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가요 이야기] 국경 정서를 노래한 송달협(상)

입력 2013-07-11 14:22:15 수정 2013-07-11 14:22:15

훤칠한 키, 잘생긴 용모 인기…비통한 북방 정서 반영

여러분께서는 송달협(宋達協)이란 가수의 이름을 들어보셨습니까? 틀림없이 생소한 이름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송달협이란 가수는 1936년부터 1940년까지 5년 동안 제법 인기를 날리던 대중연예인이었습니다. 그가 취입한 노래는 도합 36곡으로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오케레코드사에서 28곡, 빅터레드사에서 8곡이 모두이지요. 발표한 음반의 수는 적지만 송달협은 주로 극장 쇼 무대와 악극단 공연에서 대단한 인기를 지녔던 가수였습니다.

송달협은 1917년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성장기 이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다만 그의 나이 19세가 되던 해 오케레코드사가 평양에서 주최한 가요콩쿠르에 출전하여 2등으로 뽑혔고, 그로부터 가수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오케레코드사 전속가수가 된 송달협은 첫 데뷔곡으로 '야루강 천리'(박영호 작사'손목인 작곡)를 1936년 3월에 발표했습니다. 이후 송달협은 오케레코드사 전속가수로 '국경의 버들 밭' '순정의 달밤' '노타이 시인' '국경열차' '국경의 뱃사공' 등을 발표하게 됩니다. 오케레코드사에서 1936년에 3곡, 1937년에 11곡, 1938년에 14곡을 발표한 다음, 어찌 된 곡절인지 1938년 11월에 빅터레코드사로 소속을 옮겨서 이후 1940년 3월까지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8곡을 발표하게 됩니다. 빅터사에서 발표한 곡목은 '사랑의 황금열차' '추억의 두만강' '비오는 이국항' 등입니다.

1941년 송달협은 다시 빅터사를 떠나 자신의 옛 터전인 오케레코드로 복귀했고 여기서 두 장의 음반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니까 가수 송달협의 데뷔곡은 '야루강 천리'와 '끝없는 향수'이고, 마지막 곡은 1942년에 발표한 '만주신랑'입니다.

송달협의 발표작품들을 눈여겨보노라면 송달협과 함께했던 작사가로 박영호, 김능인, 신강, 김진문, 목일신, 조명암, 김용호, 김다인, 이부풍(노다지), 김성집 등의 이름이 눈에 띕니다. 이 가운데서 박영호의 작품이 가장 많습니다. 작곡가 손목인(양상포), 박시춘, 문호월, 이봉룡, 전수린, 이경주, 이면상, 김양촌 등과 일본인 작곡가 고하정남(古賀政男)의 이름도 확인이 됩니다. 혼성 듀엣으로 함께 취입했던 여성가수로는 이난영, 장세정, 이은파, 김복희가 보입니다. 혼성합창에 함께 참여했던 가수로는 남인수의 이름도 선명하게 들어옵니다. 이런 가수들과 함께 취입했다는 사실은 당시 송달협의 인기와 수준이 상당히 높았음을 말해줍니다. 키도 컸고, 용모도 잘생긴 편이라 특히 극장무대를 찾아온 여성 팬들에게 송달협의 인기는 대단했다고 합니다.

송달협의 음색이나 창법은 마치 남인수와 진방남 두 사람의 특색을 합친 것 같은 느낌의 성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맑고 가늘며 높은 음역까지 쉽게 구사하는 창법은 남인수풍이라 할 수 있고, 은근하면서도 호소하는 듯한 애절함은 진방남풍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특징들이 송달협 노래의 비감하고도 곡진한 느낌의 맛을 더해주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송달협이 부른 가요작품 제목들을 살펴보면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의 국경지역 정서를 담아낸 것들이 여러 편입니다. '야루강 천리' '국경의 버들 밭' '국경열차' '국경의 뱃사공' '추억의 두만강' 등 이른바 식민지시대의 비통한 북방 정서를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조선이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되어가던 과정과 이로 말미암은 한국인의 만주 이주사(滿洲移住史)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망명의 방식으로 전개된 유랑이민, 그 후에 강제로 펼쳐진 일제에 의한 정책이민 과정과도 직결되어 있습니다. 1943년 통계자료에 의하면 재만 조선인 숫자가 무려 140만 명이 넘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압록강과 두만강을 울면서 넘어갔던 것이지요.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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