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풍-잃어버린 8년

입력 2003-03-13 12:08:17

요즘 대구시내 교통질서가 부쩍 나빠졌다.

시민들은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허둥댄다.

차선위반.끼어들기는 예사고 여기저기서 클랙슨 소리 요란하다.

곳곳에 접촉사고 현장이 널브러져 있다.

시민정신이 뒷걸음치고 있다.

그렇다, 이상한 일이지만 대구시민은 지금 뭔가에 쫓기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아니면 몽유병자처럼 보이지 않는 '허상'을 잡으려고 허공을 배회하고있는 지도 모른다.

이유는 간단하다.

첫째, 대형 참사로 인해 시민들의 마음이 더욱 황폐해졌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에서 시민의 77.8%가 지지한 후보가 패배함으로써 정서적 자존심이 구겨져 있는데다 어처구니 없는 사고로 수백명이 목숨을 잃었으니 문화적 자존심마저 무너진 상태가 아닌가. '대구는 왜 이런가'하는 자괴의 소리가 나올 법도 하다.

오죽했으면 며칠전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이 대구는 지금 '심리적 공황상태'라고 했겠는가.

고장난 安全 시스템

둘째는 사고가 난 지하철 중앙로역 일대 교통이 통제되는 바람에 우회 차량들로 인해 도심은 다니기가 예전보다 배나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시민들은 원인 제공 행위인 '지하철 참사'를 떠올린다.

도시 곳곳에 나부끼는 애도의 현수막이 아니더라도 시민들은 하루에 몇 번씩 자동적으로 '2.18참사'를 회상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열불나는 사건을 가슴에 안고 살면서도 마땅히 화풀이할 대상이 없는 것이다.

뉴욕 '9.11 테러' 같으면 보복 전쟁이라도 일으켜 앙갚음할 수 있고, 95년 동경 지하철 독가스 사건 정도만 돼도 사이비 종교집단을 까뒤집어 실컷 분풀이라도 하겠는데…. 그저 대구의 '집안 일'이거니 생각하고 안으로 삭혀야하니 열불이 더 치받는다.

교통신호를 지킬 계제가 아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을 짚어보면 더욱 심각해진다.

먼저 이번 사고는 8년전 상인동 가스 폭발사고와 흡사하다는 점이다.

95년 4월28일 오전 7시50분쯤 상인동 영남중고앞 네거리 대구지하철 1-2공구 부근에서 가스가 폭발, 때마침 복공판 위를 지나던 학생과 시민 1백1명이 숨지고 2백여명이 부상을 입은 대형 참사다.

이 사고도 무슨 조직적인 테러가 아니다.

지하철공사장 인근 백화점 신축공사 현장에서 지하터파기 공사를 하던 인부가 지하 170㎝ 깊이에 매설된 직경 100㎜ 도시가스 중압관을 파손시켜 이곳에서 분출된 도시가스가 80여m 떨어진 상인동 지하철공사장으로 유입돼 폭발한 것이다.

아주 단순한 원인 행위가 대형참사로 이어졌는데 8년만에 같은 사고가 일어났다.

둘다 원인 발생 후 안전 장치가 거의 작동되지 않는 사회시스템에 문제가 더 크다.

상인동의 경우 가스 누출후 누출 경보 시스템만 제대로 작동됐어도 문제는 달라졌다.

중앙로역 사건도 한 사람의 어린애같은 불장난이었지만 전동차 내부의 인화성 물질, 중앙통제 미숙, 운전자의 판단 부족 등 사회적 가연(可燃) 요인들과 결합하면서 결국 대형 참사로 확대되지 않았는가. 안전 문제에서 대구는 지난 8년을 허송세월한 셈이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더 심각한 문제는 사건 해결 방향을 놓고 시민의 눈이 양분(兩分)돼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보수와 진보의 대립인지, 세대 차이인지, 또는 합리적 해결과 원만한 해결을 원하는 계층간의 입장 차이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양자 구도인 것만은 확실하다.

수습책 兩分돼 갈등

비교적 진보적인 시각은 이렇다.

같은 사건이 자꾸 발생하는 것은 시스템의 문제다.

따라서 이번 기회에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자는 것이다.

즉 이런 사고가 확대된 구조적인 문제점까지 제대로 묻자는 것이다.

지난 상인동 가스 폭발사고가 결국 작업 인부 몇 명을 구속시키는 선에서 끝난 것을 상기시키며 이번만은 그렇게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편에서는 딴 판이다.

가뜩이나 대구의 경제와 민심이 어지러운 판에 사고를 빨리 수습하고 '제2의 출발'을 서두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희생자들의 억울함과 유족들의 슬픔이야 천번 만번 이해하지만 U대회같은 국제대회를 앞둔 시점에서 이를 원만히 매듭짓지 못하면 대구는 그야말로 3류도시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시간은 한없이 소요될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해결이 되든 어느 한쪽은 상처를 입을 것이다.

대구는 지금 대형 참사라는 물리적인 폐허 위에 '방법론의 대립'이라는 넘어야 할 또 하나의 '이념의 벽'에 부닥쳐있다.

발길질 할 데 없는 시민들은 오늘도 애꿎은 자동차의 가속 페달만 깊숙이 밟아댄다.

윤주태(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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