걸린다.

최근에는 기회가 잡히지 않다가 전쟁이 일어났다. 차라리 지금처럼 빈둥빈둥 놀고 있을 때, 그녀의 언니를 찾아보고 이 난리 통에도 피란 가지 않고 있으면 만나서 고독을 달래는 동안 차려 놓은 한 끼의 밥이라도 푸짐하게 먹으면 일시적이나마 배가 부를 것이라 생각했다.

7월 하순이 된 어느 날, 아침 일찍부터 그녀의 언니를 만나러 충정로를 향해 무심코 걸었다. 종로구안국동 어느 골목 모퉁이에서 좌익계청년들이 나의 발걸음을 제지시켰다. 그들은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남조선해방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긍정할 수 없어 침묵으로 대했더니 나를 '교양이 풍부'한 것으로 간주했다. 먼저 제지를 받고 대기하고 있는 청소년들과 함께 종로구수송동의 수송초등학교에 수용됐다.

다음 날 오전 11시쯤, 소속 대열이 정해졌다. 그때까지 허기를 참고 있다가 얼금얼금 짜 놓은 긴 판자 위에 가지런히 얹어 놓은 주먹밥을 왼팔에 완장을 찬 여성동무로부터 한 사람당 한 덩이씩 배당받았다. 그 판자는 교실 밖에 별채로 지은 변소(화장실)에 갈 때, 밟고 다니는 발판이었다. 한여름 더위에 바짝 마른 발판을 걸레질만 슬쩍 훔친 인분은 그대로 말라붙어 있었다. 그 발판을 보고서는 그 위에 올려놓은 주먹밥에 손이 가지 않았다. 옆에 있는 연행된 동료들은 배당받은 주먹밥을 굶주린 이리처럼 단숨에 먹어버렸다. 그 꼴을 본 나도 시장기에만 몰두되어 순식간에 먹었다. 그것도 한 덩이만 더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이 되자 수송초등학교에 수용된 동료들은 덕수궁 돌담을 따라 종로구정동에 있는 배재고등학교로 이동했다. 그곳에 수용되어 있는 수많은 동료와 함께 배정 받은 교실에서 그날 밤을 보냈다.

그 다음날 아침, 연행된 동료들은 인민군이 인수할 때까지 이곳에 수용된다는 풍문이 돌았다. 인민군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아 인수해 갈 때까지 며칠이 걸릴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인민위원회에서는 연행된 동료들이 잡념을 갖지 못하게 하려고 전원 운동장에 집합시켰다.

운동장 단상에는 마이크를 장치해 두고 밧줄로 포박한 삼십 안팎으로 보이는 청년 한 명을 세웠다. 인민위원회에서는 포박한 청년의 성명과 거주지, 나이, 직업 등 신분은 알리지 않고 미리 쪽지에 적은 죄질을 큰 소리로 또박또박 읽었다. 읽던 구절이 멈추어질 때마다 운동장에 연행된 동료들은 우레와 같은 "옳소∼!"소리와 함께 박수를 쳤다.

포박된 청년의 죄는 좌익계애국청년을 연행한 일, 뇌물을 받은 일, 계집질을 한 일, 빌린 돈을 갚지 않은 일, 첩을 둔 일 등이었다. 단상에 포박된 청년에게는 한 마디도 변명할 기회를 주지 않아 그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다. 운동장에 연행된 동료들의 옳소 소리와 박수 치는 소리는 그의 비행과 범죄를 심판하는 절차다. 변명이나 반대 의견이 나올 수 없고 나올 기회도 주지 않아 동료들은 조목마다 만장일치로 찬성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형을 하자∼!"

는 말에 더 큰 우레와 같은 옳소 소리와 박수로 동의했다. 어느 누군가 그것을 '인민재판'이라 했다. 인민재판은 그들이 만든 각본대로 처벌하는 재판이었다. 법률적인 지식이나 상식이 없는 강제로 연행된 동료가 판결한 것이다. 그날따라 인민재판을 하게 된 것은 앞으로 어느 누구도 불만과 불복하면 이같이 처벌한다는 으름장인 것 같았다.

앞이 한 치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그날 밤, 수용된 교실 바닥에 옷도 벗지 않고 누운 채 낮에 있었던 인민재판의 광경이 떠올라 좀처럼 잠이 들지 않았다. 운동장 단상에서 인민재판을 받은 청년은 벌써 시체로 변해 세상을 하직했을 것이다. 그는 억울함을 한마디도 말하지 못하고 원망만 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중, 옆에 누워 있던 몇 살 위로 보이는 키 크고 날씬한 동료가 혼자서 들릴 듯 말 듯 나지막한 소리로 "도망쳐야지∼!"라는 말을 한 순간, 그의 발가락 끝이 나의 장딴지를 긁적거렸다. 캄캄한 밤중에 본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의 의견을 슬그머니 손잡고 동의했다.

순찰하는 감시가 소홀한 자정쯤, 슬그머니 잠자리를 빠져나와 변소에 가는 체 하고 운동장의 한쪽 귀퉁이 벽돌담 밑에서 그를 만났다. 담 높이가 높아 발판이나 사다리 없이 혼자서는 넘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의 양어깨를 두 발바닥으로 짚고 담 위로 올랐다. 한쪽 다리는 담 밖으로, 다른 쪽은 담 안으로 덜렁거린 채 펑퍼지게 앉아 그의 오른쪽 손을 양쪽 손으로 꼭 잡고 힘차게 당겼다. 그는 순식간에 담 위에 올라앉았다. 담 위에 올라앉은 우리 둘은 담 밖을 내려갈 때는 숨을 죽이고 운동장 외벽에 손바닥과 배를 바짝 붙여 수직으로 미끄럼 타듯 했다.

콩알만큼 작아진 뛰는 가슴은 오랫동안 숨차게 했다. 숨찬 소리를 멈추게 하는 것도 벅찬 일이었다. 한밤중의 숨소리는 보통 때보다도 크게 들린다. 혹시 순찰 다니는 감시원이 숨소리를 듣고 의심을 품으면 또다시 연행된다. 숨을 죽인 채 그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수신호로 헤어졌다. 헤어지고서도 통행인을 피하기 위해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봉서 집에 돌아 왔을 때는 훤한 아침이었다.

▶ 작심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한 달 지나도 국군이 수복할 기색이 보이지 않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 고향을 가야 한다.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가야 한다. 가다가 살지 못하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가야 한다. 죽어도 동족을 살상하고 침략하는 인민군 행위에 협력자가 안 되는 것이 떳떳하다. 봉서 어머니가 양식을 조달하러 광주로 갈 때, 광나루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도강한 코스로 서울을 떠나기로 작심했다.

뜻이 맞고 마음에 드는 동행할 고향친구를 규합해야 한다. 그들이 거주하고 있는 집을 찾아가야만 상의할 수 있다. 도중에 좌익계청년에게 연행되지 않는 묘책이 필요하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지금까지 상황을 내 나름대로 참작했다. 아침저녁과 전차 속, 번화한 길거리는 연행하지 않고 한적한 골목에서만 연행한다. 친구가 거주하고 있는 집이 골목에 있으면 반드시 앞서가는 젊은 남성 통행인의 뒤를 따르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좌익계청년이 골목에 나타나 앞서 가는 통행인을 연행하려 설득할 때 뒤 따르던 나는 번화한 도로로 도망칠 여유를 갖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동기생 규태는 그의 누님 집이 있는 종로구효자동에 거주하고 있다. 효자동 전차종점은 전차에서 내리면 오른쪽은 경복궁의 높은 담이 있어 통행인이 뜸하고, 반대쪽은 꼬불꼬불한 좁은 골목길이 많은 고전적인 한옥이 옹기종기 붙어 있다. 그러나 비교적 한산하다. 또 전차종점의 북쪽 자하문 밖은 북한산이 막고 있다. 그런 특징이 있어 다른 정거장에 비교하면 하차하는 승객이 적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만나러 갔다.

규태를 만나러 전차종점에서 내릴 때, 좌익계청년과 학생이 나보다 먼저 내린 학생들을 연행하고 있었다. 그중 한 청년이 나를 손짓으로 불렀다. 그 순간 '걸렸다'는 생각이 들어 앞서 내린 학생 뒤를 따르는 척하다가 부리나케 효자동 골목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단거리 선수처럼 달리면서 뒤 따라 오는 좌익계 청년과 학생을 따돌리고 반대쪽 통의동 큰길로 도망쳤다. 그 길을 따라 통행인이 많은 체부동, 내자동, 내수동 큰 길을 거쳐 번화한 광화문전차정거장에 갔다. 그 정거장에서 우연히 고향 친구 호진을 만났다. 그와 함께 고향에 갈 것을 약속받았다. 또 내가 거주하고 있는 봉서 집 동네와 이웃한 안암동에는 고향 동기생 영구가 거주하고 있다. 그를 한밤중에 찾아가 동행할 것을 약속했다.

이들과 약속했을 때의 풍문은, 인민군은 추풍령과 문경새재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고향에 도착하기 전, 인민군은 내 고향을 진격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 생각을 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 봉서 집 가족과의 작별

8월1일 오전, 간편한 피란민 차림으로 단봇짐을 지고 정들었던 봉서와 그의 큰 집 형과 헤어지고 안채로 통하는 대청 앞 디딤돌 위에 서서

"아주머니 ! 안녕히 계십시오. 고향으로 갑니다"

고 하직 인사를 퉁명스럽게 했다. 직장에 출근 중인 봉서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는 뜻도 표했다. 아무런 반응이 없어

"전쟁이 끝나면 다시 오겠습니다"

고 하자, 봉서 어머니는 안방에서 듣다가 깜짝 놀라면서 황급히 앞마당에 맨발로 내려 오셨다. 무뚝뚝한 나의 얼굴을 보고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아무런 상의도 없이 혼자서 어떻게 그 먼 길을 갈 수 있겠는가?"

고 하셨다. 차편이 없어 뜻이 맞는 고향친구 호진과 영구와 함께 걸어서 간다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정이 담뿍 들었던 봉서 어머니는 나의 오른쪽 손바닥과 팔목 사이를 두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면서

"굶어도 같이 굶고 죽어도 같이 죽자 !"

면서 눈물을 훔쳤다. 나도 그 고마움과 앞으로의 두려움이 겹친 눈물이 한꺼번에 흘러 얼굴을 흠뻑 적셨다. 헤어지는 마지막 작별인사 때 봉서 어머니는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한 뒤로 제대로 된 식사를 차려주지 못했던 것을 안타까워하셨다.

영구 집에서 만난 우리 셋은 경기도광주와 이천, 충북충주, 경북안동 등으로 걸어갈 계획을 세우고 하루 지난 다음 날 새벽에 출발해 광나루 나루터에 갔다. 그 나루터에는 먼저 온 수많은 시민들이 무거운 봇짐을 지고 어기적어기적 걷고 있었다.

인민군은 서울을 해방시켰다고 선전한지 한 달을 넘겼다. 그런데도 시민들은 안정을 찾지 못하고 피란 가느라 좌왕우왕하는 모습을 보고 만감이 교차하면서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서울을 떠났다. 그날이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한 달 엿새 된 날이었다. ※

[참고] 국군이 서울을 9⦁28수복하자 봉서 집 가족도 그의 고향 경북의성으로 피란 갔다. 피란 가던 중, 봉서 부모는 내가 살았다는 소식을 듣고 전쟁으로 파괴된 우리 집에 찾아오셨다. 만난 자리에서 내가 서울을 떠난 뒤, 봉서 아버지는 성북내무서로 두 차례 출두했다. 두 번째 출두했을 때 반동분자로 낙인이 찍힐 것이라 짐작했는데 다행히 담당 조사원이 급성맹장염으로 부재중이었다. 다시 출두하게 되면 귀가할 수 없게 될 것 같아 감시가 소홀한 캄캄한 깊은 밤중에 가족과 함께 집을 나와 광주지역 산속에 피신해 죽음을 모면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일찍이 고향으로 내려간 나의 용단이 재치 있는 판단이었다고 말씀하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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