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시티 대구 의료 100년] 제1부-조선시대 의료 <3>전염병 발생 원인

입력 2013-01-14 07:03:08 수정 2013-01-14 07:03:08

혹독한 기근 뒤 어김없이 炳魔…삽시간에 수백만명 삼켜

6'25가 끝난 뒤 동산병원 주변 전경. 쓰레기와 고물더미를 뒤지는 소년들의 모습이 보인다. 고금을 막론하고 전쟁과 기근, 병마가 휩쓸고 간 뒤 민초들의 삶은 팍팍하기 그지없었다.
6'25가 끝난 뒤 동산병원 주변 전경. 쓰레기와 고물더미를 뒤지는 소년들의 모습이 보인다. 고금을 막론하고 전쟁과 기근, 병마가 휩쓸고 간 뒤 민초들의 삶은 팍팍하기 그지없었다.
조선 후기 백성의 삶은 기근과 질병에 시달려 혹독하기 그지없었다. 사진은 대구 근교 한 시골 마을에서 부녀자들이 일하는 모습.
조선 후기 백성의 삶은 기근과 질병에 시달려 혹독하기 그지없었다. 사진은 대구 근교 한 시골 마을에서 부녀자들이 일하는 모습.

전염병은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무려 160년을 괴롭혔다. 하지만 이 시기 조선에만 역병이 돌거나 극심한 피해를 준 것은 아니었다. 전염병은 혹독한 기근 뒤에 찾아왔고, 기근의 배경에는 15~18세기 전 세계를 뒤덮은 소빙기(小氷期)가 도사리고 있었다. 조선 후기 거의 대부분이 소빙기 탓에 수많은 자연재해에 시달렸다. 당시 열악하기 그지없던 위생 상태도 전염병이 불길처럼 번진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게다가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 전염병이 돌면 어김없이 조선에도 찾아들었다.

◆기상 이변, 우박에 맞아 죽는 일까지

'몇 년 동안 수재와 한재(가뭄)로 기근과 역병이 유행하고, 해와 달이 박식(일식과 월식)하였으며, 여름에 눈이 오고, 겨울에 천둥치며 춥지 않아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에 꽃이 피며, 안개가 어둡게 끼고, 기괴한 별이 스물인데…. 허물이 쌓이면 원망을 부르고, 원망이 쌓이면 재난을 부르고, 재난이 쌓이면 재앙을 부르는 것이니 신은 저윽이 두렵습니다.'

숙종실록(숙종 3년'1677년 11월 21일)에 남아있는 글의 일부로, 우의정 허목(1595~1682년)이 임금에게 올린 내용이다. 이때 기후가 얼마나 상식을 벗어났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계절마저 뒤바꾼 기후 이상은 기근과 전염병을 불러들였다.

한국 역사상 전대미문의 기아 사태로 기록된 '경신 대기근'도 소빙기 때문이었다. 조선 현종 재위 기간인 1670년(경술년)과 1671년(신해년)에 발생한 경신 대기근의 결과는 가히 파멸적이었다. 조선 전체의 흉작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고, 당시 인구의 20%에 해당하는 100만 명 이상이 굶어 죽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1670년 실록 기록 중 일부를 살펴보자.

4월 초순까지 연이어 서리'우박이 내려 곡식의 싹이 죽고 목화'삼베가 모두 피해를 입었으며, 심지어 3월에 눈이 내리는 기현상을 보인다. 5월 17일 평안감사의 보고는 기가 막힐 정도다. '우박으로 벼가 상한 것은 물론 오리알 만한 크기의 우박이 쏟아져 반 자나 쌓이고, 네 살짜리 아이가 그 우박에 맞아 죽었다'. 가뭄도 극심했다. 비가 너무 오지 않아 도저히 파종을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파종기에 한 달간 비가 오지 않아 그나마 남아있던 밀과 보리조차 모두 말라 죽었다.

5월 말 비가 내려 가뭄이 끝나는가 싶더니 홍수가 찾아왔다. 6월 8일 경상도에 참혹한 홍수가 벌어졌다는 경상감사 보고가 올라왔다. 전국 팔도가 홍수 피해를 입었다. 기우제를 지낸 지 한 달 만에 기청제를 올려야 할 판이었다.

◆겨울부터 봄까지 굶주리다 사망자 속출

20여 년 뒤 숙종 재위기인 1695년에 조선에 '을병 대기근'이 찾아들어 다시 100만여 명이 굶어 죽었다. 소빙기로 인한 기상이변은 세계적 피해를 낳았다. 일본에선 덴메이 대기근(1782~1788년)이 있었다. 전국에서 수만 명이 굶어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기아뿐만 아니라 전염병이 창궐해 결국 일본 전역에서 전국에서 사망자가 30만~5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발생 원인은 조금 다르지만 아일랜드 대기근(1847년)의 경우 당시 인구 800여만 명 중 200여만 명이 죽고, 200여만 명이 이민을 떠나 인구를 절반으로 줄어버렸다. 거리에 시체가 즐비했고, 살아 있어도 마치 시체와 같았다.

한 영국 언론인은 당시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들의 모습은 인간의 살이 어떻게 뼈와 분리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사람들은 밤마다 공포에 떨었다. 쥐들이 그들의 살을 파먹었고 다음 날 아침이면 많은 수의 사람들이 살점이 떨어져나간 채로 죽어 있었다. 어린이들의 배는 (영양실조로) 곧 터질 듯 부풀었고, 전염병 때문에 몸은 성한 곳이 없이 터져 있었고, 피가 흘러내렸다. 길거리에는 시체가 산을 이루고 있었고 마을은 황폐화됐다. 이곳은 지옥과 같았다.'

조선의 모습도 다르지 않았다. '여역(전염병)이 치열하게 일어나 서로 전염돼 죽은 자가 날마다 잇따르고 있는가하면 심지어 외방에서 모여든 굶주린 백성은 오로지 진휼의 죽을 먹기 위해 온 것인데 겨울부터 봄까지 굶주린 데다가 밤낮으로 한데에 거쳐하다 보니 바람과 서리에 시달려서 사망자가 속출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대규모 기근은 평균 3~6년마다, 전염병은 평균 3년마다 한 번씩 백성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백성들은 하늘이 내린 재앙에 거의 무방비로 노출됐다.

◆한양의 거리는 오물투성이

조선 후기 농업 기술의 발달 등 여러 이유로 인구가 크게 늘었다. 대기근이 닥치면 인구가 급감했지만 전체적으로 인구는 크게 늘고 있었다. 아울러 도시로의 인구 집중도 심해졌다. 여름철 불결한 위생 상태에서 많은 전염병이 발생했다.

실학자 초정(楚亭) 박제가(1750~1805년)는 '북학의'에서 당시 한양의 위생 상황을 적나라하게 기록했다. '성안에서 나오는 분뇨를 다 수거하지 못해서 더러운 냄새가 길에 가득하며, 냇가 다리 옆 석축에는 사람의 똥이 더덕더덕하게 붙어서 큰 장마가 아니면 씻기지 않는다. 개똥과 말똥이 사람의 발에 항상 밟힐 지경이니, 밭을 가꾸지 않는다는 것을 이것으로 알 수 있다. 똥이 이미 남아 돌아가니 재는 모두 길에다 버려서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눈을 뜰 수 없고, 이리저리 날려서 많은 집의 술과 밥을 불결하게 하지만, 사람들은 한갓 불결함을 탓할 뿐, 실은 함부로 버린 재에서 생기는 것인 줄 모른다.'

중원문화재연구원 이규근 박사는 '조선 후기 질병사 연구'에서 "(한양의 경우) 주요 도로를 제외한 대부분 도로가 오물로 넘쳤는데, 이러한 오물들은 개천으로 흘러들어 풍기는 냄새는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독했다. 이러한 환경 문제는 17세기부터 발생했는데, 인구가 도성 내로 집중하는 현상이 벌어졌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감수 = 의료사특별위원회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